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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

한글 관련 단체의 역사 1-우리 겨레를 지킨 한글의 힘


 글/김 한빛나리(한글학회 연구원)


1.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한나라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과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켜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잘 닦아지나니라.

그 말과 그 글은 그 나라에 요긴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다스리지 아니하고 묵히면 덧거칠어지어 나라도 점점 내리어 가나니라.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니라. 또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 곧 그 사람들이 무리진 덩이가 천연으로 이 땅덩이 위에 홀로 서는 나라가 됨의 특별한 빛이라.

이 빛을 밝히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밝아지고 이 빛을 어둡게 하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어두워 가나니라.


 



 오늘날 우리가 숱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문화민족으로서 질 높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 중심에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의 억압 하에도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한글창제의 깊은 뜻을 가장 정확히 널리 펼친 분으로,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썼으며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분이었다.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우리말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으며, 한글의 맞춤법, 한자말이나 외래말을 우리의 쉬운 말로 다듬기 등 국어의 개화에 앞장섰던 선봉자였다.
 또한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선생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 세종의 정신을 전해줌으로써 우리 국어학이 보다 넓고 깊게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장본인이다.

 그 정신과 뿌리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정보통신(IT) 강국이 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한글을 지켜내고 갈고 닦는 데 헌신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정신이 탄생시켰던 최초의 한글단체 한글학회의 역사만 해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 우리말글과 함께 걸어온 100년, 한글학회

2.1. 우리말글 연구기관의 탄생

 한글을 다듬고 연구하는 기관이 생긴 것은 세종대왕이 대궐 안에 세운 정음청(언문청)이 처음일 것이다. 정음청은 한글(훈민정음)을 가꾸고 국민생활에 편리함을 주기 위한 여러 일들을 해왔으나, 시대를 거듭하면서 한글은 사용금지 혹은 폐지 등 오랫동안 핍박과 시련을 겪기도 한다.
 갑오경장 이후에야 다시 생기를 되찾아 과거시험을 한글로 치르거나, 공용문서나 각종 경전, 교과서에 한글이 쓰이고, 순한글 신문(독립신문)이 나오면서 우리말 연구와 활동이 조직화되어갔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뜻있는 학자들이 연구모임을 갖게 되고 그 체계를 잡아 한글학회가 태어났으니, 정음청이 국가기관이었다면 민간학술단체로서는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한글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태어난 한글학회는 우리말 연구와 한글운동뿐만 아니라, 나라가 일제의 창칼 아래 짓눌렸을 때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우리말글로 겨레얼을 되살리고자 하는 민족단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 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고,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창립정신은 100년을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다.

2.2. ‘한글날’ 제정

 한글학회는 우리 겨레의 세계적 자랑거리인 훈민정음 반포의 날을 기리기 위하여 왕조실록(113권) 세종 28년 병인 9월 조에 나타난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것을 근거로 ‘가갸날’을 정하고,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 곧 한글이 반포된 지 8회갑(480년)이 되는 날, ‘신민사(新民社)’와의 공동주최로 각계인사 400여 명을 식도원에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가갸날’로 선포하였다.

 그 뒤 날짜 환산방법에 따라 그 날짜가 여러 차례 바뀌다가 1928년에는 그 이름도 ‘한글날’로 바뀌게 되었다. 왕조실록 근거에 의해 9월의 끝날인 음력 29일로 정해졌던 것이 1932년에는 양력 10월 29일로 옮겨지고, 또 음력과 양력의 환산방법을 되짚어 10월 28일로 바뀌었다가, 1940년 7월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의거해 10월 9일로 다시 정해져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2.3. ‘한글 맞춤법’ 제정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기 위한 바탕은 ‘훈민정음’에 규정되어 있다. ‘합자해’에서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 ‘글자’를 이룬다는 원리와 그들의 위치, 차례 등을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글자는 음소글자이지만 그 실제의 쓰임에서는 음절단위 글자로 모아쓴다는 ‘형태주의 맞춤법’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1930년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의 제정을 결의하고 몇 년 동안의 작업 끝에 1933년 한글날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우리 어문규정의 틀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그 뒤 몇 번의 수정과 개정을 거친 뒤 정부가 한글학회의 한글 맞춤법의 틀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맞게 다시 고쳐 1988년 문교부 고시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년의 유예기간을 둔 뒤 198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다.
 



