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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에 해당되는 글 4건
2010. 10. 20. 10:31

한글에 뜻을 품은 11개 대학의 소모임 학생들이 모여서 '한울'전시를 매년 열고 있는데요, 올해로 10회째 10월 3일부터 9일까지 서초동 한원미술관에서 한울의 '받아쓰기:한글스승'전이 열렸습니다. 한울은 한글 타이포그라피가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매년 조금씩 노력하고 성장하고 있는 대학생 디자인 그룹입니다.

 
올해, 한울 10.0은 한글 스승들의 연구와 업적을 돌이켜보고 한글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어 '받아', 한울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쓰기'를 시도 한다하여 '받아쓰기: 한글 스승전' 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의 한글 연구에 큰 역할을 하신 다섯 분(김진평, 최정호, 공병우, 주시경, 최현배 스승)으로 각각 카테고리를 나누어 기획하여 전시가 되었습니다.  


공병우 선생님의 세벌식 자판



공병우 선생님의 세벌식 자판에 대한 안내서 작품




 주시경 선생님을 기리며 만든 작품을 한번 보실까요?

 

주시경 선생님은 '한글학자' 였지만, 한편으론 ‘독립운동가’ 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총 칼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동안, 주시경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한글’이라는 보이지 않는 최첨단 무기로 개발, 대중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에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창안하여 민족의 혼을 지켜낸 주시경의 한글을 무기로 형상화시켜 표현한 작품, 마음에 와닿죠?


오프닝 이벤트로 펼쳐진 캘리그라피 이상현 작가님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2기 최윤정

ⓒ온한글  


BlogIcon 만화왕언트 | 2010.10.20 12:23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한글에 대한 많은 것들이 있군요.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10.10.22 18:03 | PERMALINK | EDIT/DEL
머니머니님 안녕하세요.
자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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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13. 11:38

하나의 문화로서 한글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요즘,
문득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이 한글학자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죠.
저도 사실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고요. 그래서 오늘은 주시경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을 사랑했던, 주시경 선생 이야기

주시경 선생은 1890년 15세 때 국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셨는데, 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주시경 선생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8년 6월 역사지지 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년 6월 보통과를 졸업하셨습니다.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는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문자론과 표기법', '음학과 문법론',
'사전편찬' 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문 생활을 바로잡고자 행해진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는 <국문론>,
<국문연구>, <말의 소리>, <말모이>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

주시경 선생은 순한글 신문 제작을 위해 '국문동식회'를 조직하고 한글 표기법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일과 연구를 병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지만 서재필이 추방당한 이후 독립신문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학업을 마친 이후에는 지식인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 교사로도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 등 다양한 활동도 전개하셨죠.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문문법>, <대한국어문법>, <국어문전음학>, <말>, <국문연구>, <고등국어문전>, <국어문법>,
<소리갈>, <말의 소리>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만의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애국자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은 민족의 상징인 민족어를 통해 민족적 통일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국어 연구와 그 보급에 더욱 힘쓰고 한글을 사용하고자 하며 한글의 가로풀어쓰기를 시도하였고,
이름도 '한힌샘'이라는 한글식 이름으로 고치는 것 등은 주시경 선생의 애국계몽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자료 참조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3559b
http://100.naver.com/100.nhn?docid=140609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이세진

ⓒ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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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7. 13:09


