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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

1700년대 이후의 '한글 본문용 활자체 구조'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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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거의 모든 활자 매체에서 본문용으로 쓰이고 있는 한글 활자체는 한글 명조체라 불리던 활자체다. 그런데 정작 이 활자체의 성격은 한자 명조체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왕조인 명조라는 이름 자체가 한글의 대표적 활자체 이름으로는 마땅치 않으므로, 문화체육부에 의해 '바탕체'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이 바탕체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쓰여져 사람들에게 본문용 활자체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오고 있다.




 바탕체는 본문용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어느 특정 활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한글 명조체라 불리던 활자체의 줄기 성격이나 닿홀소리 글자의 윤곽, 비례 등이 비슷한 활자체 모두를 뭉뚱그리는 활자체 이름이다. 따라서 같은 바탕체에 속하면서도 성격이 여러 가지로 조금씩 다른 활자체들이 많이 있다. 곧, 한 시기 안에서도 활자체를 설계한 사람이나 활자 제작사에 따라 혹은 같은 설계자라도 처음에 설정한 활자체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바탕체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하물며 시기를 넘어서서는 근본적으로 활자체의 성격이 많이 달라지게 되어 시대에 따른 다양한 성격의 바탕체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본문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바탕체의 형태구조가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변천과정을, 특히 170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글자 원리에 충실했던 기호적 구조의 한글 활자체가 약 250년이 지난 1700년대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필기도구인 붓의 성격, 필기의 자연스러운 손글씨 흐름과 활자의 균정(均整)함이 조화를 이루는 활자체로 완성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797년(정조 21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에 쓰였던 오륜행실도 활자체(그림1)다.

  물론 이 활자체 이전의 붓글씨나 목판 글자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글자체가 있었으나, 활자체로서 균정감과 통일감 및 조화감이 이처럼
 완성도 높게표현된 활자체는 이전 자료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 활자체야말로 오늘날 바탕체의 진정한 원조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본문용 활자체의 구조 변천을 살피기 위해 특히 1700년대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후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한 것은, 오늘날 대표적인 
  본문용 활자체가 바탕체며, 이 바탕체의 직계 원조라 할 수 있는 활자체가
 위에서 살쳐본 바와 같이 1700년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700년대 이전의 약 250년 동안 한글 활자체 변천의 직접적인 원인은
 손글씨의 영향이며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영향은 한글 붓글씨의 양식화
 였다. 훈민정음 창제기에 발표된 글자꼴은 붓글씨로는 표현이 어려운
 기하학적 성격이어서 이후 대략 150여 년 동안 한글 글자꼴의 붓글씨체는 일정한 양식이 정립되지 않았고, 목판글자체나 활자체도 부분적인 붓글씨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한글 붓글씨의 양식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특히 목판글자체에 그 영향이 나타나면서 한층 균형잡힌 글자꼴을 보이고 있다.
 한글 붓글씨 양식화의 결과는 ‘궁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한글 붓글씨의 전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에는 정체와 흘림, 반흘림 등의 양식 아래 글씨를 쓰는 이 나름의 다양한 개성들이 표현되고 있다.

 1600년대 말의 한글 활자체는 이미 정립된 한글 붓글씨체의 강한 영향으로 공간 균형이 잘 이루어진 글자꼴을 보여주고 있으나 활자체의 전체 성격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1700년대에 와서 한글 활자체에 큰 변화를 주게 되는 요인이 생겼는데 그것은 한자 활자 명조체의 출현이었다.  이는 중국(明)에서 수입한 명판본(明版本)들 (그림2,3)을 글자본으로 새겨 주조한 한자 활자체를 시작으로 이후 이른바 생생한 나무활자, 정리자(整理字) 놋쇠활자(그림4) 등의 한자 활자체로서, 이제까지의 한자 붓글씨체 해서체(楷書體) 활자체와 달리 이글은 인쇄 전용 활자체였다.

   

 이 활자체는 수직 수평의 직선 균형과 굵은 세로줄기와 가는 가로줄기의 대비, 세모꼴의 기하학적인 돌기 등 인위적인 구조의 글자꼴로서, 이제까지의 부드럽고 유기적인 성격의 붓글씨와는 크게 달랐다.

