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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8. 09:27



 사투리를 흔히 지방의 시골마을에서 노인들이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투리에 대한 매우 좁은 생각이다.
 필자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즉 생활어가 바로 사투리라고 말하고 싶다. 표준어란 언어정책적 관점에서 생활어 중 지역 간의 차이를 없앤, 추상화되고 단일화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어의 속살을 풍부하게 담아내지 못하며, 표준어만으로는 우리의 정서를 살뜰하고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어느 지역에서나 누구나 편하고 쉽게 쓰는 생활어가 사투리인 것이다.
                              


                                




 사투리는 우리 한국어의 문화와 역사,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 있는 보물창고다. 따라서 표준어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사투리를 무시하면 다양하고 풍부한 생활 속의 한국어를 모두 죽이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표준어를 중시하는 국어정책을 펴는 나라도 드물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런 정책 때문에 표준어가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는 의식이 뇌리에 박히게 되어 사투리를 홀대하는 국민의식이 팽배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말이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이다. 과도하게 강조된 표준어 의식과 표준어 교육 때문에 스스로 우리말의 풍부한 자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육과 방송과 같은 대중매체의 보급 등이 어우러지면서 지방 고유의 사투리는 급속도로 위축되어 버렸다. 특히 제주도 사투리는 소멸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지금의 노년층이 떠나면 제주도 사투리는 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은 제주도 사람들과 제주도의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꼭 제주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방언도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필자가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를 간행한 것은 이러한 사투리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을 찾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투리의 가치와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사투리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본인이 쓰는 말이 바로 사투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경상도 성주고을의 연산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그곳의 사투리를 그대로 배웠던 터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쓰는 말에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여러 번 들었던 ‘말뜩다’라는 말이 세종대왕 시절의 『석보상절』에  ‘’로 나오고, 이것이 현대어에서 ‘마뜩치 않다’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느낀 경이로움은 실로 큰 것이었다.
 또 동네 할아버지 입에서 튀어나오던 ‘그르매’(그림자)는 현재까지 조사된 어느 방언사전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낱말로, 『두시언해』초간본에서만 잠시 보일 뿐이다.이런 희귀어가 방언 속에 살아있음을 발견하면서 방언연구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주변의 지인이나 혹은 모르는 사람이 전화로 사투리에 대해 묻기도 한다.
 가령 “포항에서 쓰는 ‘오졸없다’(혹은 ‘오질없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입니가?”, “대구 사람들은 ‘계추’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이게 어디서 온 말입니까?” 등의 질문에 대해 답하고 풀이하다 보면 사투리가 지닌 깊은 역사성과 그 가치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사투리가 아닌데도 사투리로 잘못 알려진 낱말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부산 사람들의 성격은 아싸리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싸리’가 경상도 사투리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아싸리’를 표제어로 싣고, ‘차라리’의 비속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옛 한글 문헌 어디에도 ‘아싸리’와 연결될 만한 말이 없다. 이것은 일본어인 あっさり를 차용한 낱말임이 확실하다.

 필자가 사투리 연구를 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였다. 금릉군 (현재의 김천시) 감천면의 농촌 마을에서 어느 할배와 할매의 말을 조사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학생들과 여름방학 때 현장조사를 하거나 방언학 수업의 일부로 현지조사 실습을 하는 방법 등을 통해 방언자료를 모으곤 했다. 