 지구상에는 수천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수가 정확하지 않아서 적게는 3000개, 많게는 60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유는 정밀한 조사의 부족도 있지만 언어의 구별 기준, 혹은 방언과 언어의 구별 기준이 모호한 데에 있다.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수가 이렇게 많지만, 이 많은 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적다.
 역사적으로 흘러간 과거에 존재하였던 문자를 포함한 총수는 대략 400여 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의 수는 30~4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언어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사용하는 말소리는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된다. 한국말의 소리는 귀에 들리는 청각적 존재이고, 이것을 시각적 존재인 문자로 나타내 주는 것이 ‘한글’이다. 우리의 문화적 긍지이면서,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에서 그 위력을 더욱 크게 발휘하고 있는 한글.
 우리에게 친숙한 이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당시부터 쓰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인 이 낱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 시작은 물론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정음(正音)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우리 문자를 전체적으로 지칭한 표현은 ‘訓民正音’과 ‘正音’이다. 후자는 ‘正音二十八字’(제자해)라고 구체화되어 표현되기도 했다.「훈민정음」에 나타난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를 모두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1)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
㉠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正音 스물여덟 글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와 뜻을 들어 보이시니 이름 지어 가로되 訓民正音이라 하셨다. (정인지 해례서문)
㉡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정음을 지으심에 先人의 서술에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함의 이치로 이룬 것이 다. (정인지 해례 서문) 
㉢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이제 正音을 지은 것은 애초부터 슬기로써 도모하고 힘써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聲音에 기인되어 있는 이치를 지극히 한 것이다. (제자해)
㉣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初聲凡十七字 (····云云····).
  정음 28자는 각각 그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초성은 17자이니···· (제자해)
㉤  正音作而天地萬物之理成備. 其神矣哉. 是殆天啓聖心 而假手焉者乎.  
  아! 정음의 지음에 천지만물의 이치를 이룩하여 갖추니 신묘하도다. 이는 거의 하
  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서 그 손을 빌린 것이로다. (제자해)
㉥ 正音制字尙其象 因聲之每加
  정음의 제자는 그 모양을 존중하여 소리에 따라 거세지면 획을 더하였다. 正音之
  字只卄八 정음의 字는 오직 스물여덟. (제자해 訣)
㉦ 正音初聲, 卽韻書之字母也. 聲音由此而生, 故曰母.
  정음의 초성은 곧 운서의 자모이다. 聲音이 이로부터 생기므로 母라고 말한다.
  (초성해)

 
 해례본과 함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5년 기사에도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세종실록 28년 9월 기사에도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이라 하여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훈민정음’은 책 이름 으로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리키기도 하고, 세종이 만든 문자 체계를 가리키기도 하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위의 ㉡ 이하에 쓰인 ‘正音’은 ‘訓民正音’에서 관형부 ‘訓民’을 생략한 것이다. ‘正音’은 제자해에 4회, 초성해에 1회, 정인지 서문에 2회 나타난다. 여기에 쓰인 ‘정음’이 문자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다. ㉣의 ‘正音二十八字’와 ㉥의 ‘正音制字’와 같이 ‘正音’이 ‘字’와 한 덩어리로 묶여 사용된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훈민정음의 약칭으로서의 ‘正音’은 「直解童子習」(成三問 지음), 「釋譜詳節 序」,「月印釋譜 序」에서도 쓰였다.
「석보상절 서」의 협주에 “正音은 正 소리니 우리 나랏마 正히 반기 올히 쓰논 그릴  일후믈 正音이라 니라” (정음은 바른 소리니 우리나라 말을 바르고 반드시 옳게 쓰는 글이므로 그 이름을 정음이라 한다)라고 ‘정음’의 뜻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이 협주는 ‘正音’을 문자로서 인식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에서 ‘正音’이 ‘성음’(聲音)의 대립어로 쓰이고 있는 점도 ‘정음’이 문자 체계를 지시하는 것임을 잘 보여 준다. 이 문맥에서 ‘성음’은 음성언어 즉 ‘말소리’이고 ‘正音’은 그것을 시각화한 글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정음’이 쓰인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용어에는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정음의 초성은 운서의 자모’이며 ‘이로부터 성음(말소리)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 문맥에서 ‘정음’은 현대 언어학의 ‘음소’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 언어학에서 심리적 차원에 존재하는 음소단위로부터 생리적· 물리적인 말소리(음성언어)가 생성· 인지된다는 관점과 ㉦에 나타난 ‘正音’과 ‘성음’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것이다.

