한벌의 폰트를 만드는 효과적인 프로세스
사용자 환경과 제작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폰트를 만들어내는 프로세스도 진화하고 발전되어 왔다.
작업 초반의 과정은 완성형이나 조합형 모두 대동소이하지만, 어느 정도 진행되면 다른 과정을 밟게 된다.
여기에서는 완성형을 기준으로 한 벌의 멋진 폰트를 만드는 제작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1.정확한 컨셉을 잡아야 한다.
사용자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방송자막이나 인터넷 등의 디지털 매체, 잡지 광고나 소설책 표지와 같은 출판인쇄물,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과 같은 옥외물 등 폰트가 쓰이는 매체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추세이다.
그 중에서도 방송자막이나 게임용으로 활용되는 서체라면 출판인쇄용과는 다른 매체의 질감이나 환경을 고려해 디자인해야 하고, 본문용이나 제목용 중 더 많이 쓰이는 폰트의 크기에 맞추어 디자인도 달라져야 한다. 최근에는 같은 웹 폰트도 네비게이션용으로 쓰이는 것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서 쓰이는 것, 혹은 사용자의 연령층에 따라 컨셉부터 다르게 접근해 개발하는 사례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2.자료조사를 꼼꼼히 한다.
정해진 컨셉에 따라 그 글자의 분위기에 맞는 기존의 폰트나 로고타입 혹은 외국 자료(영문)들을 종합적으로 수집한다. 초보 디자이너들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암담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료조사는 기존 서체와 어떻게 차별화 해 자신만의 독특한 폰트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3.최소한의 단어로 폰트의 표정을 만든다.
5자~10자 정도의 특정한 글자를 로고타입처럼 레터링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이때 중복되는 글자가 없이 대표적인 자음과 모음이 골고루 들어가고 표현하기 어려운 곡선이 적절히 섞이면 좋다. 특히 ㅇ꼴의 경우 사용의 빈도수가 높아 전체 문장에서의 느낌을 좌우하므로 꼭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글자의 표정 또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우선 구조적으로 네모틀로 할 것인지, 탈네모틀로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탈네모틀이라면 기준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무게중심은 어디에 둘 것인지, 세리프를 넣을 것인지, 텍스츄어를 가미할 것인지 등등의 다양한 표현방법으로 서체의 성격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폰트의 표정은 디자이너의 얼굴이다. 디자인 의도나 디자이너의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자기다움’을 글꼴로 잘 표현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 아닐까 싶다.
4.20~30자의 문장을 구성한다.
같은 자음이나 모음은 카피해 활용하면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변형과 응용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고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때 그 서체의 첫 느낌과 장점들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글자를 이루는 요소와 여백, 공간들 간의 강약이나 분배를 얼마나 짜임새 있게 하느냐에 따라 매력적인 서체가 될 수도 있고, 무미건조한 서체가 될 수도 있다. 글자의 구조도 정확히 판단해서 진행한다. 문장을 만들어 보면 그 서체의 성공여부가 어느 정도 판가름난다고 볼 수 있다.
5.대표되는 글자를 중심으로 파생작업을 한다.
문장작업이 완료되면 거기에 없는 글자들을 좀 더 만들어 본다. 이왕이면 요소가 많고 구조가 복잡한 글자들을 미리 만들어 보는 것이 좋다.
‘뺄’, ‘를’, ‘꽐’, ‘홀’ 등과 같은 복잡한 글자나 종성이 ㅎ으로 끝나는 ‘뭏’등을 작업하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힐 수도 있고, 처음에 작업했던 자모음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곡선 중에서도 ㅅ꼴의 경우, 초성에 쓰일 때와 종성에 쓰일 때 각각 어떻게 처리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완성형 낱자들을 한자 한자 작업하다 보면 자음이나 모음의 모양을 약간씩 변형하지 않으면 시각적으로 불안정한 글자인 것도 있다. 특히 다양한 모양의 자음꼴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데, 일정한 자폭을 유지하면서 굵기와 크기를 조화롭게 하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다.
6.전체 글자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파생작업을 꼼꼼히 하고 나면 전체 KS5601에 맞추어 2,350자 작업을 해야 한다. ‘가’부터 ‘힝’ 까지의 사이에 비어 있는 글자를 통일감 있게 만들어 가는데, 숙련된 디자이너라 하더라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므로 계획적으로 일정을 잡아 차근 차근 해나가는 것이 좋다.
폰트 디자이너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꼽히는 끈기와 인내심이 가장 발휘되어야 할 부분이다.
7.다양한 문장을 테스트한다.
전체 글자들이 만들어지면 TTF(트루타입 폰트)를 만들어 어플리케이션(쿽 또는 워드 등)에서 다양한 문장으로 출력해본다. 이 과정을 통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색한 글자 배열이나 글자들의 크기와 굵기의 일정성 등을 확인해볼 수 있다.
혹은 세리프, 맺음, 꺾임 등의 형태 표현의 규칙들이 시각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낱글자들과 단어끼리 서로 어울리는지, 각 글자들의 속 공간과 바깥 공간의 배분은 적절한지, 글자 사이, 낱말 사이, 글줄 사이 등은 고른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지,글줄의 흐름은 매끄럽게 유지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고 수정, 보완 작업을 하게 된다. 이러한 디테일 수정을 얼마나 꼼꼼하게 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서체의 퀄리티가 좌우된다.
