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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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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의 제자 원리

 「훈민정음」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해설을 한 부분은 첫머리의 제자해 (制字解)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글 자형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언어학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깊이 있게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적인 측면의 해설만을 토대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글 자모 28자는 각각 뿔뿔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자를 먼저 만든 다음 나머지는 이것들에서 파생시켜 나가는 식의 이원적인 체계로 만들어졌다. 자음(당시 용어로서는 초성)글자 17자는 먼저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제자해에서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래쪽 세 글자에 대한 내용이 쉬우므로 그 쪽부터 보기로 한다. 순음 ㅁ자는 ㅁ음, 즉 〔m〕음을 소리 낼 때 쓰이는 발음기관인 입술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치음 ㅅ자는 같은 원리로 그 소리, 즉 〔s〕음을 소리낼 때 조음점(調音點) 구실을 하는 이의 모양을, 후음 ㅇ자는 역시 같은 원리로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글자 ㄱ과 ㄴ도 그 소리를 낼 때 관여하는 발음기관의 모양인 혀를 본떠서 만든 점에서는 나머지 세 글자에서와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발음기관 자체의 모양, 즉 가만히 있을 때의 혀 모양이 아니고 바로 그 소리를 낼 때의 혀 모양을 본떴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아음(牙音, 즉 연구개음) ㄱ자는 그 소리 〔k〕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설근(舌根)이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으며, 설음(舌音) ㄴ자는 그 소리 〔n〕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혀가 윗 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는 것이다.

 설근이 목구멍을 막는다고 한 것은 혀 뒤 쪽이 연구개에 닿아 숨의 통로를 막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고, 혀가 윗 잇몸에 닿는다고 한 것은 혀끝이 윗 잇몸에 닿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다. 이때 ㄱ을 소리 낼 때는 혀 뒤쪽이 입천장까지 올라가므로 혀 앞쪽은 자연히 내려오는데 ㄱ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며, ㄴ을 소리낼 때는 반대로 혀 앞쪽이 윗잇몸에 가 붙으려니까 혀 뒤쪽이 처지게 되는데 ㄴ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 1과 그림 2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 그림은 〔ŋ〕과 〔n〕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각각 ㄱ과 ㄴ의 모습과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ŋ〕보다 〔k〕를 발음할 때의 것이 더 좋겠으나 해당 그림이 없어 대체한 것이다. 혀 모양에서는 똑같으므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것이나 좋을 것이다.)
  

   

 

  자음 17자 중 나머지 글자는 이 기본자에다 획을 하나씩 더해서 만들었다. 그 과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⑶은「훈민정음」의 해당 부분 원문이다.



 여기에서 획을 더해 만든 글자들은 그 화살표 앞쪽의 기본자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자음들이다. 즉, ㅋ은 ㄱ과 마찬가지로 아음(牙音)이며, ㅂ과 ㅍ은 ㅁ과 마찬가지로 순음(脣音)이다.

 같은 종류의 자음이되 획이 하나 씩 덧붙으면 소리가 한 단계씩 더 거센() 소리가 되는데 가획은 바로 그것을 표시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다만 괄호 안에 있는 글자들은 화살표 왼쪽의 기본자들로부터 가획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 경우에는 소리가 더 거세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뜻은 없다고 하였다.
 괄호 속의 글자 중 자는 그 중에서도 예외적인 글자에 속한다. 은 아음(연구개음)인데 그것을 아음의 기본자인 ㄱ에서 파생시킨 것이 아니라 후음 ㅇ에다 획을 덧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 ㅇ이 워낙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두 자는 오래되지 않아 자형에서 구분이 없어져 초성 자리에 쓰일 때는 아무 소리가 없는, 다만 빈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만 하게 되었고 종성 자리에서는 애초 자가 대표하던 〔ŋ〕으로 발음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음성적으로 거리가 먼 둘이 한 자형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모음(당시의 용어로는 중성) 글자 11자는 먼저 기본자 세 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이것들을 조합하여 만드는 방식을 취하였다. 기본자는ㆍ, ㅡ, l 인데 이들의 제자 원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음의 기본자 3자는 각각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음의 기본자들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글자들은 이들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과도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을 발음할 때는 각각 혀를 오그리고 펴고 세우게 되는데 ㆍ, ㅡ, ㅣ는 각각 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음자의 나머지 여덟 글자는 ㆍ 를 ㅡ와 ㅣ에 결합시켜 만들었다.