 한편 해례본에는 ‘정음’안에 ‘초성, 중성, 종성’이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성운학에서는 음(音)과 성(聲)을 구별하여 쓰지 않았다. 따라서 ‘正音二十八字’에 속한 문자들은 초성, 중성, 종성이라는 청각적 소리단위이면서 동시에 시각적 문자단위이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문(諺文), 언자(諺字), 반절(反切)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쓰이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동시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어로 가장 널리 사용된 용어로 ‘언문(諺文)’이 있다. 언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예는 「朝鮮王朝實錄」 기사 중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일 것이다.
 이것은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의 실록 기사이고, 이어서 세종 26년(1446년) 2월 16일에 최항,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韻會」를 번역하게 했다는 실록 기사에도 나온다. 같은 해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상소문(실록 번역문)에서는 무려 22회나 쓰였고, 이 상소문을 본 후 최만리 등을 불러 꾸짖는 세종의 말을 기록한 기사에도 ‘언문’이 출현한다.

 훈민정음 또는 정음이 공식적인 명칭이라면 언문은 속칭으로 사용했던 용어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언문을 비칭(卑稱)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적어도 세종 당대에는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실록의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세종 25년 12월 30일)라는 기록이다. 실록에서 임금이 친제한 문자를 언문이라 한 것이다. 언문이 비하적인 의미를 가졌다면 이런 문맥에서 결코 쓸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최만리의 반대상소에 쓰인 언문의 용례다. 언문이 비하적 의미를 함의했다면 최만리가 임금이 직접 만든 문자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훈민정음(혹은 정음)이 격식을 갖춘 정중한 용어라면 ‘언문’은 이것을 평범하게 칭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실록 기사에는 우리 문자를 지칭하는 언문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특이한 경우로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언문의 용례가 있음은 언급해둘 만하다.

(2) 국법(國法)은 귀천(貴賤)·남녀(男女)를 막론하고 6, 7세 때부터 언문(諺文)을 가르치는 데, 이를 이름하여 ‘가나(假名)’라고 하며 공사(公私)의 문서는 모두 이 ‘가나’를 사용합니다. 진문(眞文)의 관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서(試書)를 알고 해서(楷書)·초서(草書)를 대략 이해하는 사람이면 곧 이 자리에 차임합니다.(순조 9년(1809년) 12월 2일)

 이 기사는 도해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 최석(崔昔) 등이 일본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별단(別單)을 옮긴 것이다. 이 기사에서의 언문은 당시의 조선인이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으며, ‘眞文(漢字)’과 대립되는 용어이다. 이는 우리가 훈민정음을 가리키기 위해 ‘漢字’의 대립어로 쓴 ‘언문’의 용법과 같은 것이다.

 한편 실록 기사에는 언문과 같은 뜻으로 ‘언자(諺字)’라는 용어도 더러 나타난다. 그 중 이른 시기의 것 두 예만 보이기로 한다.

(3)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대학연의」를 언자로써 어조사(語助辭)를 써서 종실 가운데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는 자를 가르치려고 하였다.(문종 원년(1451년) 12월 17일)

(4)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언자(諺字)를 사용하여 「잠서(蠶書)」를 번역하게 하였다.(세조 7년 3월 14일)

(5) 승전색(承傳色) 설맹손(薛孟孫)이 언자와 한자를 섞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승정원에 보였다.(성종 10년(1479년) 9월 4일)


 (3)의 기사는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대학연의」의 본문에 구결을 달았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종전 한자의 약체(略體)로 된 차자(借字) 구결을 대신하여 일찍부터 한글 구결을 만들어 활용했음을 알려준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훈민정음이 왕자의 한문의 학습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는 「잠서 언해」에 관한 기록에서 우리 문자를 ‘언자(諺字)’라 부른 예이다. (5)는 양반관료가 훈민정음과 한자를 섞어서(이른바 국한문 혼용) 서간문을 작성한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이 언문을 언자라고 부른 예도 적지 않는데 이로 보아 두 용어는 구별 없이 혼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언문과 별도로 우리 문자를 가리킨 용어로 ‘반절(反切)’이 있다. 이 용어는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의 ‘범례’항에 나온다. 여기에는 ‘諺文字母’ 아래 ‘俗所謂反切二十七字’라 하여 반절을 우리 문자 명칭어로 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반절이 우리 문자를 지칭한 용례는 없다.
 
