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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디자인 정책의 의미와 서울서체


01.
 일상의 삶과 문화에 주목하면서 디자인을 산업이나 비즈니스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공공영역과 접목해서 성찰해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디자인 분야에서 가시화되기 시작된 것은 1990년대중·후반부터이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촉발된 구체적인 계기는, 아마도 2005년 10월에 청계천 복원사업이 완료되고 이 사업과 더불어 서울시가 추진했던 간판정비사업인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이 서울시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당시 청계천 복원이나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의 진행절차나 결과물에 대한 호오(好惡)가 상당히 엇갈렸으나, 어쨌든 그 사업들의 진행 후 2005년 12월에 학계에서는 한국공공디자인학회가 출범을 했고, 국회에서는 공공디자인문화포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공공디자인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이 법률안은 같은 시기에 발의되었던 <산업디자인진흥법 전부개정법률안> 중 공공디자인 관련 내용과 일부 중복되고 당시 산업자원부와 문화관광부 간의 경쟁적인 구도 때문에 입법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법률안에 명시된 공공디자인의 개념정의와 기본원칙, 사업범위 및 추진방법 등은 중앙정부의 각 부처 및 지방자치단체들의 공공디자인 정책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7년 5월에는 서울시에 디자인서울총괄본부가 만들어졌고 이후 각 지자체에서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공공디자인 조직과 제도가 속속 만들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02.
 2008년 7월 15일에 발표된 서울시 전용서체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는 디자인서울총괄본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여러 공공디자인사업 결과물 중 하나이다. 현재 서울서체는 서울시청 현판사인과 시청 앞 시설 안내사인, 시청이동차량, 주민센터 현판 등에 이미 적용되었고 디자인서울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시민들에게도 무료로 배포됨으로써 점차 그 사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서울시가 서울만의 고유글꼴을 개발하여 도시정체성과 브랜드가치를 높이고자 한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에 비해 개발기간이 너무 짧고 예산도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 학술연구용역이 선행되기는 했으나 충분한 사전조사와 기획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서체를 개발해 곧바로 폭넓은 매체에 적용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점 등 때문에 사업 초창기에는 디자인계 일각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서체개발 총책임을 맡았던 편석훈 윤디자인연구소 대표는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 프로젝트에 일반적으로 투입하는 것보다 3배나 많은 인원과 시간을 쏟아 부었으며, 비용이나 실적보다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애정과 공을 들였다’ 말했다. 덕분에 서울서체의 1차 개발이 잘 마무리되어 발표된 것은 디자인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일련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번 서울서체 개발 역시 한국사회와 한국 디자인 관행의 악덕과 미덕, 한계와 가능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세기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하면 된다’와 ‘불가능은 없다’라는 소신이 21세기에 진행된 청계천 복원사업까지 이어졌다면, 서울서체 개발 역시 같은 경우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단 27개월 만에 끝내면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건설한 도로로 손꼽히지만 공사구간을 몇 군데로 더 나눴더라면 기간을 훨씬 더 단축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시민단체와의 공청회에서 “청계천 복원공사에 걸리는 시간은 2년이면 충분하다. 한 회사가 하는 데 6년이 걸리면 두 회사가 하면 3년, 세 회사가 하면 2년밖에 안 걸린다”고 했고, 완공 후에는 “기간은 마음만 먹으면 더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서체의 경우 3배의 인원을 투입하고 작업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을 통해 기간 내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서체개발과 같은 디자인 작업에서 경부고속도로나 청계천 공사에서처럼 구간을 끊거나 참여회사 수를 늘리는 방법을 통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가와, 설령 그러한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이 서체의 질적 수준에 미치는 영향은 없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작업방식의 선택이 동종업계 및 후속 디자이너 세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 지도 짚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의 디자인 조건에 대한 현실인식과 철학적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제기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열악해진 경제상황 속에서 당시 심각했던 물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경부고속도로를 놓는 게 필요했고, 자연생태하천이나 원래 상태로의 복원이 어렵다면 지금과 같은 청계천으로 복원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 입장과, 그런 방식보다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고 절차가 복잡해지더라도 여러 가지 사항들을 살피고 논의해 가면서 천천히 일을 하자는 입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03.
 이것은 서울서체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디자인 정책 수립 및 추진과정 전반에서 흔히 겪게 되는 딜레마다. 공공디자인사업을 뒷받침할 만한 법안이나 제도가 아직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연구도 미미한 상태에서 과연 공공디자인 사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까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테고 결과도 불투명하니 열악한 현실상황에서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 최선을 다하자는 입장과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 추진해간다면 결코 지금의 현실을 개선하거나 대안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거라는 입장은 종종 팽팽하게 맞서곤 한다.

