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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

한글의 반포와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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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의 창제와 반포
 
 한글의 반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한글의 창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한글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에 반포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443년 창제와 1446년 반포라는 설은 <세종실록>의 다음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世宗實錄> 25년(1443) 12월조 끝부분
(2)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
    <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 끝부분


 20세기 초의 학자들은 이 두 기록을 놓고서 고민에 빠졌다. 1443년 12월에 언문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1446년 9월에 다시 훈민정음(=언문=한글)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한글이 완성된 시기가 둘 중 어느 것인지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완성되기는 했으나, 이것을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어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1446년 9월에 최종완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추측을 보태어, 1443년 12월에는 한글이라는 문자를 정식으로 온 나라에 공표한 것은 아니나, 1446년 9월에는 한글을 온 나라에 반포(頒布)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오게 되었다.

 한글날을 정함에 있어서도, 위의 두 기록 중 후자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1443년 12월의 언문제작은 말하자면 일종의 베타버전인 셈이고, 1446년 9월에 정식으로 출시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두 기록 모두 정확한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냥 ‘이 달에(是月)’라고 하여서, 한글날을 정확히 며칠로 해야 할 지 난감하였다. 그래서 그냥 9월 그믐날인 9월 30일로 가정하고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2)의 기록은 훈민정음(=언문=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도 함)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세종은 1443년 12월 한글을 완성한 뒤, 신숙주, 성삼문 등의 신하들로 하여금 한글과 관련된 연구 및 여러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게 하였는데, <훈민정음>은 그러한 책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한글의 제자원리 및 사용방법을 해설한 책인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숙주 등의 신하들이 이 책의 원고를 작성하여 1446년 9월에 완성한 것이다.
 실록에서 예컨대 ‘東國正韻成’이라고 하면 <동국정운>이라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며, 이와 비슷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2)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의 완성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의 책의 완성을 말하는 기록인 것이다.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정식으로 출간된 시기는 아니다. 위의 (2)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원고, 즉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이것을 책으로 간행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주자소나 교서관 같은 출판 관련 기관에 원고를 보내면 거기서 이 원고로 활판을 짜거나 목판에 글자를 새겨야 하고 이것을 먹으로 찍어내고 제본하는 등등의 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책이 완성된다.
 완성된 책을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이 이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이것을 보통 반사 (頒賜)라고 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신하들에게 반사(=반포)한 것은 1446년 9월보다 최소한 몇 달 뒤의 일일 것이다. 원고가 완성되고 신하들에게 반사되기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일도 종종 있다. 요컨대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 반사 내지 반포된 시기도 아닌 것이다.

 위의 내용은 일찍이 1930년대에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김민수(金敏洙) 선생 같은 분은 위의 (2) 대신 (1)이 한글의 완성시기임이 분명하므로 한글날도 이에 따라 양력 1월(음력 12월 그믐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선생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잘못된 주장도 대중들에게 계속 유포되었다. 한글이 1443년 12월에 완성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텐데, <세종실록>을 비롯한 사료에서 한글 반포에 관한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중대한 일이, 그것도 공식적인 일이 사료에 누락되었을 리는 없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상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는 아래에서 논하겠다.

 오랫동안 실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이 194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그 책의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문의 날짜가 1446년 9월 상순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원고가 완성된 시기를 좀 더 좁혀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본래 (2)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글날을 음력 9월 그믐날로 잡았었는데, 이것을 20일 정도 앞으로 당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한글날을 10월 29일에서 10월 9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이 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된 날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의 원고가 완성된 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 한글 창제의 주체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세종이 임금으로서 여러 政務에 바빴을텐데 혼자서 한글 창제 업무를 담당했겠느냐? 집현전에 훌륭한 신하들이 많이 있었으니,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 한글 창제 업무는 집현전의 신하들이 하지 않았겠느냐’고 다시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즉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親制說보다는, 세종이 신하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協贊說 내지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로는 신하들이 만들었다는 命制說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글을 세종이 親制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1)이 그러하고,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의 정인지의 서문도 그러하다.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히 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려 주신 聖人으로서 제도와 施政 업적이 百王을 초월하시며, 정음을 만드신 것도 옛것을 본뜨지 않고 자연에서 이룬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인위적인 사사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다. (癸亥冬 我殿下 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 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訓民正音> 鄭麟趾 序 (1446년 9월 상순)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런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한글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작업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위의 (1), (2)의 실록 기사에서 ‘이 달에’라고만 하고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지 않은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실록에서 이렇게
날짜를 명기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세종이 어전에서 공개적으로 신하들에게 한글 관련 사업을 하도록 명을 내렸다면, 史官이 이것을 史草에 기록했을 것이고, 이것은 실록 편찬시에 사초의 정확한 날짜와 함께 수록되었을 것이다.

