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BLOG main image

온한글 전체보기 (655)
한글, 새로운 시선 (164)
온한글이 만난 사람 (52)
한글 행사와 모임 (54)
한글이 있는 작품 (64)
폰트 (41)
캘리그래피와 손글씨 (13)
트렌드와 마케팅 (46)
역사 속 한글 (19)
세계 속 한글 (40)
온한글 책꽂이 (44)
한글 관련 자료실 (27)
무료다운로드 (15)
단신 (74)
douglas pitassi
douglas pitassi
Clash of Clans Hack
Clash of Clans Hack
Related Web Page
Related Web Page
kitchen table
kitchen table
http://healthdrugpdf.com
http://healthdrugpdf.com
http://www.161997up.com
http://www.161997up.com
CT
CT
http://pharmacyreviewer2014.com
http://pharmacyreviewer2014.com
UT
UT
Laura Glading APFA
Laura Glading APFA
1,373,794 Visitors up to today!
Today 20 hit, Yesterday 223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용비어천가'에 해당되는 글 4건
2011. 12. 21. 09:59


한국 고전 문학 작품과 모던 재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르가 서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앙상블을 이룹니다. 이렇게 우리 전통의 시에 재즈 음악을 입혀 재탄생시킨 재즈 밴드가 있습니다.

재즈 보컬 임미성이 주축인 '임미성 퀸텟(Lim Mi Sung Quintet)'이 바로 그들입니다. 벌써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고 하네요. 특히 1집 '바리공주(Princess Bari)'는 고전 설화가 재즈와 만났다는 컨셉으로 인하여 세간에 주목을 받았던 앨범이었어요.

잘 알다시피, 바리공주는 우리나라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신화 속 인물입니다. 버려진 아이, 바리데기가 운명을 극복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부모를 구했다는 이야기죠. 

사진출처 : CJ E&M / www.mnet.com

임미성 퀸텟은 2009년 고대가요와 시조를 담은 1집 '바리공주'에 이어 최근 발표한 2집 '용비어천가'에서도 고시조를 노랫말로 한 재즈곡들을 선보였어요. 앨범에 실린 곡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위보
2. 한송정
3. 한산도
4. 사청사우
5. 모죽지랑가
6. 가시리
7. 이상곡
8. 용비어천가

사진출처 : CJ E&M / www.mnet.com

앨범 속에서는 신라 화랑 득오의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세종 때 천재시인 김시습의 시 '사청사우(乍晴乍雨)', 이순신의 시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등 고시조들이 재즈 선율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고려가요 '이상곡(履霜曲)'의 후렴구 '다롱디리 디우셔'는 스캣(가사 대신 뜻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요.

특히, 보컬인 임미성 씨의 아주 독특한 음색은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혀 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이채로운 음의 진행과 보컬이 때론 흐느끼듯이 처량하고 구슬프게, 구음처럼 들리기도 해요.

사실 그녀는 동덕여대 음악교육과에서 성악을 전공한 클래식 음악학도였답니다. 그러나 2003년 프랑스 파리 재즈학교 'BEPA(빌 에반스 피아노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고, 2004년 파리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허성우 씨를 만나 임미성 퀸텟을 결성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2008년 프랑스 재즈 페스티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뮤지션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 재즈보컬리스트, 임미성 / 레이디경향 2009년 9월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0909111121531&pt=nv
 
임미성 씨는 2집에 대해서 "고시조의 운율은 재즈와 의외로 잘 맞아떨어졌다"라며 "가끔 국악 재즈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한국적인 재즈라 설명할 수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또한 “제위보(濟危寶)' '한송정(寒松亭)' 등 한자로 된 시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한역본을 참고해 한글로 풀이된 가사를 썼다”라고 설명하네요.

타이틀곡 '용비어천가'에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란 노랫말이 흥겨운 재즈 선율에 담겼네요. 이밖에도 수록곡들은 한국적인 정서로 가득하답니다.

이외에도 앨범에는 신라 화랑의 애틋한 우정을 그린 '모죽지랑가', 전쟁터에 나간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긴 '이상곡', 강릉 경포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한송정', 왜군과의 결전을 앞둔 밤, 밤바다를 나는 기러기 떼에 장수의 고독을 이입한 '한산도야음', 김시습이 권력에 야합한 간신들을 조롱한 '사청사우' 등으로, 고전 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우리 전통 가요와 고시조의 정서를 재즈의 음률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을 작업일 텐데요, 앨범을 들어보면 그렇게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소설과 드라마로써 [뿌리 깊은 나무]에 열광했다면, 새롭게 재즈로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사진 및 자료출처

연합뉴스 / www.yonhapnews.co.kr
경향신문 / kyunghyang.com
레이디경향 2009년 9월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0909111121531&pt=nv
CJ E&M / www.mnet.com

 

온한글 블로그기자단 3기 배윤정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9. 3. 6. 13:2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날 어떤 언어생활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글이 없었을 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문자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고유문자가 없는 언어들이 어떤 문자를 채택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순수하게 한문을 사용했거나 한문에 한자로 토를 달았거나 향가에서 보는 것처럼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었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역시 조상들의 방법으로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문자가 없는 다른 언어의 경우처럼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등은 자신들의 언어를 적을 때에 로마자를 쓴다. 베트남어의 경우는 성조가 복잡하여 로마자에다 점과 기호 등을 부가해서 표기하는데, 로마자를 쓴다는 점에서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등과 다를 바 없다.