 또한 사투리를 반영한 옛 문헌도 적지 않게 찾아보았다. 예컨대 18세기 때 유의양이라는 분이 남해로 귀양 가서 지은 『남해문견록』에는 당시 남해 방언어휘들이 실려 있다. 16세기 후기에 영주 희방사에서 간행한 『칠대만법』에는 ‘가시나’(딸아이), ‘통시’ (변소)와 같은 방언형이 실려 있다. 18세기 초기에 예천의 용문사에서 간행한 『염불보권문』에는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쓴 발음형도 많이 표기되어 있다. 이런 문헌은 사투리는 물론 우리말의 역사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는 지금의 일상생활에서 듣는 사투리들이다. 주변에 계신 어르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흥미로운 표현을 들으면 적바림해 두곤 하였다. 주변의 친지들이나 어르신의 말씀들이 모두 공부의 대상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미 간행된 방언사전들과 ‘21세기 세종계획’ 사업의 결과로 나온 ‘한민족언어정보화 통합검색 프로그램’이 사투리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특히 ‘한민족언어정보화 통합검색 프로그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국의 방언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사실 국어학자들이 사투리를 연구한 학술서적은 적지 않게 간행되어 왔다. 방언사전도 각 지역 별로 나와 있고, 방언의 말소리, 어휘, 문법 등을 깊이 있게 연구한 학술 논저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가 알거나 쓰고 있는 사투리 속의 특이한 낱말들이다. 가령 타 지역에서는 안 쓰이는 특이한 낱말들이 왜 자기네 사투리에 있는지, 그런 낱말의 유래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한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는 그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자 만든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경상도 사투리에서 쓰이는 특이한 낱말과 표현을 중심으로 그 어원과 용법 그리고 역사적 연원을 풀이한 책이다.
 각각의 낱말들이 쓰이는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쓰이는 살아 있는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고 문장을 다듬었다. 아울러 지역주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 낱말들이 가지는 정서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쉬운 문장으로 된 짤막한 글을 기본으로 하고 내용과 연관된 사진을 넣음으로써 독자에게 친숙히 다가가고자 했다. 개별 낱말을 차례대로 설명하기는 했으나, 구성이 자유로워 아무 쪽이나 펼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그 중 책 끝머리에 있는 ‘왜 사투리가 뜨는가’는 일종의 언어 시평(時評)의 관점에서 사투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분석한 글이다.
 우리말을 연구한 학술서는 많지만 대중 교양서는 적은 우리의 현실에서 이 책은 나름대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준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털어내고, 사투리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BlogIcon 실비단안개 | 2009.02.18 10:4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경상도 시골에 사는데, 경상도도 지역에 따라 사투리가 다르지요.
시집에 처음 갔을 때, 어머니께서 "아가, 오가리 가꼬 온나"하시더군요.
오가리?
오가리는 작은 솥(냄비가 아닌)이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사투리를 자연스레 쓰지만, 그래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세련되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09.02.18 10:51 신고 | PERMALINK | EDIT/DEL
실비단안개님 좋은글 감사합니다ㅎㅎ
저도 사투리를 보면 할머니도 생각나고
정겨워요 ^ ^
BlogIcon jez | 2009.02.18 13:38 | PERMALINK | EDIT/DEL | REPLY
트랙백 감사합니다. ^^ 이렇게 재밌고 좋은 글이 많이 있었군요!
자주자주 오게될 것 같습니다 ^^
BlogIcon 온한글 | 2009.02.18 17:15 신고 | PERMALINK | EDIT/DEL
jez님 반갑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ㅎㅎ
저도 자주 놀러갈께요 ^ ^
BlogIcon fallmorning | 2009.03.21 08:09 | PERMALINK | EDIT/DEL | REPLY
http://blog.naver.com/fallmorning/60064381142

혹시 ↑ 이게 사투리인지 아닌지 좀 봐주세요^^
BlogIcon 온한글 | 2009.03.23 20:18 신고 | PERMALINK | EDIT/DEL
ㅎㅎㅎ fallmorning님.
블로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
황재룡 | 2013.01.11 21: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온한글님~!

사투리는 우리 문화의 보물창고라는 말에 공감하며 글 내용 모두에 대해 공감합니다.

사투리도 한국어입니다. 그런데 사투리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투리는 사투리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투리를 현대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보존을 해야 하는데 그 소리를 한글로 표기를 못 하다니?