 얼마 전, 에세이 형식의 연재 시리즈를 집필하고 있는 한 디자이너로부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정책적인 차원에서 추진된 디자인 프로젝트 사례들 중에서 처음 발주 때부터 마무리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으로 진행되어서 널리 알리면 좋을 만한 사례가 있으면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십여 개의 사례에 대해 조사를 하고 글을 써왔는데 전체 과정과 결과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경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고 우울해졌다’는 말과 함께였다. 나의 답변은, 그런 사례가 당장 떠오르지는 않지만 몇몇 디자인 프로젝트들의 경우, 왜 그런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거나 변명 혹은 핑계를 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전국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최근의 공공디자인 현상을 디자인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흥미로운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19세기 유럽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은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과 동시대에 있었던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 어떻게 봉건적 유럽사회 전체를 뒤흔들어서 사회, 경제, 사상, 종교,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면서, “프랑스대혁명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산업혁명은 그 끔찍스러움으로 그들을 자극하였으며, 이 두 혁명의 산물인 부르주아 사회는 예술가의 존재 그 자체와 창조양식을 변혁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두 혁명이 부르주아 사회의 승리를 가져왔지만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의) 정치혁명을 삼켜 버리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발전과정을 보였다고 서술하였다.
 
 현대 디자인은 홉스봄이 지적한 그 이중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가 형성되고 근대시민사회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서구 디자인의 역사는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이나 환경을 어떤 모습으로 변혁하고 어떠한 사회를 실현해낼 것인가 하는 정치사회적인 문제의식과 경제산업적인 이해관계가 상호 치열한 견제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 디자인은 1960년대 이래 한국사회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나 고민 없이 경제적인 필요와 산업적 요구에 의해서만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공공디자인이 사회적인 화두로 강력하게 제기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개별적인 공공디자인사업이나 디자인 결과물들의 성패에 대한 주목과 더불어-공공디자인이 불균형한 발전을 해온 한국 디자인을 ‘디자인답게’ 정상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균형추로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한다.

 거시적인 구도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미시적인 차원에서만 디자인을 바라볼 경우, 공공디자인은 자칫 ‘공공’이라는 단어를 앞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디자인의 공공성이라는 차원보다는 다만 클라이언트가 기업에서 국가나 지자체로 바뀌었을 뿐 지난 반세기 동안 해온 디자인 관행을 그저 공공영역까지 확장되는 데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한국 디자인은 더욱 더 불균형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나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큰 구도 속에서 공공디자인을 바라본다고 해서 각각의 사업결과물들의 완성도나 질적 수준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비즈니스로서의 디자인의 성공과 디자인의 공공성 확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디자인의 균형 발전을 위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공디자인 열풍 이전의 디자인 인식과 이후의 그것은 그 양상이 매우 다르며, 가시적인 차원이건 비가시적인 차원이건 한국사회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공공디자인은 이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주)
1)에릭 홉스봄. 박현채, 차명수 역. 『혁명의 시대』, 한길사, 1984, 337쪽.
2)에릭 홉스봄. 앞의 책,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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