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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

한글 창제, 식자층의 반발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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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 창제 반대의 이유

 세종 25년 1443년 12월 한글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기뻐서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은 실제로 거의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술원 부원장에 해당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선두로 그 학사 일당 7명이 한글 창제 후 두 달째인 세종 26년 1444년 2월 대왕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문을 직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장하기를, 만약 쉬운 한글이 시행되면 어려운 한문은 학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문 제 3항을 보면 ‘쉬운 한글만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하게 된다면 왜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구하겠나이까?’ 하는 반론이 그 핵심이었다.1)

 그들은 또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선진국 중국과 같은 수준인데, 그 학문을 버린다면 스스로 야만인이 돼 문명의 큰 누가 아니겠느냐?’며 반론을 펴기도 했다.2) 그렇다면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눈에 나라를 쇠망으로 이끌려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리학은 춘추시대의 학자 공자(孔子, 552~479 B.C.)의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을 말하는 것으로 유학 중에서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우리 조선시대로서는 이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추구했던 유일의 선진 학문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그 절대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한문을 어렵다고 익히지 않는다면 후진국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굳이 강행하는 한글 창제를 보고 당시 식자층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더욱이 당대의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는 최만리로서는 그 선봉에 있는 것이 충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그들을 썩은 선비라고 비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世宗과 같은 가장 偉大한 明君이 出現한 한편에는, 이 崔萬理 따위와 같은 固陋하고 腐敗한 低能兒도 出現되었던 것입니다. 『慕華丸』에 中毒된 『假明人』의 醜態요 發狂이라고 보아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마는, 歷史上에 永久히 씻어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지』3)를 끼치어놓게 됨은, 그를 爲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읍니다. 그러하나 그와 같은 病症은 이제도 오히려 遺傳됨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金允經, 「朝鮮文字와 文字史」,1938, 86면)

이는 事大慕華의 精神에 위반하여…頑强히 이를 반대한 몇몇 漢化主義에 中毒된 臣下들이 있었으니, 그는 곧 副提學 崔萬理를 先鋒으로 하여,…따위이었다. 世宗大王은 이 事理를 모르는 愚頑한 反對를 抑制하기 爲하여, 이 反對者들을 모두 義禁府에 내리사…. (최현배, 「한글의 바른 길」, 1937, 4면)


 반대로 어려운 한문을 배우지 않고도 선진 학문의 추구가 쉬운 한글만으로 족하다고 했다면, 아첨을 일삼는 썩은 문신이었을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 선진 외국들의 언어를 어려워도 기피하지 않고 반드시 힘써 배워야 하는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2. 한글의 위상에 대한 오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대왕은 이 반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던가?
 첫째, 세종은 본인 역시 같은 지식층으로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과 같은 생각에 대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한글 창제에 대한 오해를 염려하고 처음부터 비밀리에 사업을 결행하였을 것이다.

 세종의 의식이 얼마나 사대숭한(事大崇漢)으로 무장되어 있었는지는 당시 기록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다. ‘사대는 당연히 정성으로 하라’(세종 8년) ‘유교 경서를 연구하라’(세종 15년) ‘모든 학문의 길은 경학이 근본’(세종 18년) ‘양국의 동맹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는 것이므로 정답게 지극히 하라’(세종 13년) 등을 명했던 것이다.4)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당시 식자층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 항(崔恒, 1409~1474)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세종 16년 1434년에 그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자, 세종이 첫째로 발탁해 집현전 부수찬(副修撰)과 궁중의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으로 등용하고, 임금 가까이서 한글 창제를 담당케 했다.5)신숙주의 「保閒齋集」任元濬序에도 ‘世宗創製諺文, 開局禁中, 親揀名儒.’라 하고 그 사실을 천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야담으로 미화된 점인데, 약 2백 년이나 흐른 뒤인 1621년 「어우야담」중 ‘황룡 현몽과 세종 16년 알성장원’이라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1434년 세종대왕이 인재를 뽑기 위해 알성시를 공포한 뒤 시험 전날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낮잠 중에 과장인 성균관 대성전 서편 잣나무에 큰 황룡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놀라 내관을 보내 보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항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응시자는 이 장원백(壯元栢)에서 낮잠 자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柳夢寅, 「於于野談」권 2)

 유몽인(1559~1623)에 의하여 서술된 이 설화에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의 뜻을 받들어 한글 창제를 주관하고 완성한다는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한글 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태허정(太虛亭) 최항의 세종 16년 알성급제를 이렇게 설화화한 것은 그만큼 성스러운 대역사를 완수해야 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둘째, 한글 창제는 한문을 대신할 국자(國字)의 창제가 아니라, 표기수단이 없는 하류 서민층에게 쉬운 문자를 새로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의 글자는 상류층의 한문, 중류층의 이두문에 이어 하류층을 위한 한글이 추가된 3중 체계로 변화되었다. 10년에 걸친 대역사를 세종 25년 1443년 12월에 완성하면서, 세종은 「訓民正音例義」어제(御題) 서언에서 우민 즉 무식한 서민층에게 쉽게 익혀 일상생활의 기록을 위한 문자로 편하게 사용하라고 공표했다. 이는 애초부터 지식층의 반발을 전제하고 한글의 사용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한 것이었다.6)

 그런데 이렇게 미리 그 대상을 밝혔음에도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일파가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그들을 불러 한두 가지 질문을 하고 이튿날 석방했다.7)

 필경 세종은 저들의 문물 후진화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간취하고 벌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은 이후 재발하지 않았다. 당시 청백리로 알려져 있던 최만리를 필두로 한 그들의 반대는 충심에서 비롯된 염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군신이 같은 지식인으로서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세종의 신문자 행용 정책은 강행되었고, 한자음 표준화를 위한 문서 번역과 신문자 보급을 위한 해설서 편찬, 서민들에게도 읽히기 위한 악장(樂章) 「용비어천가」창작 등으로 급물살을 탔다.