 이들 모음자 중 ⑸는 ㆍ를 하나씩 결합하여 만들고 ⑹은 두 개씩 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⑸ 가 단모음임을, ⑹ 이 이중모음임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것은 초출(初出)과 재출(再出)이라는 용어로 구별했는데 ㅛ, ㅑ 등은 ㅣ+ㅗ, ㅣ+ㅏ로 구성되어 있어 ㅣ에서 일어나는 소리이므로 재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ㆍ가 ㅡ의 위쪽과 아래쪽, ㅣ의 왼쪽과 오른쪽 어디에 배치되었느냐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여기에도 어떤 뜻을 담고 있다. ㆍ가 왼쪽과 오른쪽에 찍힌 것은 그 모음이 양모음 (陽母音) 임을 나타내주고, 아래쪽과 왼쪽에 찍힌 것은 음모음 (陰母音) 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엄격한 모음조화 규칙이 있었으며, 더욱이 훈민정음 제작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 (性理學)에서 음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으므로 양모음, 음모음의 구분이 이처럼 제자의 원리에까지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음자의 ㆍ는 「훈민정음」 및 「동국정운」(1447)에서는 제 모습을 지키지만 이들 이외의 문헌에서는 ㆍ가 아직 완전히 동그라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문헌에서나 동그라미 모양이 흐트러진 문헌에서나 다같이 ㅗ, ㅏ, ㅛ, ㅠ 등의 ㆍ는 이미 그것이 기원적으로 ㆍ자였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실용적으로 이들 모음을 「훈민정음」에서와 같은 형체로 쓰기 불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글자에서 ㆍ가 제 음가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ㅗ는 자형상으로는 ㅡ와 ㆍ의 결합으로 만들었으나 ㅗ가 음성적으로 ㅡ음과 ㆍ음의 복합이라는 뜻을 담았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ㅗ, ㅏ 등에서 ㆍ의 모습을 살려 둘, 그 글자의 제자 과정을 굳이 살려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이상 28자 이외의 자모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도 해설을 하고 있다. ‘세종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자모를 만들었던 것이다. 먼저 순경음(脣輕音)이라 불린 ㅸ가 있었다. 이는 ㅂ 밑에 후음 ㅇ을 연서(連書)하여 만든 것인데 순경음이 ㅂ에 비해 입술을 거벼이 다무는 소리임을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 ㅂ 〔p〕음이 폐쇄음임에 비해 ㅸ〔ß〕음이 마찰음임에서 생기는 차이, 즉 숨의 차단의 정도가 다름을 나타냈던 것으로 해석된다. ㅸ 이외에도 ㅱ, ㆄ를 비롯하여 등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한자음의 표기에만 쓰였을 뿐 한국어의 표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28자 이외의 자모로 ㄲ, ㄸ, ㅃ, ㅆ, ㅉ, ㆅ처럼 같은 글자를 두 개씩 겹쳐 만든, 이른바 각자병서(各字竝書)가 있었다. 이렇게 두 글자를 겹쳐 만든 것은 이 소리들이 엉기는 소리임을 표시해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엉긴다(凝)’는 표현은 된소리에 대한 인상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모음자에도 11자 이외에 많은 자모를 만들어 썼다. 이들은 그 발음에 따라 11자 중의 2자 내지 3자를 복합하여 만든 것으로서 ⑺에서와 같이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여기서는 ㆍ의 형체를 살리지 않고 현재의 글자체로 예시하겠다. 그리고 당시에도 한국어 표기에는 쓰이지 않던 6개의 자모가 더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빼기로 한다.)



  
 이상에서 보면 한글의 제자 원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글자의 모양을 발음기관에서 따왔든 천(天), 지(地), 인(人) 삼재에서 따왔든 그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 하나와, 낱자 28자가 제각기 다른 연원을 가지고 관련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 글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만듦으로써 글자의 조직성을 높였다는 것 하나다.
 이 중 발음기관에서 글자의 모양을 본뜨겠다는 착상은 매우 기발하며, 자모들을 이원적으로 만들겠다고 한 착상도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다. 한글을 흔히 과학적인 문자, 독창적인 문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특히 ㄱ과 ㄴ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에 대한 기술(記述)의 과학성은 각별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글 창제 때 중국 한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이나 그 이전 「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12월 조의 기록에 다같이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한글의 자형이 고전을 닮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표현이 너무 소략하여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글은 모양이 전반적으로 네모지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다고 해도 실제 자형은 여러 가지로 달리 디자인될 수 있을 터인데 입술의 모양이든 혀의 모양이든 ㅁ, ㄱ, ㄴ처럼 네모꼴로 만든 것은 한자의 영향일 수 있을 것이다. 기본 글자를 만들고 거기에 가획을 하거나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도 한자의 육서(六書)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한자뿐 만 아니라 당시 주변 국가의 문자들을 여러모로 참조하고 그것들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영향이든 한글의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발명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앞 시대까지의 축적된 지혜에서 한걸음 발전한 산물인 것이다.

 
2. 한글의 특징

 앞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면서 한글이 문자적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고, 다른 자리에서도 한글의 독특한 특징을 여러 가지 보아 왔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좀더 부연해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먼저 한글 자모의 복합성에 대해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이원적인 구성방식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자모의 한 부분이 어떤 음성정보를 대표하는 구실을 한다.
 가령 ㅋ은 한 자모지만 가운데 획이 분리되어 나올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유기성(〔+aspiratel〕)이라는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요소다. 이것은 ㅌ의 가운데 획도 마찬가지다. ㅛ,ㅑ등도 한 자모들인데 그 중의 한 획이 반모음 j 를 대표하고 있다. 한 자모가 한 음소보다 작은 자질들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 다른 문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 특징을 Chao(1968)는 다음과 같이 꽤 유머러스하게 지적한 바 있다.