 그밖에 터키어, 스와힐리어, 소말리아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로마자를 문자로 사용한다. 우리도 이들처럼 문자 생활을 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어요’라고 적는 대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을 것이다.


 naneun jigeum pyeonjireul sseugo isseoyo.

 중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문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저명한 문인인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면서 한자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한자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대신 간화자로 크게 바뀌었으며 한어병음이라 하여 로마자가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편리한 언어생활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편리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문화적 자부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문자 일반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는 여러 문자가 있지만 언어의 수만큼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살아 있는 언어는 5천 내지 6천 개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들 중에는 문자가 없는 언어도 꽤 있으며 문자가 있는 언어들 중에도 실제 사용되는 문자는 백 개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의 공용어로 쓰이는 언어를 적는 문자는 30개 정도에 불과하다. 언어에도 사멸한 것이 있듯이 문자도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문자들 가운데 특정 시기에 특정인이 ‘만든’ 문자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들은 대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 차츰 진화해 왔거나, 다른 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창제’라는 말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다른 문자들 중에도 일부 만든 이가 뚜렷이 기록되고 인정된 경우가 있기는 하다. 410년에 아르메니아어 문자를 만든 아르메니아의 메스로브(Mesrob), 1283년에 태국문자를 만든 태국의 람캄행 대왕 등이 그들이다(타이문자는 캄보디아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다).

 이런 극히 일부의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자는 어떤 특정 시기에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서서히 조금씩 변형되며 형성되었다. 그래서 창제자를 말할 수 없다. 한글은 이에 반해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의 하나인 세종실록은 한글이 1443년에 만들어졌고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친히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지은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부터 왕자와 공주를 시켜 만들었다는 주장, 혹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을 리가 없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시켜서 만들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한글을 누가 만들었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은 세종실록 권102 세종 25년 계해 12월조 말미의 다음 구절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기록이 이러함에도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종대왕이 직접 단독으로 한글을 만들지 않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을 거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사에 바쁜 임금이 홀로 새로운 문자 체계를 고안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추정은 어디까지 추정일 뿐 기록상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상의 근거를 놓고 보면 실록에 ‘친제(親制)’가 명기되어 있는 만큼 직접 창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친제했다고 보더라도 이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몇 년만에 완성된 것인지,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 누구와 상의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된 지 3년만인 1446년에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간행되었다. 훈민정음해례는 새 문자에 대한 이론적 해설서이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문자 창제와 동시에 그 문자에 대해 해설한 책이 쓰인 경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집현전 학사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서 저술한 것이다(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고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배제했다가 해설서의 집필만 맡겼으리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기보다는 집현전의 학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부려서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 홀로 한글을 만들었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든 세종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새로운 문자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지만, 세종은 최만리를 크게 꾸짖으면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최만리는 세종 26년인 1444년 2월 상소문을 올려 새 문자를 만드는 데 반대했다.).

 그럼, 세종대왕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을까? 이는 ‘훈민정음해례’의 어제서문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서 어리석은 백성들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 생각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든다고 했다.

 과연 한문으로 우리말을 적기란 대단히 불편해서 양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이 문자생활을 하지 못하는 문맹상태인 것을 안타깝게 여겨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애민정신은 이미 ‘삼강행실도’를 만든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함으로써 풍속을 교화하려 한 것이다. 세종 13년인 1431년 한문본으로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후일 성종 12년인 1481년에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훈민정음해례’가 간행되고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이 바로 간행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석보상절>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돌아가신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님의 일대기를 서술한 것이다.

또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필요성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국 한자음을 통일할 필요성과 아울러 우리 한자음의 통일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데 한자음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소리글자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리글자로써 한자 하나하나에 대한 발음 표시를 해 두어야만 한자음이 통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 <동국정운>을 저술케 했고 중국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서는 <홍무정운역훈>을 저술케 했다.