 1908. 8. 31. 국어 연구 학회 창립.

 1909. 11. 7~1910. 6. 30. 제1회 ‘강습소’(중등과) 설립, 운영(강사:주시경, 졸업생 20명).

 1913. 3. 23. ‘한글모’로 개칭(회장:주시경).

 1926. 11. 4(음력 9. 29).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돌)에 ‘가갸날’이라 이름하고 그
                첫 기념식.

 1927. 2. 8. 동인지 월간《한글》 창간호 펴냄(4× 6판, 세로짜기). 제2호부터는 4×6배판

 1931. 1. 10. 학회 이름 ‘조선어학회’로 개칭.

 1933. 10. 29(한글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책으로 펴냄.

 1936. 10. 28(한글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펴냄.

 1940. 6. 25.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

 1942. 10. 1. 이른바 ‘조선어학회 수난’이 일어남.

 1947. 10. 9. 《조선말 큰사전》 제1권 펴냄.

 1948. 9. 2.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의 강의 시작.

 1949. 3. 24. ‘재단법인 한글집’의 설립 허가.

 1949. 9. 25. 학회 이름 '한글학회'로 개칭.

 1957. 10. 9. 《큰사전》 제6권 펴냄. 이로써 큰사전 완성.

 1958. 6. 15. 《중사전》 펴냄.

 1960. 4. 30. 《소사전》 펴냄.

 1960. 5. 1. 《중사전》 수정작업 시작.

 1962. 11. 1.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

 1966. 2. 28. 《한국 지명 총람》 서울편 펴냄.

 1967. 1. 30. 한글 전용 위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72. 9. 5. 월간《한글 새소식》 창간호 펴냄.

 1974. 7. 22. 학회 병설로 한글문화협회 결성.

 1975. 2. 22. 한글문화협회 아래 전국 국어 운동 고등학생 연합회를 둠.

 1977. 10. 8. 한글회관 낙성식.

 1979. 9. 8. 한글 글자꼴 연구 모임 가짐.

 1982. 12. 3. ‘한글 풀어쓰기 연구 모임’발족.

 1984. 2. 21.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

 1984. 9. 10.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85. 25~27. 제1회 우리말글 연수회.

 1986. 12~22. ‘한힌샘(주시경) 연구 모임’발족.

 1987. 12. 3. 《문학 한글》 창간호 펴냄.

 1987. 12. 22. 《주시경 선생에 대한 연구 논문 모음 1》 펴냄.

 1988. 5. 15. 《한힌샘 연구》 창간호 펴냄.

 1988. 12. 20. 《교육 한글》 창간호 펴냄.

 1991. 10. 9~15. 한글도안 상품 큰잔치.

 1991. 12. 3.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펴냄.

 1991. 12. 22. <우리말 큰사전》 펴냄.

 1993. 10. 9. 한힌샘 주시경 선생 흉상 세움.

 1994. 10. 9. '한글학회 한글정보'(컴퓨터 통신 서비스) 개설.

 1996. 2. 1. 전자국어사전 <한글 우리말 큰사전> CD-ROM 제작.

 1996. 10. 9. 한글학회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http://www.hangeul.or.kr)

 1996. 12. 16. '국어학 자료 은행' 완성(논문 20,375편).

 1997. 7. 7~19. 제1회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

 1998. 12. 30. 국가 지원(문화관광부) <한국 땅이름 전자사전>(CD-ROM) 제작.