 ⑴  한국 문자(‘한글’ 또는 ‘언문’ 이라 불린다)의 체계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있다. 첫째, 그것은 일본 문자인 ‘가나’보다는 알파벳에 가깝다. 둘째, 문자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단위 기호의 부분들이 음성의 분석적 자질을 대표하는 문자체계이다. 중국 문자에서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어떤 다른 문자체계에도 그러한 것이 없다. 예컨대, 영어의 자음 b는 기둥이 위로 되어 있어서 유성음이고 p는 기둥이 아래로 되어 있어서 무성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성 치음인 d는 기둥을 아래로 하면 q가 되는데, 만약 이와 같은 분석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무성 치음 〔t〕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문자에서는, 자모의 일부분조차도 때로는 음성학적으로 연관성이 있다. 예컨대, 경음의 글자는 평음기호를 겹쳐서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면, ㅅ은 평음 s이고, ㅆ은 경음 s(흔히 로마자로 ‘ss'로 표기한다)를 나타내며, ㄱ은 k를 ㄲ은 경음 k('kk')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모음자의 어떤 변형은 선행하는 반모음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ㅏ는 a, ㅑ는 ya, ㅓ는 를, ㅕ는 y를, ㅗ는 o를, ㅛ는 yo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이 특징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Sampson(1985)이다. Sampson은 순전히 한글만을 위해 지금까지 문자의 분류에 등장한 일이 없는 자질문자(featural writing) 란 종류를 하나 따로 설정하였다.
 
 <그림3> 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한 자모가 음소보다 작은 음성자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독립된 문자의 종류로 분류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글을 자질문자라는 별개의 종류로 분리해 내야 하느냐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문자의 분류는 각 자모가 한 덩어리로서 언어의 어떤 단위를 대표하느냐에 따라 음절문자, 음소문자로 나누는 만큼 한글은 그 점에서 역시 음소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이한 문자의 종류로 등록될 만큼 한 자모의 일부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한글은 글자들 사이에 유연성이 높다.
 우리는 ㄱ과 ㅋ이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요, ㄴ, ㄷ, ㅌ이 다른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라는 것을 글자형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또, ㅏ, ㅓ, ㅗ, ㅜ에 비해 ㅑ, ㅕ, ㅛ, ㅠ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글자들이며 그러한 공통점을 제외하면 ㅏ와 ㅑ, ㅗ와 ㅛ가 하나로 묶이는 글자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한 자모 안의 획이 무의미한 단순한 획이 아니고 어떤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획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은 한글의 다른 특징으로 ‘모아쓰기’에 대해서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음절 단위로 묶어 다시 한 자로 만들어 쓰는 특이한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세종실록」권 102의 기록에 나와 있다. 새 문자에 대해 거의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 그 짤막한 기록에서 이 모아쓰기에 대한 규정을 넣고 있는 것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이 규정은 「훈민정음」의 예의(例義)와 합자해(合字解)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모아쓰기에 대해서 이처럼 계속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방식이 워낙 특이 하여 올바로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음자와 모음자를 분리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다시 음절 단위로 묶어 운영하려고 하니 자연히 어려움도 따르고 세심하고 상세한 규정도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자, 즉 모음자를 초성자, 자음자와 완전히 다른 꼴로 만든 것이 무엇보다 그러하지만 글자 모양의 디자인에서부터 모아쓰기를 전제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한글을 이처럼 모아쓰기로 운영하려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당시 문헌은 으레 한자와 한글이 섞여 쓰였고 또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다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때 한자 하나에 한글도 한 글자의 꼴로 나타내는 것이 한글을 풀어 썼을 때 보다 어울렸을 것이다. 또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도 ‘訓民’을 ‘ㅎㅜㄴㅁㅣㄴ’ 으로 표기하는 것보다 ‘훈민’ 으로 표기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그 동기가 어떻든 모아쓰기는 한글로 하여금 매우 특이한 문자가 되게 하였다. 활자를 만들 때 한글은 ‘한’을 하나 ‘글’을 하나 독립된 활자로 만든다. 이때 ‘한’이란 묶음을 부를 언어학 용어는 무엇인가? ‘letter’ 도 아니요 ‘alphabet’ 도 아니요‘syllabary’ 도, ‘character’도 아니다. ‘alphabetic syllabary’ (Taylor1980) 라고나 할까?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그만큼 특이한 증거다.
 컴퓨터의 한글코드를 만들 때도 조합형으로 하느냐 완성형으로 하느냐가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완성형이란 처음부터 ‘ 한, 값 ’ 처럼 음절단위로 묶인 글자모양을 입력하는 방식인데, 이러한 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이 한국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역시 특이한 모아쓰기 방식이 빚어내는 사건들이다. 이 외에 더 근원적인 문제로 사전의 자모 배열 순서며 받침의 문제들이 있음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다. 한 마디로 모아쓰기는 한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한글의 운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일 것이다.

 * 이 글은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인 이익섭 교수의 저서 중 「한국의 언어」중에서 저자의 재가를 얻어 발췌하였습니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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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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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소리가 있다.
 눈 오는 소리, 바람 소리, 시계 소리, 의자 삐걱대는 소리, 마른 꽃이 조금씩 삭아가는 소리, 먼지 떠오르고 가라앉는 소리,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별빛 얼어붙는 소리, 고양이 수염에 졸음이 조심스레 엉겨 붙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져 저만치 달아나는 소리…….
 어떤 소리는 귀에 들리고, 어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떤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있지만 어떤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없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김광규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문학과지성사 2007년)에 실린 「춘추(春秋)」라는 시다.
 흥미로운 것은,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 병술년 봄을 보냈다”는 진술이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 그것이 시적 과장일 수는 있어도 ― 시적 진실을 어겼다고는말할 수 없다.
 인간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을 뿐이지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수유 꽃 피는 소리”는 들리지 않으므로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이다. 그래서 시인은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제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들리는 소리를 어떻게 실감나게 받아 적을까 하는 점이다.