그래서 “한글확장”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글확장연구회”라는 모임이 생겼습니다. 저는 “한글확장연구회” 총무입니다. 저희는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방언, 그리고 다른 지역 사투리 까지 완벽하게 현대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보고 훈민정음이나 옛한글을 이용하거나 무슨 방법을 써서 방언을 제대로 다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를 정부에 청원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황재룡 드림
(010-5381-3536 newysh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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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7. 13:09


 지구상에는 수천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수가 정확하지 않아서 적게는 3000개, 많게는 60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유는 정밀한 조사의 부족도 있지만 언어의 구별 기준, 혹은 방언과 언어의 구별 기준이 모호한 데에 있다.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수가 이렇게 많지만, 이 많은 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적다.
 역사적으로 흘러간 과거에 존재하였던 문자를 포함한 총수는 대략 400여 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의 수는 30~4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언어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사용하는 말소리는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된다. 한국말의 소리는 귀에 들리는 청각적 존재이고, 이것을 시각적 존재인 문자로 나타내 주는 것이 ‘한글’이다. 우리의 문화적 긍지이면서,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에서 그 위력을 더욱 크게 발휘하고 있는 한글.
 우리에게 친숙한 이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당시부터 쓰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인 이 낱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 시작은 물론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정음(正音)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우리 문자를 전체적으로 지칭한 표현은 ‘訓民正音’과 ‘正音’이다. 후자는 ‘正音二十八字’(제자해)라고 구체화되어 표현되기도 했다.「훈민정음」에 나타난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를 모두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1)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
㉠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正音 스물여덟 글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와 뜻을 들어 보이시니 이름 지어 가로되 訓民正音이라 하셨다. (정인지 해례서문)
㉡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정음을 지으심에 先人의 서술에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함의 이치로 이룬 것이 다. (정인지 해례 서문) 
㉢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이제 正音을 지은 것은 애초부터 슬기로써 도모하고 힘써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聲音에 기인되어 있는 이치를 지극히 한 것이다. (제자해)
㉣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初聲凡十七字 (····云云····).
  정음 28자는 각각 그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초성은 17자이니···· (제자해)
㉤  正音作而天地萬物之理成備. 其神矣哉. 是殆天啓聖心 而假手焉者乎.  
  아! 정음의 지음에 천지만물의 이치를 이룩하여 갖추니 신묘하도다. 이는 거의 하
  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서 그 손을 빌린 것이로다. (제자해)
㉥ 正音制字尙其象 因聲之每加
  정음의 제자는 그 모양을 존중하여 소리에 따라 거세지면 획을 더하였다. 正音之
  字只卄八 정음의 字는 오직 스물여덟. (제자해 訣)
㉦ 正音初聲, 卽韻書之字母也. 聲音由此而生, 故曰母.
  정음의 초성은 곧 운서의 자모이다. 聲音이 이로부터 생기므로 母라고 말한다.
  (초성해)

 
 해례본과 함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5년 기사에도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세종실록 28년 9월 기사에도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이라 하여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훈민정음’은 책 이름 으로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리키기도 하고, 세종이 만든 문자 체계를 가리키기도 하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위의 ㉡ 이하에 쓰인 ‘正音’은 ‘訓民正音’에서 관형부 ‘訓民’을 생략한 것이다. ‘正音’은 제자해에 4회, 초성해에 1회, 정인지 서문에 2회 나타난다. 여기에 쓰인 ‘정음’이 문자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다. ㉣의 ‘正音二十八字’와 ㉥의 ‘正音制字’와 같이 ‘正音’이 ‘字’와 한 덩어리로 묶여 사용된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훈민정음의 약칭으로서의 ‘正音’은 「直解童子習」(成三問 지음), 「釋譜詳節 序」,「月印釋譜 序」에서도 쓰였다.
「석보상절 서」의 협주에 “正音은 正 소리니 우리 나랏마 正히 반기 올히 쓰논 그릴  일후믈 正音이라 니라” (정음은 바른 소리니 우리나라 말을 바르고 반드시 옳게 쓰는 글이므로 그 이름을 정음이라 한다)라고 ‘정음’의 뜻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이 협주는 ‘正音’을 문자로서 인식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에서 ‘正音’이 ‘성음’(聲音)의 대립어로 쓰이고 있는 점도 ‘정음’이 문자 체계를 지시하는 것임을 잘 보여 준다. 이 문맥에서 ‘성음’은 음성언어 즉 ‘말소리’이고 ‘正音’은 그것을 시각화한 글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정음’이 쓰인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용어에는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정음의 초성은 운서의 자모’이며 ‘이로부터 성음(말소리)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 문맥에서 ‘정음’은 현대 언어학의 ‘음소’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 언어학에서 심리적 차원에 존재하는 음소단위로부터 생리적· 물리적인 말소리(음성언어)가 생성· 인지된다는 관점과 ㉦에 나타난 ‘正音’과 ‘성음’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것이다.