  이러한 인쇄 전용 한자활자체의 출현은 함께 쓰이는 한글 활자체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한자 활자 명조체와 함께 쓰이는 한글 활자체에서 한자 활자체의 성격을 한글에 적용하는 데에는 대체로 세 가지 방향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이제까지의 한글 활자체에서 줄기의 성격을 조정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 적용으로 가로 세로줄기에서 붓글씨 흔적인 돌기들을 생략하고 기울기를 좀 더 펴서 수직 수평에 가깝게 하는 것으로, 한자 활자체 영향이 가장 약한 방향이었다.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한자 활자체의 성격을 적용하여 굵은 세로줄기와 가는 세로줄기를 대비, 수직 수평의 직선 균형, 가로줄기의 오른쪽 끝과 세로줄기의 머리에 세모꼴의 돌기 들임 등, 손글씨 성격과는 다른 인쇄 전용 활자체로서의 인위적인 구조를 이룬 방향이었다.
 세 번째는 한자 활자체의 인위적인 균정법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균정함으로 대체하여 완성도 높은  한글 붓글씨체 성격으로 발전시킨 창의적 적용의 방향으로, 바탕체의 원조로 평가되는 ‘오륜행실도 활자체’가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오륜행실도 활자체의 구조는 굵은 붓글씨의 성격이 강조되면서도 성격의 통일성과 균정함이 함께 조화되고 있는 점에서, 그때까의 한글 활자체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는 한편으로, 이미 정착된 한글 붓글씨체 양식이 활자체로서 적용되는 하나의 훌륭한 표준을 제시한 것이다. 오륜행실도 활자체 이후 비로소 시작된 한글 활자 바탕체 성격의 흐름은 한글 활자체 성격의 주된 흐름이 되어 오늘날의 본문용 활자체에 이르고 있다.

 바탕체의 큰 흐름 속에서 많은 활자체들이 등장하지만 그 구조와 성격과 의미는 활자체마다 다르다. 특히 활자체의 구조는 활자를 만드는 제작방법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동안 활자 제작 방법은 전통적인 옛 활자의 주조방법에서 일본에서 수입한 전태식 새 활자 주조방법, 그리고 벤튼자모조각기에 의한 주조방법과 이후 사진식자 및 오늘날의 디지털 폰트에 이르기까지 변천에 변천을 거듭해왔다.
 바탕체의 흐름이 시작된 것은 옛 활자에서 새 활자 주조방법으로 바뀌기 바로 전인 1700년대 말로, 옛 활자에 속하는 바탕체로는 1800년대에 다시 주조한 한자 활자체 정리자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체가 있는데, 이는 오륜행실도 활자체보다 균정감이 떨어지고 붓글씨 성격이 더욱 뚜렷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곧이어 1800년대 말의 새 활자 시대로 접어들면서 바탕체는 큰 변화를 겪는다.

 옛 활자 시대에 주로 활자를 주조한 곳은 관(官)이었으며 이때의 활자체 구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원리적 형태의 보존이었다. 동일한 시기의 붓글씨체나 목판글자체 글자꼴이 한층 더 쓰기 쉬운 모양으로 변했다 해도 관에서 주조한 활자체는 바른 표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잘 비교할 수 있는 사례가 새 활자 시대 초기의 활자체들이다. 주로 한글 새 활자의 주조를 맡은 곳은 일본 쯔쿠지(秉地) 활판제조소였는데, 1860년에 최초로 주조된 새 활자 최지혁 글자본의 최지혁체(그림5,6)는 민간의 의뢰에 따라 만들어진 바탕체로서, 1886년에 관립 인쇄국인 박문국의 의뢰에 따라 주조된 한성주보 활자체(이후 ‘한성체’로 약칭함, 그림7)와는 그 구조에서 큰 차이가 있다.
 민간에 의해 만들어진 최지혁체는 활달한 붓글씨의 성격이 강한 대신 균정감이 떨어지고 닿소리 글자꼴도 손글씨에 따른 단순한 모양으로 이루어 졌으나, 관에 의해 만들어진 한성체는 균정감이 높고 붓글씨의 성격이 강하면서도 닿소리 글자꼴에는 원칙적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새 활자의 측정 단위로는 포인트와 일본 호수(號數) 방식을 함께 썼는데, 최지혁체는 5호 작은 활자에서 2호 중간 활자, 1호 큰 활자(그림8)가 만들어졌으며, 한성체는 비교적 작은 4호 활자로 만들어졌다.
 

  옛 활자인 오륜행실도 활자체의 크기는 새 활자의 1호 크기와 비슷하며, 결국 옛 활자에서 새 활자로 바뀌면서 획의 본문용 활자 크기가 작게 조정되었고, 그만큼 책의 크기는 작아지면서 본문 활자 수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일본의 활판 제조소는 최지혁체 활자 1호, 2호, 5호를 갖추었고 1882년에 민간 선교단체에 의해 의뢰되어 주조된 성서활자체인 3호 활자 성서체(그림9)와 4호 활자 한성체를 한글 활자의 패밀리로 갖추어 놓고 1900년대 초의 대부분의 새 활자 인쇄물에 이를 활용했다.




 



  이 가운데 비록 성격의 차이는 있으나 동일한 바탕체에 속한 최지혁체와 한성체는 자주 한 인쇄물 속에서 본문용과 제목용으로 나뉘어 활용되었다.
  1910년대에는 한성체와 비슷한 구조의 더 작은 5호와 6호 활자체(그림10)가 등장하여 작은 본문에 활용되고 있지만, 활자가 작아질수록 활자체의 균형은 그만큼 좋지 않았다. 1915년에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 사용된 1호 활자 교과서용 바탕체는 줄기들이 비교적 단정하고 균정한 성격이었으며, 닿소리 글자꼴은 원리적 형태이나 균형감은 오히려 더 작은 4호 활자 한성체보다 떨어지고 있다.