 세종대왕은 당시 언어생활에 필수불가결했던 한자의 발음 통일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한자음은 매우 안정된 상태로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아무튼 세종대왕은 언어의 통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어떻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그가 기대하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에서는 편지를 한글로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고 16세기 이르러서는 한글소설이 저술되고 유통, 보급되기 시작했다. 관공서의 공식문서는 여전히 한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편지나 소설류 등에서 한글이 사용됨으로써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문학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해류가 만들어져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 내용을 접해보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15세기에 한글로써 간행된 문헌만 해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두시언해’ ‘악학궤범’과 같은 시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원각경언해>와 같은 불교 관련 문헌, <내훈>, <삼강행실도> 은 교화 용 문헌, <구급방언해>와 같은 의약 관련 문헌, <금양잡록> 등의 농사 관련 문헌,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어학 관련 문헌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글의 창제에 대한 이설에 대해 살펴보자. 한글이 고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가림토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하는 <한단고기(또는 환단고기)>의 기술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한단고기> 자체가 매우 의구스러운 문헌인데다 정말 고조선시대에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면 왜 그 이후에 사용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에서 쓰였던 ‘신대문자’를 본떠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신대문자’가 한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9. 2. 26. 10:1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 서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990년대에 들어와 활성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서체의 분류나 명칭에 대한 견해는 각양각색이어서 서체연구에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선행연구들이 각각의 기준을 바탕으로 서체를 분류한 것에 의하면 모필과 관련된 서체용어만도 40여 종1)이나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에 생산된 서체가 그만큼 복잡다단함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체란 일정한 시기에 통용되면서 사회성을 확립하여 '정형화'될 때 한 유형으로 인정되는 바, 서체 분류에 있어 일정한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한글 서체 연구는 주로 글자 기계화와 관련하여 글자체 개발을 위해 이루어져 왔으며 조선시대 서체에 대한 연구는 그나마 서예술적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한글 서체의 분류 및 그 명칭들이 서예술적 요소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 보다 본질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령 어떤 합리적인 기준이 미비한 채 단순히 선행연구의 것들을 적절히 절충한 명칭으로 분류하는 단편성 등이 그것이다.

 물론 각 연구자마다 서체의 분류 명칭이 다른 점은 조선시대에 출현한 한글 자형이 그만큼 복잡해서 일정한기준을 두고 유형화하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다행인 것은 선행 연구자들의 서체분류의 바탕을 살펴보면 서체를 대략 세 가지 군으로 유형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문자의 시원을 보인, 직선, 둥근 원, 둥근 점으로써 정방형으로 이룬 글자체군,
 둘째, 붓글씨로 썼을 때 나타나는 필서의 기운이 있는 것으로서 필사본의 글씨체나 활자본, 판각본에 나타난 글자체군,
 셋째, 이 붓글씨체 중 노봉으로 기필하여 오른쪽 흐름 축을 맞추어 독특하게 구성된 서체군 그것들이다.




1.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형성요인

 한글은 종래 한자를 빌려 쓰던 틀을 완전히 깨고 우리말에 맞도록 창제된 소리글자라는 점에서 발생학적인 특수성을 갖는다. 우선 글자의 자형과 글자가 가지는 음가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정형화된 글꼴을 제시해야 글자를 이해하는 데 혼란이 없을 터인즉, 창제 당시를 보면 나름대로 글자의 도안적 성격과 아울러 기본 글꼴로서의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서체의 대강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글자보급과 관련된 특수성이다. 이 또한 한글이 창제 글자라는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곧, 창제된 글자를 언중에게 최단기간에 보급하기 위해 당시 어떤 방편을 강구했을까 하는 문제인데, 현전하는 당시의 자료가 주로 판본이나 활자본인 점을 고려하면 판각이나 활자에 의해 다량의 서책을 찍어내는 방법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서체연구에 있어서 판본이나 활자본, 필사본을 그 목적에 따라 나누어 연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판본과 활자본도 결국 필사한 서체를 모사한 것이기 때문에 간본에 의거해 서체를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 초기에 도안된 서체와 그 뒤 붓글씨 형태의 서사적 글꼴이 주를 이루는 시기가 서체분류에 있어 큰 분수령이 되므로, 서사형태나 방법에 의해 서체를 나누는 것이 좀 더 변별성과 객관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낱자의 ‘모아쓰기’ 로 하는 문자생활도 또 하나의 특수성이다. 한글은 소리글자로 창제되었는데 실제 문자생활에서는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를 합자하여 한 음절에 하나의 합자형이 대응되도록 했으므로 서체연구는 합자형과 관련하여 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당시 서사도구가 ‘붓’ 이었다는 점도 서체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사도구의 변천은 단순하다. 개화기 이전까지의 자료는 판본이나 활자본, 또는 필사본으로 남아있는데, 이들은 붓글씨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나 ‘펜’ 종류가 유입됨으로써 붓과 펜이 혼용된 것으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한글 서체에 대한 연구는 붓으로기록된 자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분류기준
 
 앞서 지적한 바에 근거해 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분류 기준이 되는 자질로 ‘전형성’ ‘중앙축성’ ‘기필의 노봉성’을 들고자 한다.