 반절이란 용어는 중국 한자음을 성모와 운모라는 두 개 단위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데에서 훈민정음을 반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반절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 문자 명칭어로 보기 어렵다. 중국의 성운학에서 쓰이던 용어가 잠시 전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문(國文)의 출현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문자를 지시하는 명칭으로 훈민정음, 정음, 언문, 언자 등이 통용되다가 19세기 말엽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고, 청나라와의 사대관계가 약화됨에 따라 독립과 자주의식이 고취되면서 우리의 고유문자는 국가의 문자로 그 지위가 격상된다.
 즉 諺文이 국가의 문자가 되면서 그 명칭이 ‘국문(國文)’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문이라고 칭하게 된 시기는 「고종실록(高宗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軍國機務處啓, 議政府以下各衙門官制職掌. 學務衙門 管理國內敎育學務等政
(··중략··) 編輯局 掌國文綴字各國文繹及敎課書編輯 等事.
학무아문은 국내의 교육과 학무 등을 관리한다. 편집국을 두어 국문 철자와 각국의 문장을 번역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을 관장케 한다.(고종 31년(1894) 6월 28일)

 갑오개혁 이후 군국기무처에서 의정부 이하 각 관청의 편제와 직무를 근대 정부조직으로 개편하면서 학무아문(學務衙門) 내에 편집국을 설치하여 ‘國文綴字’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토록 한 기록이다. 이 규정에 이르러 종전의 ‘언문’이 ‘나랏글’ 즉 국가의 공용 문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1443년에 창제된 이후 450년 동안 우리 문자 생활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훈민정음이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능 좋고 간편한 우리 문자를 뒷전에 두고, 어렵고도 불편한 남의 문자[漢字]에 얽매여 있던 질곡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밖에 ‘國文’이 나타난 주요 기사는 다음과 같다.

(7) 凡國內外公私文字. 遇有外國國名地名人名之當用歐文者. 俱以國文繹施行事. 일체 국내외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서에 외국의 나라 이름, 고장 이름, 사람 이름을 구라파 글로 쓴 것이 있으면 모두 국문으로 번역할 것입니다.(고종 31년 7월 8일)

(8) 銓考局條例.(··중략··) 一. 普通試驗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外國事情內情外事 俱發策.전고국 조례(銓考局條例). 보통시험에는 국문, 한문, 글자쓰기, 산술, 국내 정사, 외국사정, 국내 사정, 외무 관계 문제를 모두 시험 문제로 낸다.(고종 31년 7월 12일)

(9) 勅令第一號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중략··) 第十四條 法律勅 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칙령 제1호에서는 “내가 결재한 공문규정을 공포하게 하고 종전의 공문 공포 규정은 오늘부터 폐지하며 승선원 공사청도 전부 없앨 것이다.”라 하였다.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섞어 쓴다.(고종 31년(1894) 11월 21일)

(10) 勅令第四十九號 法官養成所規程. 第四條 凡本所의 生徒되 者 年齒二十歲以上으로 入學試驗에 及第 者 或現在官署에 奉職 者限홈. 入學試驗科目이 左와 如홈. 一. 漢文作文. 一. 國文作文. 一. 朝鮮歷史及地誌大要.
칙령 제49호 법관양성소 규정. 제4조 본 양성소의 생도로는 20살 이상으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또는 현재 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제한한다. 입학시험 과목은 아래와 같다. 1. 한문 작문 1. 국문 작문 1. 조선역사와 지리대요(고종 32년(1895) 3월 25일) 