 1920년대에는 9, 8포인트의 작은 한글 활자체들이「조선일보」「동아일보」창간을 계기로 한글 신문들의 본문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일제에의해 한글활자 매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1942년까지의 20여년동안 신문 활자는 한글 바탕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문 본문용 활자의 개량을 위해 수 차에 걸쳐 활자체를 바꾸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활자체들은 <그림 11>에 보이는 것처럼 다른 여러 출판물들에도 자주 활용되었다.
  <그림 12>처럼 1920년대 초에 신문의 본문용 활자체로는 닿소리 글자를 크게 하고 조금 납작한 비례의 바탕체가 활용되다가 다시 붓글씨 균형이 뚜렷한 정체 비례의 바탕체로 교체되었고 또다시 환원되기도 하는 등 많은 시행착오들이 나타났다.

 
  1930년대부터는 차츰 각 신문사 나름의 본문용 활자체가 정리되었는데 「동아일보」는 국내 최초로 신문 본문용 활자체를 응모하여 이원모의 활자체(그림 13)를 채택하고 이를 1933년부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원모체는 바탕체가 아닌 한자 명조체의 성격을 그대로 한글에 적용한 활자체로서 위에서 살펴본 1700년대 한자 활자 명조체의 성격을 적용한 두 번째 방향의 활자체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본문용 활자체로 바탕체를 계속 개량하여 글자가 더 커 보이도록 닿소리 글자꼴을 크게 구성한 활자체를 활용하였다.

 1939년에는「조선일보」본문용 활자들(그림 14) 중 조금 큰 발문에 박경서의 4호, 5호 활자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그 가지런한 균정감과 균형감 그리고 완성도에서 이제까지의 활자들에 비해 뛰어나게 돋보이는 활자체였다.


  내려쓰기 본문에서 박경서체는 처음으로 활자의 기둥을 맞추도록 조각되었으며 마치 원도에 의해 설계된 것처럼 놀라운 통일성과 균형감을 갖추고 있었다.  새 활자는 제 크기의 씨앗글자(種字)를 먼저 나무에 뒤집어 새겨서 이를 구리로 도금한 뒤, 여기에 납을 부어 활자를 주조하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작은 씨앗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일은 그만큼 어려워지며, 그 결과 활자체의 균형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활자조각가 박경서의 활자체는 <그림 15>의 4호, <그림 16>의 5호의 작은 활자에서 이 같은 놀라운 균형을 이루어, 한성체 이후 새 활자 최후의 높은 완성도를 이루어냈다.

 한성체가 닿소리 글자꼴의 원형을 고수한 것에 반해, 박경서체는 당시의 상황에서 한층 더 보편적인 바탕체 성격을 만들어내기 위해 글자 하나 하나에 조화되는 균형과 닿소리 글자꼴들을 재해석하여 적용해갔다.

  1954년에 국내 최초로 벤튼자모조각기와 사진식자기가 도입되기 시작하자 활자제작의 경우, 작은 씨앗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조각기술 대신 활자체 원도의 설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제작과 설계가 분리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설계된 원도를 가지고 활자 크기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는 원도활자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림 17>은 초기의 원도활자인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원도활자 시대 초기에 주조활자나 사진식자의 원도 설계에는 최정호, 신문 본문용 활자 원도설계에는 최정순 등의 많은 이들이 활동하였다. 이들이 원도 설계에서 표본을 삼은 활자체 구조는 박경서체였다. 최정호의 경험담에서 확인되는 바, 그들은 박경서체를 확대하여 구조 분석을 해가며 원도 설계에 고심하였다. 

 이들의 역작 가운데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본문용 활자체는 최정호에 의한 바탕체 패밀리인 '최정호체'다. 최정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 나름의 균형과 완성도 높은 바탕체인 ‘최정호체’를 설계해냈다.  물론 박경서체를 밑그림으로 했지만, 여기에 시대가 요구하는 조형감과 원도 설계의 필요조건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박경서체를 재해석하고 다시 한 차원 높인 바탕체를 창작해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감각의 총체적 결과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가장 자랑스러운 본문용 바탕체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디지털 폰트 시대에 최정호체는 많은 폰트들의 밑그림으로 단지 복제되어가고 있기만 하다. 한글을 사랑하며 특별히 한글 활자체를 다루는 전문가들에게는 최정호체 다음의 한 차원 높아진 바탕체가 기다려지고 있다.

시대의 감각을 선도할 수 있도록 묵묵히 노력하는
제2의 박경서, 최정호를 기다리며...


* 이 글은 고 김진평 교수가 「정.글.」창간호에 기고했던 글을 전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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