 1999. 7. 9.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 개최(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

 1999. 12. 15. 《깁고 더한 쉬운말 사전》펴냄.

 2000. 5. 13. 첫 '우리말글 지킴이'(아나운서 황현정) 위촉 후 덕수궁에서 광화문까지
                  거리홍보.

 2001. 5. 26. 첫 ‘아름다운 우리말 상호’(섬마을밀밭집, 종로구) 선정, 그 보람
                 (상징현판)을 걸어 줌.

 2001. 6. 2. 제1회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주식회사 이슨과 공동주최.

 2001. 12. 15. <우리 토박이말 사전> 펴냄.

 2002. 2. 22~3. 5. 유럽 지역 한국어학교 순회강연회.

 2002. 4. 4. <한국일보> <소년한국일보>사와 함께 "한글을 세계로!" 운동 시작.

 2004. 6. 3. 국회의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꿀 것을 담은 건의서(“국회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꾸어 주십시오!”)를 경제정의실천연합(공동대표 김성훈)과 공동으로 제출.

 2004. 9. 4. 온겨레 한말글 이름 큰잔치의 하나로 제1회 전국 한글 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 개최.

 2005. 4. 2. 학회 부설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위원회(KLPT)’,‘한국어 능력 시험’주관 
                기관으로 선정.

 2005. 6. 2. 국립국어원의 후원으로 “국어상담소 운영을 위한 공개 토론회”개최.

 2005. 12. 17. 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가 ‘한말글 문화협회 다시 일으키는 잔치’를 엶.

 2006. 8. 30. 얼말글 교육관 개관.

 2006. 10. 9. 국경일로의 승격 후 첫(560돌) 한글날 기념행사.

 2006. 11. 8. 법제처 용역과제인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를 위한 법률 개정안’ 수행,
                  최종 보고서 제출.

 2007. 4.30. 한글문화연대 비롯 관련 단체들과 ‘노원구의 영문자 간판 의무시행령’ 
                 철회 요청 기자회견.



 


 ‘한글 맞춤법’뿐 아니라 ‘표준말’을 사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 표기법’ 등 어문생활에 필요한 규범들도 한글학회가 정리하였다.

2.4. 조선어학회의 수난

 일제가 국학 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투옥한 사건으로,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과 한글을 통해 민족 얼을 드높이고자 했던 한글학회 회원들이 1929년에‘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만들어 <큰사전> 편찬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제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조작했던 사건이었다.
 1942년 8월 함흥 영생여고 학생을 붙잡아 취조하던 중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일을 맡고 있는 석인 정태진 선생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증인으로 내세워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검거,‘치안 유지법’이라는 내란죄로 기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끝내 함흥 형무소에 있었던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징역과 집행유예를 받은 이도 있었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모두 풀려났고 그 뒤 조직을 가다듬어 1949년에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가 꾸민 기소사유와 판결


본 건 조선어 학회는 대정(大正) 8년(1919년) 만세 소요 사건(萬歲騷擾事件)의 실례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 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 양상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꽃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에 그쳐서,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 6년(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 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 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 이념을 삼아 가지고, 겉으로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 배양 단체로서 본 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 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종 일관 진지하고 변하지 않은 그 활동은 조선 어문에 쏠리는 조선 인심의 기미(機微)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조선 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 관념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 향상, 민족 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伸張)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 한글 학회 50년사에서 따옴

 


2.5. 세계로, 미래로!