텃밭에 가랑비가 가랑가랑 내립니다
빗속에 가랑파가 가랑가랑 자랍니다
가랑파 가꾸는 울 엄마 손 가랑가랑 젖습니다.

_정완영, 「가랑비」(『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사계절 2007년
)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의 동시조(童時調)인데, 우리말의 소리와 가락이 의미와 절묘하게 결합된 시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텃밭에 비가 내린다. 가느다랗게 내리는 “가랑비”(실비)이다. 시인은 그 소리를 “가랑가랑”이라고 받아 적었다. “가랑가랑”은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소리이다. 소리가 그것의 주체인 가랑비의 성질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비를 맞으며 “가랑파”(실파)가 자란다. 그 자라는 소리가 “산수유 꽃 피는 소리”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인은 더 밝게 귀를 열어 그 소리를 “가랑가랑”이라고 듣는다. 내리는 실비와 자라는 실파 사이를 이어주는 “가랑가랑”이라는 소리가 더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살갑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시가 더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이 둘을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랑가랑”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가랑가랑” 자라는 “가랑파”를 “가랑가랑” 젖는 손으로 가꾸는 어머니의 손길 말이다. 어머니의 그 “가랑가랑” 젖는 손길에 이르러 “가랑비”와 “가랑파”의 유순한 성질이 “가랑가랑”이라는 소리와 함께 독자에게 감각적으로 스며든다.

 이 시는 ‘텃밭’ ‘가랑비’ ‘가랑파’ ‘어머니’라는 소재를 “가랑가랑”이라는 하나의 소리로 이으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우러져 이룰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풍경을 더없이 작고 순박하게 펼쳐 보인다. 모두가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어서 조금만 함부로 대했다가는 곧 사라져버리고 말 것 같은 세계. 마치 평화의 실상이, 자연과 사랑의 실상이 그렇다는 듯이. 이런 작고 부드러운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가랑가랑”이라는 소리이다.
 들리는 소리를 어떻게 실감나게 받아 적느냐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시의 성패, 특히 의성어와 의태어를 즐겨 사용하는 동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는 소리를 좀 색다른 방식으로 받아 적은 경우이다.


풀벌레 소리는
말줄임표
……

장독대 옆에서도
풀숲에서도
……

밤새도록
숨어서
……

재잘재잘
쫑알쫑알
……

―안도현, 「풀벌레 소리」(『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년)



 제목이기도 한 풀벌레 소리를 받아 적었다. 이 시는 소리를 듣고 그 들리는 바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받아 적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 소리를 말줄임표로 받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진리의 실상은 언어화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세계(『노자』)를 연상케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뚜라미 소리를 ‘귀뚤귀뚤’이라고 받아 적는 순간 귀뚜라미 소리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귀뚤귀뚤’이라고 하지 않고, 예를 들어 ‘귀뚜라미가 운다 / …… / ……’이라고 나타내게 되면,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비언어성을 통해 비로소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실제에 가깝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시를 다음과 같이 고쳐 쓴다면 세계의 실상을 형상화하는 데 비언어화가 언어화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풀벌레 소리는
……
장독대 옆에서도
풀숲에서도
……
밤새도록
숨어서
……


 1연에서 “말줄임표”라는 말을 빼고 마지막 연을 삭제했다. 요컨대 풀벌레 소리를 마지막 연에서처럼 “재잘재잘 / 쫑알쫑알”이라고 언어화하는 것보다 “……”처럼 언어화하지 않는 것이 풀벌레 소리를 구체화하는 데 더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소리는 소리 자체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것보다 그것을 ‘○○ 소리’ 정도로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다.
 「춘추(春秋)」에서 독자가 시인이 말하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소리가 구체적으로 언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참새는 짹짹’이나 ‘하하하 호호호 웃었어요’에서 보는 것처럼 외부의 소리를 의심 없이 받아 적을 경우 흔히 표현의 상투성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런 난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의 객관적 소리는 종종 주관적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표현되기도 한다.
 뛰어난 소설과 함께 동시의 명편을 적잖게 남긴 이문구의 「들비둘기 소리」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에서 나는
새소리는
다 노랫소리 같은데
들비둘기 소리는
울음소리 같았다.
지집 죽구

지집 죽구
원통해서
못 살겠네.
흉내쟁이
합죽 할매의 흉내도
울음소리 같았다.

 ―『풀 익는 냄새 봄 익는 냄새』(랜덤하우스중앙 2006년)


 비둘기 소리는 ‘구구구구’나 ‘구국구국’ 정도로 받아쓰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지집 죽구 / 지집 죽구”라는, 전혀 새로운 소리로 기록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산에서 살아가는 새와, 사람들 곁에서 사람들과 어떻게든 관련을 맺으며 살아가는 들비둘기의 생태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사람들과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산새들의 소리는 하나하나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아 “다 노랫소리 같”이 들리지만, 사람들과 이웃해 사는 동안 그들의 대소사를 먼발치에서나마 어느 정도 겪어올 수밖에 없었던 들비둘기가 내는 소리는 분명 어떤 한스러운 인생을 환기하는 소리로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것이 내는 소리가 더욱더 주관적으로 인식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케 한다.