2-1. 전형성
 전형성은 글자로서 보편성을 확보하기까지 글자의 전범으로 주어지는 특성으로 글자 창제 때 나타나는 특성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당시에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층은 한자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서, 읽기나 쓰기가 꽤 자유로워 한자의 필기엔 대단히 능숙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여, 그것을 지배층 뿐 아니라 일반에게까지 보급하기 위해서는 자형을 쓰기 위주 보다는 읽기 위주로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2) 또 시각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엄격히 제한된 도안적인 형식을 구사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고딕체 모양의 글자 형태가 나왔을 것이며 바로 그 점에 전형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제 후 간행된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동국정운」등에서의 자형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전형성을 가진 형태로 나타난 점은 바로 ‘읽기 위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자는 필서의 맛이 없이 직선적이면서 모가 나고 원은 완전히 둥근 형태여서 판각이나 활자로 사용하기에는 적당했을지라도 당시의 주 필기도구였던 붓으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형태였다.
  아래 <그림 1>을 보면 창제 글자로서의 전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략 세 가지 원칙이 부여된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서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끝과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었다.
 둘째, 글자의 획은 직선과 둥근 원만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시각성을 강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보여지듯이 한글과 한자를 동일한 면에 함께 사용했음에도, 한자의 해서나 행서와는 전혀 다른 고딕체 형태의 한글을 사용한 것은 시각적으로 현저함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후 「훈민정음 언해본」에 오게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전형성이 다소 약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 2>에서 그 변화를 비교해볼 수 있다.



 위를 비교해 보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정방형의 직선적인 글꼴이던 것이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붓글씨체 느낌으로 완성됨을 볼 수 있으며, 우선 중성자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기 시작하여 정방형을 벗어남과 동시에, 획 간 공간 조절이 강조되어 조형성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평이던 가로 서선이 오른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쓰기가 중심이 되는 이른바 궁체에 오게 되면 <그림 3>에서와 같이 한글 창제 당시의 전형성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아래의 <그림 4>는 이러한 전형성의 변화를 해례본의 서체에서부터 궁체 흘림체까지의 흐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2-2. 중앙축성

 다음 기준은 모아쓰기 방식으로 운필함에 특정한 순서가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글자 구성의 축을 어떻게 잡았느냐 하는 것이다.

 운필 시 흐름의 축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각 서체별 특징이 나타나는데, 해례본에서는 정방형 틀에 모아쓰기 하는 한글의 제자원리에 따라 자소를 직선, 둥근 원, 둥근 점만으로 구성하되 획의 연결성은 전혀 없으면서 앞선 자소의 좌우 혹은 상하의 중앙부분에 다음 자소를 위치시키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획의 순서와 관계 없을 뿐 아니라 획의 모양에도 변화가 없고, 오직 흐름의 무게를 두는 흐름축이 글자 가운데에 있는 이러한 특징을 바로 ‘중앙축성(中央軸性)’형이라 한다.


 <그림 5>와 <그림 6>은 모아쓰기를 함에 있어 ‘ㅡ, ㅗ, ㅜ, ㆍ’와 어울리는 글자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축성이 중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3)
 <그림 6>은 모아쓰기를 하여 글자를 구성할 때는 구성의 차례를 좇아 각 자소 위치는 반드시 앞 구조의 중앙에 배치됨을 보인 것이며,〈그림 7〉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등에서 볼 수 있는 중앙축성의 실례들이다.



 이러한 중앙축성은 「훈민정음 언해본」에 오면 다소 변형된다.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방형 서체구성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차츰 필서의 맛이 나는 서체로 바뀌게 되면서 다음 획으로 향하는 필의를 살려 씀에 따라 글자 모양도 변형되고, 조형성까지 갖추는 등 다양하게 써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른쪽 세로획을 중심으로 한 오른쪽 종렬 축의 서체가 된 것이 아니고, 한자의 행서나 해서의 필서와 같이 글자의 중앙에 흐름의 축을 싣고 있다. 특히 국한문 혼용을 많이 사용하게 됨으로써 한글도 그 흐름 축이 한자와 같이 중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구성했다.



 다음의〈그림 8〉과〈그림 9〉를 보면 글자의 중앙을 흐름의 축으로 하여, 좌우 같은 비율로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와 다르다.




      

 궁체 단계에서는 위의〈그림 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종성자의 오른쪽 끝과 우측 중성자의 맨 오른쪽 세로획에 흐름의 축을 두고 맞추어 쓰도록 구성, 초·중·종성자 모두 종렬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또한 우측 중성자는 더욱 길게 늘어나고 우측 중성자나 종성자의 세로획은 반드시 끝을 뽑아서 아래에 있는 다음 획으로 향하게 한다. 즉, 궁체에는 글씨의 흐름을 오른쪽 흐름 축에 정확히 맞추어 쓰는 서체적 특징이 있다.

 이상을 바탕으로 글자의 축성을 개념도로 보이면 <그림11> 과 같다.



2-3. 기필의 노봉성
 다음 분류 기준으로는, 서체에 작용하는 것이 필법이며 조선시대의 서사도구가 붓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필의 노봉성(露鋒性)4)’을 들 수 있다.