 한편 해례본에는 ‘정음’안에 ‘초성, 중성, 종성’이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성운학에서는 음(音)과 성(聲)을 구별하여 쓰지 않았다. 따라서 ‘正音二十八字’에 속한 문자들은 초성, 중성, 종성이라는 청각적 소리단위이면서 동시에 시각적 문자단위이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문(諺文), 언자(諺字), 반절(反切)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쓰이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동시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어로 가장 널리 사용된 용어로 ‘언문(諺文)’이 있다. 언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예는 「朝鮮王朝實錄」 기사 중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일 것이다.
 이것은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의 실록 기사이고, 이어서 세종 26년(1446년) 2월 16일에 최항,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韻會」를 번역하게 했다는 실록 기사에도 나온다. 같은 해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상소문(실록 번역문)에서는 무려 22회나 쓰였고, 이 상소문을 본 후 최만리 등을 불러 꾸짖는 세종의 말을 기록한 기사에도 ‘언문’이 출현한다.

 훈민정음 또는 정음이 공식적인 명칭이라면 언문은 속칭으로 사용했던 용어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언문을 비칭(卑稱)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적어도 세종 당대에는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실록의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세종 25년 12월 30일)라는 기록이다. 실록에서 임금이 친제한 문자를 언문이라 한 것이다. 언문이 비하적인 의미를 가졌다면 이런 문맥에서 결코 쓸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최만리의 반대상소에 쓰인 언문의 용례다. 언문이 비하적 의미를 함의했다면 최만리가 임금이 직접 만든 문자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훈민정음(혹은 정음)이 격식을 갖춘 정중한 용어라면 ‘언문’은 이것을 평범하게 칭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실록 기사에는 우리 문자를 지칭하는 언문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특이한 경우로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언문의 용례가 있음은 언급해둘 만하다.

(2) 국법(國法)은 귀천(貴賤)·남녀(男女)를 막론하고 6, 7세 때부터 언문(諺文)을 가르치는 데, 이를 이름하여 ‘가나(假名)’라고 하며 공사(公私)의 문서는 모두 이 ‘가나’를 사용합니다. 진문(眞文)의 관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서(試書)를 알고 해서(楷書)·초서(草書)를 대략 이해하는 사람이면 곧 이 자리에 차임합니다.(순조 9년(1809년) 12월 2일)

 이 기사는 도해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 최석(崔昔) 등이 일본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별단(別單)을 옮긴 것이다. 이 기사에서의 언문은 당시의 조선인이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으며, ‘眞文(漢字)’과 대립되는 용어이다. 이는 우리가 훈민정음을 가리키기 위해 ‘漢字’의 대립어로 쓴 ‘언문’의 용법과 같은 것이다.

 한편 실록 기사에는 언문과 같은 뜻으로 ‘언자(諺字)’라는 용어도 더러 나타난다. 그 중 이른 시기의 것 두 예만 보이기로 한다.