 이렇게 볼 때 들비둘기 소리인 “지집 죽구 / 지집 죽구”는 들비둘기 소리가 아니라, “흉내쟁이 / 합죽할매”의 “원통해서 / 못 살” 만큼의 어떤 한 서린 사연을 환기하면서 전혀 새로운 “울음소리”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소리 받아 적기가 단순한 흉내의 차원을 벗어나 주관적 감정과의 교류를 통해 새롭게 인식되는 순간, 소리는 소리의 차원을 벗어나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소리를 낳으면서 의미화된다.

 여기에 개구리가 있다. 이제 막 소리를 내어 울려는 참이다. 주의 깊게 따라가며 소리를 받아 적어 보자. 참고로 어떤 시인은 이렇게 받아 적었다.
“가갸 거겨 / 고교 구규 / 그기 가. // 라랴 러려 / 로료 루류 / 르리 라.”(한하운,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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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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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0. 11:30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

 한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특이하다.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문자(written script)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글은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돕기 위해 개발했고, 특정한 날을 택하여 공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날을 기념하여 특별한 기념행사와 학술대회를 진행하는 나라도 필자가 아는 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한글은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독특하다. 한글이라는 문자는 말소리를 표현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고안되었다. 'ㅋ'은 'ㄱ'의 소리인데, 하나의 획을 더하여 기식성(aspiration)을 나타내고 있고, 'ㄲ'은 강한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ㄱ'을 추가하는 등 발성의 요소를 문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글의 자소(letter)는 음소(phoneme)를 그대로 표현하도록 고안되어 있어서, 하나의 자소는 하나의 음소와 거의 일대일로 대응된다. 즉 문자가 소리를 바로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문자가 말소리를 표현하는 정도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이 그 문자로 쓰인 단어를 배우고 인식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속성이다.
 
 한글의 자소는 초성, 중성, 종성으로 모아져서 하나의 음절(syllable)을 이루며, 단어는 한 음절 이상의 음절조합으로 구성된다. 한글의 음절은 또한 몇 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단어 내의 음절 각각은 한자처럼 시각적으로 구분되며(예를 들어 '학교'라는 단어는 '학'과 '교'라는 시각적으로 구분된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음절은 형태소(morpheme; 의미 최소 단위)라 하여 뜻이나 문법적 기능을 지니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먹었고'의 경우에 '먹' 음절은 동사로서의 뜻과 기타 언어학적 정보를 지니고, '었'은 과거시제를 나타내며, '고'는 '그리고'처럼 이어지는 다음 말과의 연결성을 알려준다.
 
 말소리를 다루는 기존의 분야들은 음절을 소리의 한 단위로만 논해 왔다. 그러나 필자가 인간을 대상으로 단어인식 실험을 진행하던 중에 음절의 여러 다른 속성을 구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반란'이라는 단어는 2개의 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기로는 '반'과 '란'으로 구성되지만 말소리로는 '/발/'과 '/란/' 음절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표기(orthography)에서의 음절과 말소리(phonology) 차원에서의 음절의 차이는 인간이 단어를 인식하는 데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표기 차원의 음절과 말소리 차원의 음절을 구분할 필요를 느꼈고, 이에 따라 전자를 표기음절(orthographic syllable)로, 후자를 음운음절(phonological syllable)로 구분하였다.

 또 다른 음절적 특성은, 한 음절에 뜻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반란'의 '반'은 형태소로서 뜻이
있는 반면에 '나무'의 '나'는 뜻은 없고 단지 말소리와 글자형태만을 지니는 음절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음절의 특성도 인간의 단어인식 과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필자는 전자를 형태소음절(morphological syllable)로 후자를 비형태소음절(non-morphological syllable)로 구분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글은 언어학적 단위(linguistic unit) 측면에서도 시각속성 요소(visual feature),자소(letter), 음소(phoneme), 여러 종류의 음절(즉, 철자음절, 음운음절, 형태소음절)로 구분되어 있어서,다양한 정보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예를 들면, 영어의 'television'을 한글로 '텔레비젼'으로 표기하면, 영어의발음과 상당히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음절문자인 일어 문자의 경우에는 영단어를 표현하기에 매우 부족하여, 영어가 원래 지닌 소리를 부정확하게 표기한다. 한글의 이와 같이 우수한 점은 기본적으로 자소 혹은 음소 수준의 언어학적 단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한자는 기본적으로 음절단위로 표현되는데, 한글에는 적절한 음절단위가 있어서 한자를 한글로 쓰는 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다. 또한 형태소 단위도 지니고 있어서 형태소음절만 추가하면 표현하고 싶은 다른 단어를 얼마든지 생성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 '장'이라는 형태소음절을 추가하면 새로운 단어 '학교장'이 만들어지고, '학교장'에 '실'이라는 형태소음절을 더하면 '학교장실'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한글은 다양한 단위를 지니고 있어서 여러 수준의 정보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한글은 다양한 수준의 언어학적 단위를 반영하고 있는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사용하기 쉬운 문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말소리를 투명하게 표현한 한글