 획의 기필(입필)에 있어 역입 여부에 따라 각 서체의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는 획이 곧은 직선이나 둥근 원이면서 시작의 머리 모양이 한자의 전서처럼 둥글거나 막대 모양으로 뭉툭하게 된 것이 특징이다. 붓끝을 감추지 않으면 획의 시작 머리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 필봉의 이치다.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는 기필할 때 반드시 역입하여 필봉을 감추어 장봉으로 휘필하는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판각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편리한 쪽으로 생각하여 디자인하거나 판각기술로 다듬었을 것이나, 만일 붓으로 한자의 전서처럼 획을 쓴다면 기필에서 반드시 역입, 장봉하여 서사해야 필봉의 뾰족한 맛을 감출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글꼴은 한자 해서의 필획과 닮은 점이 많다. 다음의〈그림 12〉에서 보다시피 가로 세로획은 마제잠두(馬蹄蠶頭) 형으로, 기필에서 송필을 거쳐 '수필' 에서는 회봉함으로써 필압에 따라 서선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난다. 이는 당시 한자 필서에 익숙했던 식자층들이 필서를 하다 보니 한자 획과 닮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많아지게 된 것으로, 한자 해서를 서사할 때 기필을 역입하여 장봉하는 운필법을 따랐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궁체는 앞의 해례본체와는 달리 기필을 역입하지 않고노봉으로 서사했다는 점이 방법상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아래〈그림 13〉과 같이 봉이 겉으로 드러나(노봉) 날렵한 맛이 나며 주로 작은 글씨에 많이 썼다.

 이 궁체는 궁중 여성들에 의해 많이 필서되었으며 획의 시작과 대부분의 끝 획에서 필봉이 겉으로 드러남으로써 그 미세한 변화를 엿볼 수 있으며 단아하면서도 활달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는 운필상 방필에 의한 서체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조선시대의 서체를 전형성, 중앙축성, 기필의 노봉성을 자질로 들어 분류해 보았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표 1〉에 따르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는 읽기 위주의 서체이며 중앙 흐름 축을 가진 서체로 운필상 역입하여 장봉하고, 「훈민정음 언해본」의 글씨체는 쓰기 위주의 서체로서 초기에는 중앙 흐름 축 중심으로 쓰다가 점차 오른쪽으로 흐름 축이 이동하는데 운필상으로는 역입하며, 궁체는 쓰기 위주이나 우측에 흐름 축을 형성하며 기필 시 역입하지 않고 반드시 노봉으로 시작한다.


3.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유형과 명칭

 위의 분류기준에 따라 조선시대의 한글 서체를 ① 훈민정음 해례본체(줄여서 해례본체), ② 훈민정음 언해본체(줄여서 언해본체), ③ 궁중서체(줄여서 궁체) 등으로 3대분할 수 있다. 이렇게 명명한 것은, 서체적 특징을 정형화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그 형성범위가 넓으면서 내용은 객관적이되 고유한 성격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전제되었을 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명칭을 붙인 좀 더 구체적인 이유5)는 다음과 같다.

 1) ‘해례본체’는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처음으로 목판으로 나온다. 여기에 사용된 글자는 자·모의 모아쓰기 형태로서 자형은 바른네모꼴이다. 서선이 곧고 획의 굵기가 일정한 것이 마치 그려서 디자인한 모양으로 붓글씨 맛은 없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글자가 목판에 새겨지면서 붓의 맛보다는 칼의 느낌이 강하고, 시각적으로는 창제 글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로 강하고 뚜렷한 글자형을 나타내고 있다. 획은 직선과, 완전 둥근 원, 그리고 둥근 점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뒤에 나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에 사용된 글자형들도 다 이 체로 분류할 수 있다.

 2) ‘언해본체’ 해례본체와는 달리 당시의 서사용구인 붓의 특징을 잘 살려서 쓴 서체이다. 붓으로 쓴 육필이나 혹은 육필을 모본(등재본)으로 하여 판각한 판본이나 활자본에 나타난 붓글씨체로서 후에 나온 궁체를 제외한 모든 한글 붓글씨체는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글씨와 같은 유형이므로 ‘언해본체’로 분류할 수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월인석보」전후의 ‘세종어제 훈민정음’만을 따로 제책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훈민정음 국역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세종의 어지와 예의 부분만 언해했는데, 처음에는 해례본의 이름과 같은 「훈민정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세종 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조 때 간행되어 나오면서 제목을 고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훈민정음」에 없는 치두, 정치에 관한 규정이 추가되어 있으며 해례본 간행 직후 1년 이내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원간본은 1459년 세조 4년에 간행되었지만,「석보상절」의 권두에도 실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어제 훈민정음’을 새로 넣었다기보다는 1447년 간행된 「석보상절」의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언해는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의 반포 이후 1447년 「석보상절」의 간행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판각된 서체는 판의 체제나 서체로 볼 때 한문필서에 익숙한 사람의 글씨를 등재본으로 하여 ‘세종어제’란 4자를 추가하고 앞 부분의 넉 줄을 개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필획을 보면 기필, 송필, 수필의 기맥이 뚜렷하고, 가로획 서선은 오른손 쓰기에 의해 오른쪽으로 어깨가 차츰 올라가고 있다. 또한 서사하는 순서에 의해서 초·중·종성자가 놓이는 위치와 모양이 다르게 변하고, 획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의 서체적 특징이 있어 획간과 자간의 연결과 흐름은 물론 필서로서의 속도감이 뚜렷해 보이는 붓글씨체이다.