(3)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대학연의」를 언자로써 어조사(語助辭)를 써서 종실 가운데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는 자를 가르치려고 하였다.(문종 원년(1451년) 12월 17일)

(4)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언자(諺字)를 사용하여 「잠서(蠶書)」를 번역하게 하였다.(세조 7년 3월 14일)

(5) 승전색(承傳色) 설맹손(薛孟孫)이 언자와 한자를 섞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승정원에 보였다.(성종 10년(1479년) 9월 4일)


 (3)의 기사는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대학연의」의 본문에 구결을 달았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종전 한자의 약체(略體)로 된 차자(借字) 구결을 대신하여 일찍부터 한글 구결을 만들어 활용했음을 알려준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훈민정음이 왕자의 한문의 학습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는 「잠서 언해」에 관한 기록에서 우리 문자를 ‘언자(諺字)’라 부른 예이다. (5)는 양반관료가 훈민정음과 한자를 섞어서(이른바 국한문 혼용) 서간문을 작성한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이 언문을 언자라고 부른 예도 적지 않는데 이로 보아 두 용어는 구별 없이 혼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언문과 별도로 우리 문자를 가리킨 용어로 ‘반절(反切)’이 있다. 이 용어는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의 ‘범례’항에 나온다. 여기에는 ‘諺文字母’ 아래 ‘俗所謂反切二十七字’라 하여 반절을 우리 문자 명칭어로 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반절이 우리 문자를 지칭한 용례는 없다.
 
 반절이란 용어는 중국 한자음을 성모와 운모라는 두 개 단위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데에서 훈민정음을 반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반절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 문자 명칭어로 보기 어렵다. 중국의 성운학에서 쓰이던 용어가 잠시 전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문(國文)의 출현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문자를 지시하는 명칭으로 훈민정음, 정음, 언문, 언자 등이 통용되다가 19세기 말엽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고, 청나라와의 사대관계가 약화됨에 따라 독립과 자주의식이 고취되면서 우리의 고유문자는 국가의 문자로 그 지위가 격상된다.
 즉 諺文이 국가의 문자가 되면서 그 명칭이 ‘국문(國文)’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문이라고 칭하게 된 시기는 「고종실록(高宗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軍國機務處啓, 議政府以下各衙門官制職掌. 學務衙門 管理國內敎育學務等政
(··중략··) 編輯局 掌國文綴字各國文繹及敎課書編輯 等事.
학무아문은 국내의 교육과 학무 등을 관리한다. 편집국을 두어 국문 철자와 각국의 문장을 번역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을 관장케 한다.(고종 31년(1894) 6월 28일)

 갑오개혁 이후 군국기무처에서 의정부 이하 각 관청의 편제와 직무를 근대 정부조직으로 개편하면서 학무아문(學務衙門) 내에 편집국을 설치하여 ‘國文綴字’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토록 한 기록이다. 이 규정에 이르러 종전의 ‘언문’이 ‘나랏글’ 즉 국가의 공용 문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1443년에 창제된 이후 450년 동안 우리 문자 생활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훈민정음이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능 좋고 간편한 우리 문자를 뒷전에 두고, 어렵고도 불편한 남의 문자[漢字]에 얽매여 있던 질곡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밖에 ‘國文’이 나타난 주요 기사는 다음과 같다.

(7) 凡國內外公私文字. 遇有外國國名地名人名之當用歐文者. 俱以國文繹施行事. 일체 국내외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서에 외국의 나라 이름, 고장 이름, 사람 이름을 구라파 글로 쓴 것이 있으면 모두 국문으로 번역할 것입니다.(고종 31년 7월 8일)

(8) 銓考局條例.(··중략··) 一. 普通試驗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外國事情內情外事 俱發策.전고국 조례(銓考局條例). 보통시험에는 국문, 한문, 글자쓰기, 산술, 국내 정사, 외국사정, 국내 사정, 외무 관계 문제를 모두 시험 문제로 낸다.(고종 31년 7월 12일)