 인간은 말소리로 언어를 획득한다. 5세 정도 되면 모국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생성해낸다. 태어나서 말소리를 듣고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 없다. 단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그 언어를 배운다. 그러나 읽기는 교육과 학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동이 문자로 쓰인 단어를 읽고 이해하려면, 그 문자 단어를 본인이 알고 있는 말소리 단어로 바꾸는 과정을
학습해야 한다. 읽기에서 아동이 배워야 하는 것은 문자 단어를 그 구성요소인 자소, 음절 등의 하위 어휘요소(sublexical unit)로 분리해내는 것과 분리된 하위 어휘요소를 말소리 단위로 바꾸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문자 단어를 말소리로 전환한 후에는 이전에 획득한 말소리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단어이고,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의 이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를 배우는 과정은 문자부호를 말소리부호로 바꾸는 암호해독(decoding)이라고도 한다.
 암호해독 학습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요인은 문자 단어의 하위어휘요소가 말소리 단어의 구성요소를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글의 문자 단위인 자소(letter)는 거의 일대일로 말소리 단위인 음소(phoneme)와 연합되어 있다. 그래서 자소와 음소의 연합규칙을 학습하고 나면 누구나 문자 단어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그런데 영어단어의 경우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영어단어 읽기의 어려움은 알파벹이 음소와 일대일로 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의 경우에는 자소가 음소를 명료하고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읽기획득 즉 암호해독과정을 배우는 것이 어렵지 않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문맹이 그렇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그렇지만,문자와 말소리 단위간의 연합규칙이 명료하지 못한 영어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미국에서는 문맹퇴치사업이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특성은 한글이 말소리를 투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오는 이점이다.

 자소와 음소 간의 일관성 있는 연합규칙은 쓰기를 배우는 데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에 받아쓰기 시험에서 선생님이 불러주는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틀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자를 쓰는 과정은 뇌에서 두 종류의 원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 방법은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틀린 경우에 해당되는 원리로써, 말소리로 표현된 단어를 음운음절로 나누고 다시 음운음절을 음소로 분해한 후에, 해당되는 음소와 자소연합규칙을 사용하여 자소로 바꾸는 경우이다. 이 원리를 사용하는 경우에 음소와 자소의 연합이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일관성이 없다면,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쓰기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 다른 글자 쓰기 원리는 말소리로 표현된 단어를 음운음절로 분해한 후에, 음운음절에 상응하는 철자음절을 기억 속에서 이끌어내고, 철자음절을 자소단위로 분해하여 적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하려면, 미리 음운음절과 철자음절을 연합하여 암기하여야 한다. 암기해야 하는 음운음절과 철자음절의 이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학습자는 매우 큰 어려움에 당면하게 될 것이다. 마치 한자의 글자와 대응되는 말소리를 쌍으로 암기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글처럼 음소와 자소 간의 관련성이 일관적이고 거의 일대일의 대응을 가지는 경우에는, 음소와 자소 연합에 대한 규칙만 학습하고 나면 학습하지 않은 것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 또한 한글 말소리를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되는 현상이다.

 
 단어 인식과 관련된 한글의 특성

 한글처럼 자소와 음소 간의 관련성이 투명한 문자와, 한자처럼 철자음절과 음운음절의 관련성이 불투명한 문자-왜냐하면 한자는 자소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소와 음소간의 관련성을 생각할 수 없다. 단지 한자는 부수로 나뉠 수 있고 이 부수도 음운음절과 관련될 뿐이다-로 쓰인 단어는 뇌에서 다른 방법으로 인식된다.
 단어의 인식은 대분하여 두 종류의 과정을 거치는데, 하나는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자소나 음절과 같은 하위어휘요소를 이용하여 단어항목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어항목과 관련된 단어지식 정보를 활성화시켜서 이후의 문장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와 같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는 경우에, 처음에는 'ㅇ'으로 시작하는 부분을 찾고, 그 다음에는 모음 '어'부분을 찾고, 그래서 '어'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만나게 되고, 그 단어들 중에 'ㅁ'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골라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최종적으로 '어머니'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라는 자소 혹은 음절조합이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단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이전에도 이미 '어머니'가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라는 단어항목 밑에 기록되어 있는 단어의 발음, 품사, 의미, 유의어 및 관련된 단어,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용례 등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 단어항목 밑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정보를 끄집어내어 '어머니'가 왜 그 문장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하면, 궁극적으로 그 단어를 이해 혹은 인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실험결과에 의하면, 한글단어는 왼쪽 뇌에서 주도적으로 인식되고, 한자단어는 오른쪽 뇌에서 주도적으로 인식된다. 즉 단어항목이 존재하는가를 판단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처리가 한글단어는 좌뇌에서, 한자단어는 우뇌에서 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로'라는 표현에 주의하여야 한다. 한글의 정보처리가 좌뇌에서만 일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뇌에 존재하는 사전(심성어휘집(mental lexicon) 이라 부른다)은 왼쪽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글의 경우에는 바로 심성어휘집을 이용하여 단어의 의미 같은 정보를 인출해낼 수 있지만, 한자단어의 의미 같은 정보를 인출하기 위해서는 우뇌를 거쳐 좌뇌의 심성어휘집에 접속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실험결과는 문자가 말소리를 얼마나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느냐에 따라 뇌에서의 단어인식 방법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뇌 좌우 반구의 차이 외에도 여러 실험의 증거들이 문자가 말소리를 표현하는 정도에 의해 시각적인 단어인식과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인간의 뇌는 적어도 글읽기에 있어서는 문자의 언어학적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문자를 해독할 수 없어서 읽기를 수행하지 못하는 언어장애를 난독증(dyslexic)이라고 하는데, 위의 연구결과를 추론해보면, 한글 단어만 읽지 못하는 환자와 한자 단어만을 읽지 못하는 난독증환자가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필자와 공동연구자들은 이런 종류의 환자를 발견하였다.
 한 여성 난독증 환자는 고졸의 학력인데도 '土', '四'처럼 매우 쉬운 한자를 전혀 읽지 못하는 반면 한글문자로 쓰인 단어는 거의 완벽하게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직 대학교수인데 뇌졸중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난독증 증세를 가지게 된 한 남성환자는 한자단어는 어려운 것도 잘 읽고 이해하는데 한글단어는 거의 읽지 못했다.
 이런 연구결과는 문자와 말소리가 관련되어 있는 방법에 따라 단어인지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래의 뇌 사진은 한글단어를 인지할 때와 한자단어를 인지할 때 활동하는 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kbs 위기탈출넘버원>