 위의 (1), (2) 기사에 날짜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그 사건이 공개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세종이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했던 것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이 완성된 이상 언제까지나 비밀로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자는 널리 사용하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세종 26) 2월 16일이다. 
 
(4)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과 진양대군 王柔, 안평대군 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을 임금께 여쭈어 결정하였다. (이 일에 대한) 상과 보상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命集賢殿校理崔恒 副校理朴彭年 副修撰申叔舟 李善老 李塏 敦寧府注簿姜希顔 等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東宮與晉陽大君王柔安平大君瑢 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 <世宗實錄> 26년(1444) 甲子 2월 16일 丙申條

 나중의 결과야 어찌 되었든, 위 (4)의 기사는 세종이 한글을 가지고서 공개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운회>(<古今韻會擧要>로 추정됨)라는 중국의 韻書(한자들을 발음별로 분류한 책)에 한글로 음을 표시하여 달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일에 집현전의 비교적 하급관리에 속하는 신하들을 동원한 것이 주목된다. 집현전의 관리들을 동원하고 싶으면,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집현전의 책임자와 상의하여 人選을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일을 급속하게 추진한 듯하다. 당시 집현전의 사실상의 책임자는 副提學인  崔萬理였다, 

 최만리로서는 자기를 제쳐놓고 새파랗게 젊은 직원들을 차출해 간 세종의 처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한글이란 걸 만들어서 뭔가 일을 추진하려 하는 세종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최만리의 등을 떠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 20일 그 유명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한글 창제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는데, 그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하여 일찍부터 드러내 놓고 한글 창제 사업을 진행했다면, 최만리 등이 이제 와서 반대하기 시작했을 리 없다. 세종이 혼자서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몰랐을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 아닌 까닭에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는 것은 이 때(1444년 2월)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대 상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 본 세종은 크게 진노하여서, 상소에 참여한 최만리 등 7명의 집현전 관리들을 불러다 호통을 친 뒤 의금부에 가두도록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석방했다). 세종이 상소에 참여한 관리들을 불러다 놓고 한 말을 보면 세종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세종의 반응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또 이두를 만든 본 뜻이 곧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便民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언문도 또한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薛聰은 옳게 여기면서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② 또 그대들이 韻書를 아느냐? 四聲과 七音을 알며 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③ 상소문에 말하기를 “하나의 새롭고 신기한 재주”라고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소일거리가 없어서 책을 벗삼고 있는 것이지,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④ 또 내가 늙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세자가 도맡아서 하고 있고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참여해서 결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언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위의 ②는 세종이 음운학에 대해 지닌 학문적 자부심을 잘 드러내 준다.
한글은 당시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음운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학자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할 만한 당시의 음운학자를 꼽자면 세종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세종은 그러한 언어학적 식견을 가지고서 한글을 만들었으며, 기득권에 젖어 있던 儒臣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올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글 창제 사업을 신하들 몰래 은밀히 추진하였다. 한글을 다 만들고 나서, 한글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집현전의 신숙주, 성삼문 등을 비롯한 젊은 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儒臣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세종은 강한 의지로 이것을 돌파한 것이다.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위의 내용은 사실 이기문(李基文) 선생이 오래 전에 소상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일반 대중과 학자들의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글의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친제설에 반하는 증거로 들곤 한다.

(5) 世宗께서 諺文廳을 설치하여 申叔舟, 成三問 등에게 命하여 諺文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字體는 梵字를 본받아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語音 가운데 文字(漢字)로 적을 수 없는 것도 모두 통하여 막힘이 없다. <洪武正韻>의 글자들 또한 모두 諺文으로 쓰고 드디어 五音을 나누어 분별하니, 이를 牙音, 舌音, 脣音, 齒音, 喉音이라 하는데, 순음에는 輕重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正反의 구별이 있고, 글자에 또한 全淸, 次淸, 全濁, 不淸不濁의 차이가 있다. 비록 무지한 아낙네라도 똑똑히 깨닫지 못함이 없을 정도이니, 聖人께서 物을 창조하시는 지혜는 凡人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世宗設諺文廳 命申高靈成三問等 製諺文 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二字 其字依梵字之 本國及諸國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 洪武正韻諸字 亦皆以諺文書之 遂分五音而別之 曰牙舌脣齒喉 脣音有輕重之殊 舌音有正反之別 字亦有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之差 雖無知婦人 無不瞭然曉之 聖人創物之智 有非凡力之所及也) 성현 <용재총화> 권7