 3) ‘궁체’ 오직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서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궁중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창안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궁체로 된 것은 앞선 다른 서체와는 달리 최초의 간본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서체가 완전한 필법과 결구로 자형이 정립되어 정형화하기까지는 많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그 특징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최초나 대표적인 간본 자료의 이름을 쓰지만, ‘궁체’만은 서체가 창안된 특수한 환경적 요인과 배경을 중시하여 명명한 것이다. 즉 궁중이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여성이라는 신분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창안된 서체인 것이다.

 궁체는 붓으로 필서함으로써 붓글씨의 흐름과 특징이 확연한 것으로, 필법에 따른 자형과 결구 등이 한자 필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서체인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체와는 다른 독특한 서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자를 써 오던 습관으로 서사된 획과는 완전히 다른 서체로서, 초성자와 중성자에는 일정한 '서법적' 기
준이 있고 글자의 조형성과 정형화된 형태적 틀을 갖춘 정제된 서체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미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서체라 할 수 있다.
 
 글씨는 특정 서체를 범본으로 하여 연마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자 서체의 흐름을 ‘전서-예서-초서-해서-행서’로 보되 이를 발전순서 보다는 출현이나 분화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듯이, 궁체도 특수한 여건에서 출현한 것이지 범본이 있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글 서체의 유형을 위와 같이 해례본체, 언해본체, 궁체등으로 대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유형의 특성을 가지면서 한 자 한 자, 한 획 한 획을 연결 없이 또박또박하게 표현한 것은 ‘정자’로, 획과 획의 붓길(필의)에 따른 연결과 글자간의 연결과 흐름을 살린 서체는 ‘흘림’으로, 글자간의 연결이 있으면서도 획은 축약으로 변형되는 등 글자형은 물론 연결 정도가 커서 어떤 것은 마치 암호처럼 사용된 것도 있는 서체는 ‘진흘림’으로 하위분류하면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표 2〉에 대응하는 각 서체의 보기는 다음〈그림 14〉<그림 15>, <그림 16>에서 찾을 수 있다.
 










1) 홍윤표, 2004, 「한글 서예 서체의 명칭」, 서예학술대회 발표 요지,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서예문화연구소, 1~13쪽
2) 김성계, 2002, 「훈민정음에 나타난 글꼴의 형성원인」, 비닥디자인 저널 통권 1호, 한국시각디자인협회
3)해례 초성해 ‘ 與   而爲  之類’ 에서 보이는 ‘  ’ 모양 을 초성자가 없음에도 초성자 자리를 비워 ‘   ’ 으로
쓰지 않고 굳이 중성자를 글자의 중앙에 배열한 것은 창제자가 글자의 축을 중심에 두고자 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4)기필(起筆)이란 처음 붓을 대어 쓰기 시작하면서 붓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시작하는 운필의 한 형태이며, 노봉(露鋒)이란 획의 시작과 끝에서 뾰족한 붓의 끝(필봉)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 운필의 한 형태이다.
5) 동·식물 분류 체계나 성씨 형성 체계를 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써 형태적 혹은 본질적 특성을 따거나, 최초의 시원을 나타내는 지명, 조상 이름 등을 따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글 문자와 관계되는 명칭 문제는 관련 학문 분야에서 이미 통용되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hangulsalang | 2010.08.11 05:0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그림이 뜨지 않는데 다시 링크 걸어주실수 있나요?
BlogIcon 온한글 | 2010.08.13 09: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hangulsalang님 안녕하세요.
우선 http://onhangeul.com/30043633020
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사진은 곧 다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9. 2. 11. 16:14

사용자 삽입 이미지


1.한글 창제 반대의 이유

 세종 25년 1443년 12월 한글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기뻐서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은 실제로 거의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술원 부원장에 해당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선두로 그 학사 일당 7명이 한글 창제 후 두 달째인 세종 26년 1444년 2월 대왕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문을 직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장하기를, 만약 쉬운 한글이 시행되면 어려운 한문은 학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문 제 3항을 보면 ‘쉬운 한글만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하게 된다면 왜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구하겠나이까?’ 하는 반론이 그 핵심이었다.1)