 뇌 영상의 여러 영역과 관련된 기능을 제한된 지면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문자의 종류에 따라 활동하는 뇌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한글 단어가 인식되고 저장되는 뇌의 양상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쓴다. 예를 들어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를 어절이라 부른다. 각 어절은 '남교수가'에서처럼 몇 개의 단어 즉, '남교수'와 '가'로 구성되거나, '하였다'에서 '하', '였', '다'처럼 몇 개의 형태소로 구성된다.
 필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남교수가'처럼 명사로 구성된 어절은 뇌에 명사 따로 조사 따로 저장되어 있다. 반면에'하였다' 같은 동사어절은 '하였'+'다' 형태로 뇌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였'은 함께 저장되어 있고 '다'는 별도로 기억되어 있다. '남교수가'가 뇌에 저장되어 있는 구조는 일반적인 상식처럼 단어별로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였다'와 같은 동사어절의 경우에는 뇌 사전에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을까에 대해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서는 '하다'로 적혀 있지만 '하였다'가 '하다'에서 출원되었다는 지식이 없으면 국어사전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 지를 알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인지신경과학적인 실험결과를 토대로 필자가 얻은 결론은 '하'와 '였'은 함께 묶인 형태로 저장되어 있고, '하였다'의 마지막 부분인 '다'는 문장의 종류를 나타내는 부분인데, 이 형태소는 따로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다. 이런 저장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정보처리의 경제성(cognitive economy)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인간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최상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억용량은 최소로 유지하면서도 정보의 변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왔다. 만일 '하', '였', '다'를 별개로 저장하고 있으면 뇌의 기억용량을 최소로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하'와 같은 형태소가 어떤 뜻으로 저장된 것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하'가 '하다'의 동사어간일 수도 있고, '下', '夏', 등의 다양한 다른 뜻의 형태소일 수도 있다.
 반면에 '하였다'를 전체로 기억하고 있다면, '하다'라는 동사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하였고', '하였지만', '하였을', '하였는데'처럼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그 변형 모두를 별개의 항목으로 기억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기억해야 할 항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기억저장의 문제를 일으킨다.
 가장 이상적인 저장형태는 '하'가 가지는 여러 의미 중에 어느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으면서도 기억에는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였'은 하나로 저장하고 '다'는 따로 저장하는 경우에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을 이룰 수 있다. '하였'으로 저장되어 있으면, '하'는 '동사' 의미로만 사용이 가능하고 다른 의미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국어학적으로 볼 때 '였'처럼 가운데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10여 개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하'다음에 붙어서 변형을 만들 수 있는 가지 수가 많지 않다. 따라서 의미도 분명하게 할 수 있으며, 기억도 많이 필요하지 않는 이상적인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하였다'에서 '다'처럼 끝부분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50가지 이상이기 때문에 앞부분에 붙여서 기억하면 수많은 종류의 변형이 가능하고 이들 모두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을 준다. 따라서 기억의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붙여서 기억하는 것 보다는 분리해서 별도로 저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쓰며, 명사와 조사로 이루어진 어절은 명사 따로 조사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였다'와 '아름다워' 같은 동사와 형용사 어절은 뜻을 나타내는 앞부분의 형태소와 가운데에서 시제 등을 알려주는 형태소는 하나로 저장되어 있고,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등을 알려주거나 다음 어절과의 연결성을 알려주는 어절의 마지막 부분은 독립적으로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국어가 교착어이고 형태론이 잘 발달된 언어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한글문자가 표음적이면서 음절단위로 사용되는 특성과 위에 설명된 내용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필자의 실험실에서는 한글어절이 뇌에 저장되어 있는 부호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을 5년 동안 지속해왔다.
 첫 번째 연구주제는 위에서 말한 '하였'과 같은 어절의 일부분이 '하'와 '였'과 같은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 아니면 'ㅎ', 'ㅏ', 'ㅇ', 'ㅕ', 'ㅆ'처럼 자소 혹은 음소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는 국어어절이 음소, 자소, 혹은 형태소 등의 단위로 저장되어 있기보다는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교수는'과 '하였다' 같은 어절은 '남', '교', 혹은 '다'와 같은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결정적인 실험은 실어증환자(뇌출혈이나 뇌졸중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언어 사용에 장애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환자에게 사자 그림을 보여 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게 하는 과제를 요구하였는데, 흔히 명칭성 실어증으로 분류된 환자는 그림의 이름을 잘 말하지 못하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때의 짝 이름을 떠올리려고 할 때 얼굴이나 모습은 눈에 선한데 이름이 혀끝에 맴돌아서 잘 말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명칭성 실어증 환자에게 약 100여 개의 유치원생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그림을 보여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말하게 하면, 이 환자들은 50%도 넘게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환자들은 '그곳이', '그것이' 등의 지시어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발화한다.