(9) 勅令第一號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중략··) 第十四條 法律勅 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칙령 제1호에서는 “내가 결재한 공문규정을 공포하게 하고 종전의 공문 공포 규정은 오늘부터 폐지하며 승선원 공사청도 전부 없앨 것이다.”라 하였다.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섞어 쓴다.(고종 31년(1894) 11월 21일)

(10) 勅令第四十九號 法官養成所規程. 第四條 凡本所의 生徒되 者 年齒二十歲以上으로 入學試驗에 及第 者 或現在官署에 奉職 者限홈. 入學試驗科目이 左와 如홈. 一. 漢文作文. 一. 國文作文. 一. 朝鮮歷史及地誌大要.
칙령 제49호 법관양성소 규정. 제4조 본 양성소의 생도로는 20살 이상으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또는 현재 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제한한다. 입학시험 과목은 아래와 같다. 1. 한문 작문 1. 국문 작문 1. 조선역사와 지리대요(고종 32년(1895) 3월 25일) 

(11) 勅令第八十六號 公文式 裁可頒布. 第一章 頒布式.(··중략··) 第九條 法律命令은다 國文으로 本을 삼 漢譯을 附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칙령 제89호 공문식을 재가반포하다. 제1장 반포식 제9조. 법률과 명령은 다 국문으로 서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덧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토록 함. (고종 32년 5월 8 일)
 
(12) 學部告示第四號 (··중략··) 學徒 八歲以上으로 十五歲지 增集야 其科程은 五倫 行實로붓터 小學과 本國歷史와 地誌와 國文과 算術其他外國歷史와 地誌等 時宜에 適用 書冊을 一切敎授야 (···하략···) 학생은 8살부터 15살까지 더 모집하고 그 과정은 오륜행실로부터 소학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에 적용되는 책을 일체 가르쳐서···. (고종 32년 9월 28일)
 
(13) 內閣總理大臣李完用奏, 以學部大臣李載昆請, 議設置國文硏究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아뢰고 학부대신 이재곤이 청하여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고종 44년(1907) 7월 8일)  

 
(7)은 각종 문서의 외국어 고유명사를 국문으로 번역토록 한 것이다. (8)은 각급 아문의 관리 등용 시험에 ‘國文’을 부과한 것이고, (9)는 국가의 공용문서 기록에 국문을 기본으로 삼고 국한문도 쓸 수 있게 한 역사적 규정이다. 이 칙령 1호 14조에 의해 한글은 국가의 문자로 공인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다. 이 내용은 (11)에서 보듯이 칙령 89호로 더욱 구체화되어 반포된다.  
 
 (10)는 법관양성소 입학시험 과목에 ‘國文’을 부과한 규정이다. 이들은 세종 당대에 제한적으로 이서배(吏胥輩) 선발 시험에만 훈민정음을 부과한 이후 관리 임용 시험 전반에 ‘國文’을 부과한 최초의 사건이다. (12)는 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國文’을 가르치도록 한 법률이다. (13)은 우리글을 연구하는 국가 기관 ‘국문연구소’의 설립 기사이다. 주지하다시피 주시경 등 주요 인사들이 많은 토론을 거쳐 국문을 새롭게 정비한 ‘의정안’을 만들었으나 국운이 다하여 시행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가리키는 ‘國語’는 널리 쓰이지만, 우리글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國文’보다 ‘한글’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현재 ‘國文’이라는 용어는 노년층에서 일부 쓰이기는 한다. ‘國文’은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줄여서 부르는 ‘國文科’ 정도에서 부분적으로 쓰일 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술어로서의 기능은 ‘한글’에게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한글'의 출현
 
 한글’이라는 용어는 일제의 억압으로 쓸 수 없게 된 ‘國文’을 대신하여 우리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애국적 의도에서 만든 것이다. ‘한글’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영근의 ‘한글의 유래’(1994)에서 명료하게 밝혀졌다. 