 세종이 언문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을 시켜서 한글을 만들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다음의 기사들과 함께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①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친히 이름난 선비 8명을 뽑아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을 짓는 것을 맡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親簡名儒八員 掌製訓民正音東國正韻等書) 姜希孟
    「太虛亭墓誌文」
  ②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을 특별히 뽑아 해례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깨치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極簡一時名儒 著爲解例 使人易曉) 任元濬
    「保閑齋集序」
  ③ 임금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上以本國音韻 與華語
      雖殊 其牙 舌脣齒喉 淸濁 高下 未嘗不與中國同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母二十
      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姜希孟「文忠公行狀」
  ④ 세종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
      本國音韻 與華語雖殊 其五音淸濁高下 未嘗不與中國同 而列國皆有國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 
      母二十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李坡의 「申叔舟墓誌」
  ⑤ 세종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열어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諸國各製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字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擇文臣撰定) 李承召 「申叔舟碑銘」
  ⑥ 本朝 세종 28년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다. 임금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문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의
      방언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드디어 자모 28자를 만들어 언문이라 이름하였다.
      궐내에 局을 열어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이를 찬정하게 하였다. 대체로 古篆을
      본떴으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었고 글자가 비록 간이하나 전환이 무궁하여 여러 언어의 소리 중에서
      문자(漢字)로 능히 적을 수 없는 것까지 다 통하여 막힘이 없다. (本朝世宗二十八年 御製訓民正音 上以爲
      諸國各製文字 以記其國之方言 獨我國無之 遂製子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命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 撰定之 盖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字雖簡易 轉換無窮 諸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通無) <增補文獻備
      考> 권108 「樂考」訓民正音條


 ①은 崔恒의 文集인 <太虛亭集>에 수록되어 있고 ②~⑤는 申叔舟의 文集인 <保閒齋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6개의 글이 모두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世宗이 諺文 자모 28자를 창제한 후 禁中에 局을 설치하여 名儒(또는 文臣) 몇 명을 뽑아서 訓民正音 解例 등의 책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③~⑥에서는 ‘撰定’이라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인 책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撰定’이란 말이 책이나 詩文을 짓는다는 뜻이므로 <訓民正音>(해례본)과 같은 책을 만들게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지 訓民正音이란 문자를 만들게 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6)의 기록들에서 局을 설치했다고만 하고 구체적으로 局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이 局을 <齋叢話> 권7에서 언급한 諺文廳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문청은 世宗이 언문 자모들을 다 만든 뒤에야 설치되었으며, 그 주임무는 이 문자에 대한 해설서인 <訓民正音>(해례본) 등의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6)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해서 (5)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서로 모순 없이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5)에서 ‘製諺文’이라고 한 것을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만들게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5)에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빠졌지만 그 뒤의 내용은 (6)의 기사들과 일치하게 된다. ‘諺文’이라는 말이 문자로서의 한글이 아니라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의미하는 예는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7) (세종이) 만년에는 조정의 업무에 싫증이 나서 朝會에 나오지 않았으나 학문적인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극진히 생각하여 유신들에게 명하여 局을 나누어 여러 책을 차례로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언문>, <운서>, <국조오례의>, <사서오경음해>등이 동시에 찬수되었고 다 임금의 재가를 거쳐 책이 완성되었다. (晩年倦勤 不視朝 然於文學之事 尤所軫慮 命儒臣分局 撰次諸書 曰高麗史 曰治平要覽 曰兵要 曰諺文 曰韻書 曰五禮儀 曰四書五經音解 同時撰修 皆經睿裁成書) 徐居正 <筆苑雜記> 권1


3. 한글의 보급 과정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백성들이 국가에 문서를 제출할 때에도 한자를 이용하여 이두문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한글로 작성한 문서는 국가에서 문서로서의 효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강압에 못 이겨 왜국에 투항한 백성들에게 선조임금은 왜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것을 호소하는 교서를 한글로 써서 내렸다. 이것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계층이었을텐데, 아마도 자기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의 확대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며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을 찍어내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소설을 탐닉하는 이들이 많았다. 순정(純正)한 고문(古文)이 아니라 백화적(白話的)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소설, 통속소설들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정조임금에게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소설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으로의 가치가 있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간행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많은 방각본 한글소설들은, 당시에 소설이 널리 읽혔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도 크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많았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자생활사적 의의도 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의 문자 해득률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 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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