 다음으로, 그들이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림들을 골라낸 후에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만일에 단어가 머리 속에 음소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ㅅ/로 시작하/아/로 끝나는 단어'라고 단서를 주는 경우에 이름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음소를 단서로 제공하는 경우에는 별 효용이 없었다. 그러나 "/사/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라고 음절단서를 제공하면 즉시 '사자'라고 말한다.
 신기한 사실은 "'자'로 끝나는 단어입니다"라고 할 때에는 말하지 못하다가 "'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하는 경우에는 잘 말한다는 것이다. 즉 단어를 뇌에서 찾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단어를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동등하게 찾아 들어가는 것이라면, 어떤 종류의 음절을 주든 관계없이 모두 그림 이름을 잘 떠올려야 한다. 그러나 환자는 왼쪽의 시작하는 음절을 제시해준 경우에 더 잘 말한다. 이런 결과는 '남교수' 혹은 '하였'과 같은 단어 혹은 어절의 일부분이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고, 음절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속 실험에서는 '하였다'의 '하' 음절이 철자음절인지 아니면 음운음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반란'이라는 단어는 철자음절로는 '반'으로 시작하지만, 음운음절로는 '/발/'로 시작한다. 언어심리학의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에게 '학교'라는 단어를 제시하면, 한 번에 바로 '학교'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첫 음절 부분에 의해 단어의 후보들이 뇌의 사전에서 활성화되고, 활성화된 후보들 중에 실제 제시된 단어와 같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단어가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뇌 사전에 국어단어나 어절의 일부가 철자음절 단위로 기억되어 있다면, 동일한 철자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에 경쟁이 있을 것이고, 음운음절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음운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의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험결과는 '반란'의 철자음절인 '반'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음운음절인 '/발/'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어휘경쟁이 일어났다. 즉 국어의 단어나 어절은 쓰인 모습대로의 철자음절로 저장되어 있지 않고 말소리로 읽을 때 생성되는, 또는 들을 때 사용하는 음운음절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설명도 위에서 적용하였던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뇌를 쓰는 한국인

 이어지는 실험에서는 이런 음운음절로 단어나 어절을 저장하고 있는 뇌 사전의 경우, 청각을 이용해 단어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것과 눈으로 보고 이해할 때 사용하는 사전이 각각 다른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인지를 조사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가 아마도 왜 한국인은 국어단어를 음운음절로 저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일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각으로 문장을 들을 때나 시각으로 동일한 문장을 읽을 때나 우리는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다. 이런 이유는 우리 뇌의 어느 부분에선가 청각으로 언어를 받아들이든 시각으로 수용하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문장을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의 실험에서 청각과 시각 문장처리 중 어느 단계에서 두 감각 간에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인지를 조사해본 결과,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미 청각과 시각이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문장을 청각으로 들을 때에도 단어나 어절을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음운음절로 분절하고 그 분절된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뇌에서 찾고, 시각으로 문장을 읽을 때에도 시각단어를 철자음절로 분절한 후에 분절된 철자음절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에서 그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찾는다.
 즉 시청각 자극을 받아들인 후에 청각이나 시각 모두는 자극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의 단어를 찾는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뇌에 존재하는 사전은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전은 말소리 정보에 기초하여 단어를 저장하고 있는 사전인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언어를 처음 배우는 것은 말소리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읽기를 배우기 전에도 어린아이는 이미 말소리로 된 사전을 뇌 속에 지니고 있다. 읽기를 시작하면 우리나라의 아동은 말소리가 투명하게 표현된 한글문자를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말소리로 전환하는 과정을 학습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동은 문자로 표현된 단어를 만나게 되면 먼저 철자음절로 분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 후에는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간의 관련성을 배우고, 그리고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과의 연관성을 적용하여 글 읽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의 아동은 읽기에 사용될 사전을 별도로 뇌 속에 새롭게 구성하는 것보다는 이전에 말소리로 이미 만들어 놓은 사전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읽기를 배우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제시된 단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영어처럼 철자가 음소를 투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들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과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이 별도로 존재한다. 한글을 창제하신 분들은 문자의 제자법이 이렇게까지 단어를 인지하고 저장하는 방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후세들이 한글문자의 표음적 특성과 뇌 활동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것이다.

 이제까지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과, 글 읽기와 단어인식에 대한 과정을 논의하면서 한글이야말로 매우 과학적으로 말소리를 직접 담아낸 가장 진보한 문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읽기학습과정과 배운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 본 결과, 한글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독특하고 효율적인 정보처리가 일어난다는 근거들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유산인 한글을 더욱 갈고 닦으며, 인식과 생성의 원리를 찾는 연구를 계속해 자랑스러운 우리 문자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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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세미예 | 2009.01.20 11:52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 글이네요. 한글의 좋은 점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한글을 후손인 우리들이 잘 지키고 계승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봤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09.01.21 16:06 신고 | PERMALINK | EDIT/DEL
네. 한글의 보존과 계승에 대해 각자 깊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온한글이 그런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세미예님의 방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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