 그들은 또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선진국 중국과 같은 수준인데, 그 학문을 버린다면 스스로 야만인이 돼 문명의 큰 누가 아니겠느냐?’며 반론을 펴기도 했다.2) 그렇다면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눈에 나라를 쇠망으로 이끌려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리학은 춘추시대의 학자 공자(孔子, 552~479 B.C.)의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을 말하는 것으로 유학 중에서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우리 조선시대로서는 이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추구했던 유일의 선진 학문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그 절대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한문을 어렵다고 익히지 않는다면 후진국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굳이 강행하는 한글 창제를 보고 당시 식자층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더욱이 당대의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는 최만리로서는 그 선봉에 있는 것이 충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그들을 썩은 선비라고 비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世宗과 같은 가장 偉大한 明君이 出現한 한편에는, 이 崔萬理 따위와 같은 固陋하고 腐敗한 低能兒도 出現되었던 것입니다. 『慕華丸』에 中毒된 『假明人』의 醜態요 發狂이라고 보아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마는, 歷史上에 永久히 씻어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지』3)를 끼치어놓게 됨은, 그를 爲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읍니다. 그러하나 그와 같은 病症은 이제도 오히려 遺傳됨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金允經, 「朝鮮文字와 文字史」,1938, 86면)

이는 事大慕華의 精神에 위반하여…頑强히 이를 반대한 몇몇 漢化主義에 中毒된 臣下들이 있었으니, 그는 곧 副提學 崔萬理를 先鋒으로 하여,…따위이었다. 世宗大王은 이 事理를 모르는 愚頑한 反對를 抑制하기 爲하여, 이 反對者들을 모두 義禁府에 내리사…. (최현배, 「한글의 바른 길」, 1937, 4면)


 반대로 어려운 한문을 배우지 않고도 선진 학문의 추구가 쉬운 한글만으로 족하다고 했다면, 아첨을 일삼는 썩은 문신이었을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 선진 외국들의 언어를 어려워도 기피하지 않고 반드시 힘써 배워야 하는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2. 한글의 위상에 대한 오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대왕은 이 반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던가?
 첫째, 세종은 본인 역시 같은 지식층으로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과 같은 생각에 대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한글 창제에 대한 오해를 염려하고 처음부터 비밀리에 사업을 결행하였을 것이다.

 세종의 의식이 얼마나 사대숭한(事大崇漢)으로 무장되어 있었는지는 당시 기록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다. ‘사대는 당연히 정성으로 하라’(세종 8년) ‘유교 경서를 연구하라’(세종 15년) ‘모든 학문의 길은 경학이 근본’(세종 18년) ‘양국의 동맹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는 것이므로 정답게 지극히 하라’(세종 13년) 등을 명했던 것이다.4)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당시 식자층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 항(崔恒, 1409~1474)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세종 16년 1434년에 그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자, 세종이 첫째로 발탁해 집현전 부수찬(副修撰)과 궁중의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으로 등용하고, 임금 가까이서 한글 창제를 담당케 했다.5)신숙주의 「保閒齋集」任元濬序에도 ‘世宗創製諺文, 開局禁中, 親揀名儒.’라 하고 그 사실을 천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야담으로 미화된 점인데, 약 2백 년이나 흐른 뒤인 1621년 「어우야담」중 ‘황룡 현몽과 세종 16년 알성장원’이라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1434년 세종대왕이 인재를 뽑기 위해 알성시를 공포한 뒤 시험 전날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낮잠 중에 과장인 성균관 대성전 서편 잣나무에 큰 황룡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놀라 내관을 보내 보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항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응시자는 이 장원백(壯元栢)에서 낮잠 자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柳夢寅, 「於于野談」권 2)

 유몽인(1559~1623)에 의하여 서술된 이 설화에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의 뜻을 받들어 한글 창제를 주관하고 완성한다는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한글 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태허정(太虛亭) 최항의 세종 16년 알성급제를 이렇게 설화화한 것은 그만큼 성스러운 대역사를 완수해야 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둘째, 한글 창제는 한문을 대신할 국자(國字)의 창제가 아니라, 표기수단이 없는 하류 서민층에게 쉬운 문자를 새로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의 글자는 상류층의 한문, 중류층의 이두문에 이어 하류층을 위한 한글이 추가된 3중 체계로 변화되었다. 10년에 걸친 대역사를 세종 25년 1443년 12월에 완성하면서, 세종은 「訓民正音例義」어제(御題) 서언에서 우민 즉 무식한 서민층에게 쉽게 익혀 일상생활의 기록을 위한 문자로 편하게 사용하라고 공표했다. 이는 애초부터 지식층의 반발을 전제하고 한글의 사용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한 것이었다.6)

 그런데 이렇게 미리 그 대상을 밝혔음에도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일파가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그들을 불러 한두 가지 질문을 하고 이튿날 석방했다.7)

 필경 세종은 저들의 문물 후진화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간취하고 벌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은 이후 재발하지 않았다. 당시 청백리로 알려져 있던 최만리를 필두로 한 그들의 반대는 충심에서 비롯된 염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군신이 같은 지식인으로서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세종의 신문자 행용 정책은 강행되었고, 한자음 표준화를 위한 문서 번역과 신문자 보급을 위한 해설서 편찬, 서민들에게도 읽히기 위한 악장(樂章) 「용비어천가」창작 등으로 급물살을 탔다.

