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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새로운 시선

고객님, 블랙 색상도 있으십니다.


벌써 12월도 열흘 가량 지났습니다. 그해 여름이 더우면 다가오는 겨울이 무척 춥다는 속설이 있어요.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가을의 정취 고사하고, 10월 말부터 무척 추웠습니다. 따라서 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유통업계마다 겨울 용품을 구매하려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지요.
뉴스를 보니 올해는 특히 백화점마다 브랜드 세일 동안 겨울 상품의 매출이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젠 모든 유통업계가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판매에 전력투구하고 있네요.

저도 일찍 추워진 날씨 탓에 겨울에 입을 따뜻한 패딩 점퍼를 구매하고자 백화점을 찾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하기 위해 철저히 교육받은 직원이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맞이합니다.


점원 : 반갑습니다.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 있으십니까?
점원의 인사를 받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위해 매장을 쭉 훑어봅니다. 그리고선 갈색 점퍼를 집어 들며 점원에게 질문합니다.
나 : 이 점퍼 다른 색상도 있나요?
점원 : 네, 고객님. 블랙 색상, 아이보리 색상도 있으십니다.
나 : 그럼 검정색으로 입어 봐도 될까요?
점원 : 네, 고객님,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앞장서며) 이쪽으로 오실게요.

어떠세요? 얼핏 보기엔 “참 친절한 직원이구나.”라고 보이시지요? 하지만, 이 친절 직원의 대답은 대부분 틀렸습니다. 밑줄 친 부분을 눈여겨 봐주세요.
 
“블랙색상, 아이보리 색상도 있으십니다.”

 옷은 사물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서는 옷을 의인화하여 존칭 했네요. 많은 유통업계 직원이 친절함을 표현하고자 자주 쓰는 관용적인 어구입니다. 저 역시 그동안 익숙하게 들으며 흘렸던 말이라 틀린 표현인지 몰랐습니다. 따라서 ‘블랙색상도 있습니다.’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탈의실로 오실게요” 라는 두 번째 문장이 있습니다. 이 말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심지어 이 문장은 유통업계 외에 다른 서비스업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이용되고 있는 실태입니다. 예를 들면, 병원에서 간호사가 “**님, 주사실로 가실게요.”라는 얘기를 한두 번쯤 들어봤을 테니까요. ‘~할게요’의 ‘ㄹ게’라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에게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은 ‘할게요’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즉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말한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즉 직원이 “탈의실로 가실게요.”라고 말했으니 탈의실로 갈 사람은 고객이 아니라 바로 그 말을 한 백화점 직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객님, 탈의실로 가주세요’라거나, 이 말이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된다면 문장을 길게 해서 고객에게 전해주세요. “고객님, 저쪽에 있는 탈의실로 가셔서 입어보세요”처럼 말이지요.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유통업계에서 자주 듣고,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말이라는 것의 전파력은 상당하잖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공손하면서 친절함으로 인식되어 판매업에 종사하시는 많은 분이 이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물론 유통업계 쪽에서 고객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절 교육을 한다는 건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구매자 입장에선 판매하는 이들이 친절하게 응대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이런 언사들이 친절함으로 인식되어 널리 퍼진 것이 아닌가 싶네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고객’은 일본어에서 온 말입니다. 주로 '단골손님'을 뜻한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말을 거의 밀어내고 널리 쓰이고 있네요. 일부 백화점에서 '손님'이라고 썼다가 무시한다는 불평으로 다시 '고객님'으로 쓰기로 했다는 말마저 들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손' 자체가 높임말이며 거기에 '-님'까지 붙였으니 '손님'은 아주 높이는 말입니다. 되도록 '손님'을 써야 바람직합니다.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3기 배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