8.한글과 어울리는 영자, 숫자 등을 디자인한다.
쓰이는 영자와 숫자의 디자인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비슷한 영문을 찾아 참고할 수도 있지만, 한글 디자인에 맞추어 순수하게 창작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 제작된 사춘기, 러브레터, 쿨재즈 같은 폰트들이 그러한 경우들이다. 영문 작업과 함께 부호나 특수문자도 작업한다.
9.한 벌의 폰트를 조판 테스트한다.
한 벌의 폰트를 놓고 자간이나 행간 등을 세심하게 검수하고 수정한다. 본문용 작업의 경우에는 작은 사이즈에서도 뭉침 없이 일정한 굵기를 유지해야 되고, 미세한 세리프들이 구현되어야 하므로 필름으로 출력해서 테스트하기도 한다.
'봄날'을 통해 본 폰트의 제작과정
봄의 활력과 싱그러움을 느끼게 하는 ‘봄날’은 기존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과 형식으로 디자인된 서체로, 캘리그래피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발맞추기 위한 신선한 손글씨 서체의 개발이 시급했던 윤디자인연구소와 때마침 자신의 캘리그래피를 폰트화하고 싶은 강병인 선생의 만남으로 그 탄생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배경에는 ‘손글씨를 폰트화함으로써 디지털 느낌을 최대한 감추고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필력이 살아 있는 서체를 개발한다’는 것과, ‘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전문 캘리그래퍼의 손글씨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등 두 가지의 의도가 있었다.
1.컨셉의 설정
강병인 선생이 제시한 컨셉은 ‘광고의 카피로 쓰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손글씨’ ‘ 자소의 느낌을 다양하게 하여 디지털이 가진 느낌을 최대한 없앤 폰트’ ‘인위적이지 않은 가는 펜글씨 느낌의 서체’ 등이었다.
여기에 몇 가지 선생 특유의 서법, 가령 ‘어미를 길게 늘여 쓰는 특징과 세로모임꼴 글자의 자폭이 가로모임꼴에 비하여 많이 좁은 편인 특징, 같은 글자라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달리 표현하는 서법’ 등이 고려되어야 했다.
2.시안의 마련과 낱자소의 전개
다양한 굵기와 스타일의 여러 시안에 대한 회의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 필력을 살리면서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a-3안을 결정하게 되었다. a-3안에 근거한 자필 샘플을 바탕으로 낱자소들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형태들을 나누고, 모임꼴의 형태에 따른 크기, 높이 등을 잡아서 2,350자를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에 있어서는 최대한 원도에 가깝게 그리면서 자소들의 다양한 형태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1차 작업을 완료한 뒤에 보니 어딘지 모르게 시원스럽지 못한 느낌이 있었다. 내부적인 회의를 통해 가로획을 더 가늘게 조정함으로써 속도감을 주는 방향으로 수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필력과 속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3.조형성과 사용자의 편의성 도모
좀 더 세부적으로는 글자들의 꼴별로 높이차를 두어 시각의 흐름에 변화를 주었고, 획의 굵기에 차이를 주어 속도감과 긴장감을 이끌어냈다. 또한 글자의 무게중심을 약간 상단에 정렬시킴으로써 균형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병인 선생 글씨의 특징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글자가 단어의 마지막에 오느냐 단어의 처음이나 중간에 오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했는데, 폰트는 어떠한 글자가 어떻게 조합되어 쓰일지 알 수 없기에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단어의 어미형 글자들을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회의가 기술개발부와 함께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공감입력기를 통해 입력할 수 있는 형태로 제작하려 하였다. 크기별 굵기별로 따로 서체를 제작하여 공감입력기를 활용하면 두께와 크기가 다른 서체를 한 문장에서 조합하여 문장의 특성에 맞게 강약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입력기를 통해서 작업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용자의 편의성이 떨어지고, 여러 가지 굵기와 크기의 서체를 한꺼번에 구매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4.가변폭의 적용과 Feature 기능의 활용
회의를 거듭한 끝에 Feature 기능을 이용해 다양한 어미의 형태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절충하여 작업하게 되었다. 피처 기능은 어미로 올 때 변화될 수 있는 140여 자를 다양한 형태로 제작, 아래와 같이 사용자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도의 경우 세로모임꼴의 자폭이 가로모임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좁아서 고정폭으로 작업될 경우 원도의 느낌을 살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모임꼴별로 자폭을 달리하는 가변폭 한글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가변폭으로만 제작될 경우 고정폭만 지원하는 어플리케이션에서의 활용이 문제가 될 일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세로모임꼴의 너비가 고정된 고정폭과 가변폭의 두 가지 스타일로 제작해야 했다.
5.다양한 형태의 어미 글자를 가진 서체의 탄생
이렇게 해서 필력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펜글씨를 광고 카피용 폰트로 디지털화 시키는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그 이전에 손글씨체 폰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획과 자소의 변화가 다양한 ‘봄날’은, 특히 가로모임꼴 글자와 세로모임꼴 글자의 자폭이 확연히 다르고 어미 글자를 선택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자연스럽고 짜임새 있는 손글씨체의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화된 폰트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싱그럽고 생동감 넘치는 봄날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서체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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