 이렇게 해서 인공문자 한글의 창제가 거둔 성공은 세종 27년 1445년 「용비어천가」 가사 번역, 1447년 「석보상절」서술과 「월인천강지곡」창작 등으로 확인된다. 그 성공의 비결은 표기할 대상어에 대한 정확한 음운 분석, 음운 식별이 완전히 가능한 자소(字素)의 완비였다. 이 성공은 당시 언어학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명시해주는 실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오늘날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해 국자 창제와 한글 전용 혹은 민족자주정신과 한자 폐지 등으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그렇게 위조하지 않고도 그의 독창적인 창조성과 진취성에 대해서만 천명해도 충분할 터인데, 오늘날의 시류에 맞추어 과하게 해석하는 것은 자칫 교훈은커녕 반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3.우리말의 역사상 한글이 갖는 한계

 역사상 문자로서는 당초에 한자만 쓰였다. 당시 한자는 우리말에 적용한 차자표기의 개발로 한문 원래의 한자와 이두, 향찰 등의 차용 한자로 용법상 양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2중체계는 15세기에 이르러 한글이 추가됨으로써 3중체계로 복잡해져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다가 다시 2중체계로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면서 한글이 비로소 격상되지만, 그것은 순국문에 한문 번역,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병기하는 것이었지 독립적인 순국문은 아니었다.8)

 순국문이 아닐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해독상의 의미 불명, 오독 때문이었다. 기록을 보면 한글 전용을 선도했던 주시경(1876~1914)조차 ‘한문 아는 사람도 한글로만 쓴 글은 10중 7~8은 모르니, 차라리 한자로나 쓰면 한문 아는 사람이나 시원히 뜻을 알 것이라’고 동음어 문제를 지탄한 바 있다.9)

  1945년 광복 후 팽배해온 ‘한글전용주의’에 대한 반론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7할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들을 순한글로 표기는 할 수 있어도 동음이의어가 많은 까닭에 그 내용의 판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력상의 어려움 때문에라도 오늘날 많은 한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한글전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世宗實錄」권 103, 20 뒤)
2) 文物禮樂, 比擬中華, 分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之香, 而取螳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世宗實錄」권 103, 20 전)
3)『페지』는 영어 ‘page’를 당대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중 도서명이 아님에도 『』표기로 처리한 것들은 원저의 표기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4)上曰, 惡是何言也. 事大當以誠, 皇帝已知産於吾國, 不可誣也. (「世宗實錄」권 33, 19 후)
必欲精熟貫穿 , 莫如專經之學. (「世宗實錄」권 59, 13 후)
上, 命集賢殿副校理李季旬. 金汶等曰, 凡學之道, 經學爲本. 固所當先. 然只治經學. 所不通乎史 則其學未博. 欲治史學. (「世宗實錄」권 74, 10전)
中國與本朝, 合爲一家, 情親至矣. (「世宗實錄」권 53, 4 후)
5) 宣德甲寅, 英陵臨策士, 擢公第一, 授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 合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 「訓民正音」, 「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正. 雖規模措置皆稟睿旨, 而公之協亦多. (崔 恒, 「太虛亭文集」권1), (徐居正, 崔文靖公碑銘 幷序 1~2장)
6)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 ( 「世宗實錄」권 102, 42전)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絡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 憫然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世宗實錄」권 103, 36 후)
7) 上覽疏, 謂萬里等曰, …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題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世宗實錄」권 103, 21 후)
8) 勅令 第一,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 自本日止. … 公文式第十四條 法律 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高宗實錄」권 32, 64 전~65 전) 一般解釋上에 疑誤할 慮가 有할뿐더러 規式에 違反되겠삽기 左開條件을 設定 施行할 事로 閣議에 決定하야 內閣總理大臣이 各部에 照會를 發홈. 一, 各官廳의 公文書類난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하고, 純國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함을 不得홈. 一, 外國官廳으로 接受한 公文에 하야만 原本으로 正式處辨을 經하되, 譯本을 添附하야 케 홈. (「官報」3990호, 1908년 2월 6일, 官廳事項)
9) 山 산이라 하던지 江 강이라 할 것 같하면 이런 말들은 다 한문 글자의 음이나 또한 조선 말이니 이런 말들은 다 쓰난 것이 무방할뿐더러 맛당하려니와 만일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이 한문의 음으로 써서 노은 글자의 뜻을 몰을 것 갓하면 단지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만 아지 못할뿐이 아니라(미완, 쥬상호씨, 국문론, 「독립신문」2권 114호, 1897년 9월 25일) 한문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문의 음만 취하야 써서 노은 고로 흔히 열 자면은 일곱이나 여덟은 몰으나니 차라리 한문 글자로나 쓸 것 갓하면 한문을 아난 사람들이나 시원이 뜻을 알것이라 그러나 한문을 몰으난 사람에게는 엇지하리요 이런즉 불가불 한문 글자의 음이 조선말이 되지 안한 것은 쓰지 말아야 올을 것이요…(쥬상호 씨, 국문론, 전호 연속, 115호, 1897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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