 최남선(1946:179~180, 1973:87)에서는 朝鮮光文會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였으나, 1910년 주시경의 글에 나타나는 ‘한나라글’에서 ‘한글’의 유래가 비롯되고, 주시경의 손으로 쓴 각종 증서에 ‘한말’, ‘배달말글’, ‘한글’이 실용되고 있는 증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글’의 작명부는 주시경으로 봄이 옳다.(고영근1983a/1994:294)
 ‘한글’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13년 3월 23일에 창립한 조선언문회 창립총회 기록에 나타난다. 창립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의 ‘四二四六年 三月二十三日(日曜) 下午一時 ··· 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에서 ‘한글’이 처음 등장한다.1) 따라서 한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는 1913년 3월 23일이 된다(고영근 1983a/1994:293).2)

 그후 ‘한글’이라는 명칭은 「아이들보이」(1913.9)의 ‘한글풀이’란에 처음 실용화되었고,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을 바꾸어 ‘한글배곧’이라 부른 데서도 쓰였다. 여기서 나온 중등과 제4회 수업증서, 고등과 제3회 수업증서, 우등증(1915.3) 등에 ‘한글배곧’이 나타난다.

 주시경의 후학에 의해 ‘한글’이 처음 쓰인 기록은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의 머리말에 ‘한글모임자 한샘’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영의 「한글적새」와 「한글모 죽보기」의 두 원고는 1916~1919년에 엮어진 것인데 여기에서 ‘한글’이 쓰인 것으로 보아, 주시경의 제자들이 이 말의 보급에 앞장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영근 1984a/1994:295) 3)

 '한글’이 종래 천대하는 언문의 이름을 갈음하는 새 이름으로 널리 쓰인 것은 1926년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한 이후의 일이다. 1927년에 ‘한글’이 창간되어 이 이름이 일반인의 의식에 오르게 되고 이 해의 기념일부터는 ‘한글날’로 고쳐 일컫게 되어, 한글의 운동이 자꾸 성대하여짐에 따라, 한글이란 이름도 더욱 널리 퍼지고 깊이 뿌리를 박아 일반 사회가 즐겨 쓰게 되었다. (최현배 1976:52~53).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글에 대한 명칭어는 시대별로 용어 사용에 일정한 특징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창제 시기: ‘훈민정음’, ‘정음’, ‘언문’이 공존한 시기. 이때의 ‘언문’은 비하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② 16세기~ 19세기 말 : ‘언문’이 주류이고 ‘언자’(諺字)도 부분적으로 쓰였다. 후자는 ‘글자’라는 뜻이 강하여 전자보다 더 좁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③ 19세기 말~ 20세기 초 : 개화기 이후 민족의식이 본격적으로 발로되면서 ‘국문’이 등장하였다.
④ 20세기 초~ 현대 : 일제 치하에서 ‘국문’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게 됨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져 널리 쓰이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로 이어졌다.




1) 이 ‘한글모’는 ‘朝鮮言文會’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한글’은 ‘朝鮮言文’에 대응하고 ‘모’는 ‘會’를 뜻한다.
2)「한글모 죽보기」의 검토를 통해 ‘배달말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1911.9.3)도 문증(文證)되었다. ‘배달말글’이란 말은 광복 후 최현배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미 주시경에 의해 1911년에 사용된 것이다(고영근 1994).
3) 고영근(1983a/1994) “한글의 유래”,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고영근(1983b/1994), “개화기 국어연구단체와 국문보급활동”,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BlogIcon 멋진백작 | 2009.02.17 23:58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잡지형 블로그인가요? ^^
좋은 한글회사 ^^ 오래된 고객이랍니다.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

한알에스에스(영문으로 쓰기가 거북한^^)에 등록하고 자주 들를 게요.
엮인글과 댓글 감사합니다. oTL
BlogIcon 온한글 | 2009.02.18 09:32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백작님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정보 많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자주 찾아와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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