 한글학회는 100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어문정책과 국어학 연구, 사전편찬, 도서출판, 교육, 계몽 등 다양한 한글운동을 해 왔다. 국제활동에도 눈을 돌려 1971년부터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세계 언어학자들과 함께 한국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꾀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한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2000년부터는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위원회를 만들어 외국에서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인증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국외에서도 우리말이 바르게 보급되고 한국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원들을 초청하여 한국어를 바르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연수도 진행, 지금까지 70여 나라 500여 명이 한글학회의 국외 한국어 교원 연수를 마친 바 있다. 이들 역시 한글학회의 든든한 가족으로서 한국어의 교육 및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3. 한글만 쓰기를 위한 움직임과 그 열매

 한자를 버리지 못한 만큼 사회 전반의 발전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글자살이는 한자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는 버렸어야 했지만 이 나라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과거에 얽매어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글만 쓰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자교육을 강화하려는 등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글의 창제는 비로소 우리말이 제 치수에 맞는 옷을 입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과학적인 음운조직을 가진 한글은 우리말에 잘 맞는 글자인 까닭에 배우기도 쉽고 우리 민중이 나라의 정책을 쉽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은 물론,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 주시경 선생 같은 분들이 한자의 사용이 우리 문화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일찍이 깨닫고 <독립신문>(1896) 창간을 한글전용으로 했던 것이 우리 국민에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고취시켰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독립도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부터 우리 신문이 모두 한글 전용으로 발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생명과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빨리 더 많은 발전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몇 십 년 동안을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가 못내 아쉽다. 다행히 지금은 신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출판물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한자와의 싸움을 벌였는가? 아직도 그 잔뿌리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동안 한자혼용론자들의 주장에 맞서온 노력들을 살펴볼만하다.

3.1. 한글 전용 법률

 1948년에 최초로 공포된 대한민국헌법은 원래 한글로 적혔다고 한다. 이에 한글학회는 국회에 고마움의 뜻과 아울러 일반 공용문서를 한글로 쓰도록 하는 법률을 정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서와 한글전용 발표식을 한글날에 하도록 하는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내고 담화도 발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그 해 10월 1일 제78차 국회에서 한글전용법이 통과된 것이다.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



새 나라의 건설 대업이 바야흐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중대한 이 시기에 임하여, 우리의 할 일은 실로 백 가지나 천 가지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오, 또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곧 태산교악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자주 정신’을 앞세우고 나가는 일이다.

과거 약 천여 년 동안, 우리는 남의 문화의 종노릇을 하고, 남의 정신에 사로잡히어, 제 역사가 혁혁하건만 이를 덮어 두었고, 제 문화가 찬란하건만 이를 묻어 버렸었다. 이것이 인습이 되고 고질이 되어, 남의 버릇을 흉내 내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오히려 자랑으로 알게까지 됨에 이르러 버린다면, 실로
보람 있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만대의 자손에게 노예의 굴레를 전하여 주는
민족적 반역 대죄를 면할 길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과연 그렇게 마비되었을까? 아니다. 먼지에 쌓인 거울이오, 구름에 덮인 태양이다. 닦으면 반드시 밝아질 것이오, 구름을 헤치면 다시 명랑해질 것이다. 과연이다. 참으로 과연이다. 이번 국회에서 공포한 새 헌법의 원본을 한글로 기록한 것은 곧 우리 문화가 어엿함을 확인함이오, 우리 정신이 새로와짐을 증명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자주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한글헌법의 공포는 자주정신의 부흥을 뜻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문화와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과 공로는 오로지 이백의 국회의원의 민족적 자주정신에 말미암은 것이매,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다른 모든 국사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의정할 것을 믿고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광명한 앞날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며, 마음에 든든함을 가득히 느끼는 바이다.

앞으로, 일반 법문을 전부 한글로 제정하고, 모든 공용문서와 성명.지명도 단연 우리 글자로 사용하도록 시급히 법적으로 정할 것을 믿고 바라며, 특히 이 정신의 실현이 촉진, 완수되게 하기 위하여, 앞으로 문교행정을 담당할 부문에는 더욱 이 한글헌법 공포의 정신을 여실히 또 원만히 살리어 나가기에 확호한 신념과 역량이 구비한
인사가 전적으로 배치되어야 할 것을 또한 믿고 바란다.

