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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있는 작품

언어적,형상 형상적 언어




 바야흐로 기호 범람의 시대이다.
 미디어의 발전과 과잉 보급으로 우리는 무수한 기호들을 접하며 살아간다. TV, 인터넷, 거리의 광고판 등 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이미지, 문자 혹은 둘 다이기도 한 여러 기호들은 때로는 자의적으로 읽혀지고 때로는 표류하는 기표로 우리 곁을 스쳐간다. 

 기호의 교차현상도 활발하다.
 문자기호를 이용하여 이미지형상을 만들어내는 이모티콘은 1982년 처음 등장한 후 현재까지 널리 쓰여지고 있으며, 컴퓨터 언어와 영상언어 등은 문자언어의 입력과 조합을 통해 다양한 시각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호 과잉의 시대, 미술 안에서도 다양한 기호의 등장과 그 영향력을 엿보게 된다. 사실 고대 상형문자들의 형태에서 보여지듯 문자와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하나였다.
 또한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가지는 문자와 미술, 혹은 글과 그림은 문자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 혹은 이미지만으로 드러낼 수 없는 틈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상호교류해왔다.
 “회화는 말 없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Painting is a mute poetry andpoetry is a speaking picture)”
이라는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이나 “시는 형태가 없는 그림이며,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다(詩無形之畵 畵無音之詩)”라는 중국 소동파의 말은 시와 그림의 관계를 통해 문자언어와 형상이미지의 연관성을 뒷받침한다.

 동양에서는 정신이 깃든 쓰기인 서예를 통해 조형성과 정신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또한 시(詩), 서(書), 화(畵) 일치라 하여 글과 그림이 미술 안에서 자연스럽게 병존하고 호흡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반면 서양미술에서의 본격적인 문자와 이미지의 교차 및 병치는 입체주의 이후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에서부터 활발히 전개된다. 

 이 시대 우리의 미술작품들 속에서도 문자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추상화의 조형요소로서 문자를 도입한 시도로부터, 문자와 이미지의 이중형상 연출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현대판 문자도를 선보이기도 한다.
 또 ‘글(문자)’과 ‘그림(이미지)’의 두 영역이 한 화면에 조화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쓰기의 방식을 이용해 언어, 소통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미술에서 문자의 활용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문자가 지닌 조형성과 상징성이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아이디어와 동기를 부여하고, 작품의 해석을 보다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언어적 형상 : 글 그리기 

 문자는 사회적 약속이자 의사전달을 위한 기호이지만, 지시적 특성 외에 조형적 요소 자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나아가 조선시대 ‘문자도’와 같이 기호로서 약속된 형태나 소리와 함께 각자가 지칭하는 뜻을 동시에 발현해 보이기도 한다.
 문자와 이미지가 작품 안에서 한 몸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흔히 문자는 청각적 경험을 유도하고 미술은 시각적 경험을 유도한다는 관념, 혹은 이미지는 ‘유사’, 단어는 ‘관습’이라는 전통적인 전제를 넘어, 상호교차적인 특성을 보인다.이러한 공존양상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문자의 형상성에 주목하여 문자를 작품에 도입하고, 화면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조형적 요소로 기능하도록 한 작품들이다.
 두 번째로는 문자와 이미지의 이중형상을 보이되, 문자가 가지는 형상성 뿐 아니라 뜻(지시성)이 함께 작용하여 다중적이고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내는 작품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조선시대 ‘문자도(文字圖)’의 형식을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화 작품들이다.


언어와 형상 :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 

 작가들은 작품 안에서 이미지와 함께 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제시하곤 한다. 이러한 문구는 작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미지와의 비연관성, 단어의 불특정성으로 인해 점점 더 미궁 속에 빠뜨리게 만든다.
 작가 내면의 마음상태나 기억을 드러내는 메타포로서 특정한 내용을 암시하기도 하고, 표류하는 기표로서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하는 것이다. 의식 혹은 무의식의 발현으로 등장하고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텍스트들은 이미지와 함께 호흡하면서 작가 혹은 관람자의 무의식을 환기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형상적 언어 : 그림 쓰기 


 때로 우리는 이미지 형상보다 문자텍스트가 두드러지는 미술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이 작품들은‘그리기’보다는 ‘쓰기’의 행위가 주가 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들 작가들이 행한 ‘쓰기’ 라는 것은 단순히 글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넘어 보다 다층적인 구조를 가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문자텍스트의 형태나 제시방식 등은 미술로서의 조형성을 가질 뿐 아니라 각 작품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내용적인 면에서 문자언어에 의한 ‘소통’의 방식에 대한 이슈를 주제화하거나 내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문자언어와 이미지형상의 사이에서 고유의 조형언어를 구축해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보는 것은, ‘현대미술에서 문자기호의 활용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질문해보고 미술이라는 언어에 대한 보다 다양한 소통방식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언어적 형상, 형상적 언어:문자와 미술>展(2007. 11. 28 ~ 2008. 2. 10) 도록의 서문을 저자의 재가를 받아 발췌·편집한 것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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