 이렇게 해서 인공문자 한글의 창제가 거둔 성공은 세종 27년 1445년 「용비어천가」 가사 번역, 1447년 「석보상절」서술과 「월인천강지곡」창작 등으로 확인된다. 그 성공의 비결은 표기할 대상어에 대한 정확한 음운 분석, 음운 식별이 완전히 가능한 자소(字素)의 완비였다. 이 성공은 당시 언어학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명시해주는 실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오늘날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해 국자 창제와 한글 전용 혹은 민족자주정신과 한자 폐지 등으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그렇게 위조하지 않고도 그의 독창적인 창조성과 진취성에 대해서만 천명해도 충분할 터인데, 오늘날의 시류에 맞추어 과하게 해석하는 것은 자칫 교훈은커녕 반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3.우리말의 역사상 한글이 갖는 한계

 역사상 문자로서는 당초에 한자만 쓰였다. 당시 한자는 우리말에 적용한 차자표기의 개발로 한문 원래의 한자와 이두, 향찰 등의 차용 한자로 용법상 양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2중체계는 15세기에 이르러 한글이 추가됨으로써 3중체계로 복잡해져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다가 다시 2중체계로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면서 한글이 비로소 격상되지만, 그것은 순국문에 한문 번역,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병기하는 것이었지 독립적인 순국문은 아니었다.8)

 순국문이 아닐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해독상의 의미 불명, 오독 때문이었다. 기록을 보면 한글 전용을 선도했던 주시경(1876~1914)조차 ‘한문 아는 사람도 한글로만 쓴 글은 10중 7~8은 모르니, 차라리 한자로나 쓰면 한문 아는 사람이나 시원히 뜻을 알 것이라’고 동음어 문제를 지탄한 바 있다.9)

  1945년 광복 후 팽배해온 ‘한글전용주의’에 대한 반론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7할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들을 순한글로 표기는 할 수 있어도 동음이의어가 많은 까닭에 그 내용의 판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력상의 어려움 때문에라도 오늘날 많은 한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한글전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世宗實錄」권 103, 20 뒤)
2) 文物禮樂, 比擬中華, 分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之香, 而取螳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世宗實錄」권 103, 20 전)
3)『페지』는 영어 ‘page’를 당대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중 도서명이 아님에도 『』표기로 처리한 것들은 원저의 표기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4)上曰, 惡是何言也. 事大當以誠, 皇帝已知産於吾國, 不可誣也. (「世宗實錄」권 33, 19 후)
必欲精熟貫穿 , 莫如專經之學. (「世宗實錄」권 59, 13 후)
上, 命集賢殿副校理李季旬. 金汶等曰, 凡學之道, 經學爲本. 固所當先. 然只治經學. 所不通乎史 則其學未博. 欲治史學. (「世宗實錄」권 74, 10전)
中國與本朝, 合爲一家, 情親至矣. (「世宗實錄」권 53, 4 후)
5) 宣德甲寅, 英陵臨策士, 擢公第一, 授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 合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 「訓民正音」, 「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正. 雖規模措置皆稟睿旨, 而公之協亦多. (崔 恒, 「太虛亭文集」권1), (徐居正, 崔文靖公碑銘 幷序 1~2장)
6)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 ( 「世宗實錄」권 102, 42전)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絡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 憫然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世宗實錄」권 103, 36 후)
7) 上覽疏, 謂萬里等曰, …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題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世宗實錄」권 103, 21 후)
8) 勅令 第一,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 自本日止. … 公文式第十四條 法律 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高宗實錄」권 32, 64 전~65 전) 一般解釋上에 疑誤할 慮가 有할뿐더러 規式에 違反되겠삽기 左開條件을 設定 施行할 事로 閣議에 決定하야 內閣總理大臣이 各部에 照會를 發홈. 一, 各官廳의 公文書類난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하고, 純國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함을 不得홈. 一, 外國官廳으로 接受한 公文에 하야만 原本으로 正式處辨을 經하되, 譯本을 添附하야 케 홈. (「官報」3990호, 1908년 2월 6일, 官廳事項)
9) 山 산이라 하던지 江 강이라 할 것 같하면 이런 말들은 다 한문 글자의 음이나 또한 조선 말이니 이런 말들은 다 쓰난 것이 무방할뿐더러 맛당하려니와 만일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이 한문의 음으로 써서 노은 글자의 뜻을 몰을 것 갓하면 단지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만 아지 못할뿐이 아니라(미완, 쥬상호씨, 국문론, 「독립신문」2권 114호, 1897년 9월 25일) 한문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문의 음만 취하야 써서 노은 고로 흔히 열 자면은 일곱이나 여덟은 몰으나니 차라리 한문 글자로나 쓸 것 갓하면 한문을 아난 사람들이나 시원이 뜻을 알것이라 그러나 한문을 몰으난 사람에게는 엇지하리요 이런즉 불가불 한문 글자의 음이 조선말이 되지 안한 것은 쓰지 말아야 올을 것이요…(쥬상호 씨, 국문론, 전호 연속, 115호, 1897년 9월 28일)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방문객 | 2009.06.21 22: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도움 많이 됬습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09.06.22 09: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방문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 ^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