이에, 우리 학회는 감히 과거 삼십 년 동안 오직 한 마음, 우리글과 우리말을 부둥켜안고 지키기에 온전히 바치어 온 붉은 피와 뜨거운 정성을 가지고, 이제 삼천만 형제자매로 더불어, 우리 민족 문화의 급속한 향상과 국가 만년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이 자주 정신의 실천궁행에 굳은 결의로써 일치 매진하도록 전력할 것을 선명하는 동시에, 또 감히 책임 당국에 대하여 이 거족적 행진 전도에 조금도 장애가 없도록,
길 인도를 잘 하여 주시기를 거듭 부탁하는 바이다.

1948년  7월  24일
조선어 학회



                      

 

 

3.2. 한글전용 촉진회 조직

 우리 겨레의 자주문화를 세워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글전용법이 1948년 10월 9일 한글날에 발표되었으나, 이의 실천을 위해 앞장서서 이끌어갈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9년 6월 12일에 ‘한글전용 촉진회’를 조직하였다.

 한글전용 촉진회는 본부를 한글학회 안에 두고, 각 도시에 지부를 두어, 한글만 쓰기의 실행을 대대적으로 철저히 촉진시켰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전주, 대구, 목포, 광주, 청주, 광주(경기), 김포,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국어교육 강습회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3.3. ‘한글전용 국민실천회’의 활동


 1968년 10월 2일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2개년으로 단축시키기고 이를 강력히 시행할 것을 선언(1968. 10. 7. 대통령)한 뒤 10월 25일에는 ‘한글전용 촉진 7개항’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문교부 안에 ‘한글전용 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의 한글전용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이 나오자, 한글 동지들은 국민들도 정부와 뜻을 같이하여 한글전용의 국민운동단체를 창립하기로 하고, 최현배 선생을 발기인으로 한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68년 12월 21일 한글 관련 26개 단체들도 발기단체로 참여함으로써 한글전용 촉진회까지 통합되고 지방에 지부까지 둔 전국규모의 범국민 운동단체로 태어나게 된다. 이 단체에서 하고자 했던 뜻과 활동이 오늘날 한글만 쓰기를 여는 중요한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글전용 국민실천회 3년의 활동 

1. 관공서 및 각 단체에서 직장 무료 강습 17회

2.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및 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입안 건의

3. 쓰기의 건의 35번

4. 바른 국어 생활과 바른 맞춤법 출장 무료 질의응답 157번

5. 편집 및 교정 무료 봉사 61건

6. 건설용어, 농업, 상업용어의 왜말 조사 6번

7. 간판 업소 심방 무료 지도 138번

8. 음식점 차림표 바로잡아주기 69번

9. 우리말로 이름 지어 주기(무료), 업소 15곳, 사람 153명

10. 라디오 교양방송 및 주선 35번

11. 잡지 투고 게재 교섭 247번

12. 국어 관계 편지로 궁금 풀이 93번

13. 대학 국어운동 학생회의 활동 지원

14. 쉬운 말과 바른 말 자료 채집 43,000 낱말

15. 각 부처에 한글전용을 위한 쉬운 말 용어 제정 촉구 6번

16. 한글 타자 전국 선수권 대회 개최 (1969. 10. 9.)

17.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관계 자료조사 제공 8건

18. 공화당 국회의원 총회 강연회 및 그 밖의 계몽 강연회 21번

19. 한글명함 무료로 선사하기 13,600장(136명에 100장씩)

20. 한글문패 달아주기 63,375장

21. 한글전용 정책 자료조사 발간 (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1집 1,000부 관계기관에 무료 제공)

22. 쉬운 말 쓰기와 각 부처의 용어 제정물 등에서의 채집(‘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2집’ 원고 자료 1,530여 건)

23. 각종 정기간행물에서 한글만 쓰기 관계자료 채집 카드 작성(2,000여 카드)

                     



 


 

한글 관련 단체의 역사 1 <끝>-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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