(11) 勅令第八十六號 公文式 裁可頒布. 第一章 頒布式.(··중략··) 第九條 法律命令은다 國文으로 本을 삼 漢譯을 附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칙령 제89호 공문식을 재가반포하다. 제1장 반포식 제9조. 법률과 명령은 다 국문으로 서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덧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토록 함. (고종 32년 5월 8 일)
 
(12) 學部告示第四號 (··중략··) 學徒 八歲以上으로 十五歲지 增集야 其科程은 五倫 行實로붓터 小學과 本國歷史와 地誌와 國文과 算術其他外國歷史와 地誌等 時宜에 適用 書冊을 一切敎授야 (···하략···) 학생은 8살부터 15살까지 더 모집하고 그 과정은 오륜행실로부터 소학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에 적용되는 책을 일체 가르쳐서···. (고종 32년 9월 28일)
 
(13) 內閣總理大臣李完用奏, 以學部大臣李載昆請, 議設置國文硏究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아뢰고 학부대신 이재곤이 청하여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고종 44년(1907) 7월 8일)  

 
(7)은 각종 문서의 외국어 고유명사를 국문으로 번역토록 한 것이다. (8)은 각급 아문의 관리 등용 시험에 ‘國文’을 부과한 것이고, (9)는 국가의 공용문서 기록에 국문을 기본으로 삼고 국한문도 쓸 수 있게 한 역사적 규정이다. 이 칙령 1호 14조에 의해 한글은 국가의 문자로 공인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다. 이 내용은 (11)에서 보듯이 칙령 89호로 더욱 구체화되어 반포된다.  
 
 (10)는 법관양성소 입학시험 과목에 ‘國文’을 부과한 규정이다. 이들은 세종 당대에 제한적으로 이서배(吏胥輩) 선발 시험에만 훈민정음을 부과한 이후 관리 임용 시험 전반에 ‘國文’을 부과한 최초의 사건이다. (12)는 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國文’을 가르치도록 한 법률이다. (13)은 우리글을 연구하는 국가 기관 ‘국문연구소’의 설립 기사이다. 주지하다시피 주시경 등 주요 인사들이 많은 토론을 거쳐 국문을 새롭게 정비한 ‘의정안’을 만들었으나 국운이 다하여 시행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가리키는 ‘國語’는 널리 쓰이지만, 우리글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國文’보다 ‘한글’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현재 ‘國文’이라는 용어는 노년층에서 일부 쓰이기는 한다. ‘國文’은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줄여서 부르는 ‘國文科’ 정도에서 부분적으로 쓰일 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술어로서의 기능은 ‘한글’에게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한글'의 출현
 
 한글’이라는 용어는 일제의 억압으로 쓸 수 없게 된 ‘國文’을 대신하여 우리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애국적 의도에서 만든 것이다. ‘한글’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영근의 ‘한글의 유래’(1994)에서 명료하게 밝혀졌다. 

 최남선(1946:179~180, 1973:87)에서는 朝鮮光文會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였으나, 1910년 주시경의 글에 나타나는 ‘한나라글’에서 ‘한글’의 유래가 비롯되고, 주시경의 손으로 쓴 각종 증서에 ‘한말’, ‘배달말글’, ‘한글’이 실용되고 있는 증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글’의 작명부는 주시경으로 봄이 옳다.(고영근1983a/1994:294)
 ‘한글’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13년 3월 23일에 창립한 조선언문회 창립총회 기록에 나타난다. 창립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의 ‘四二四六年 三月二十三日(日曜) 下午一時 ··· 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에서 ‘한글’이 처음 등장한다.1) 따라서 한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는 1913년 3월 23일이 된다(고영근 1983a/1994:293).2)

 그후 ‘한글’이라는 명칭은 「아이들보이」(1913.9)의 ‘한글풀이’란에 처음 실용화되었고,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을 바꾸어 ‘한글배곧’이라 부른 데서도 쓰였다. 여기서 나온 중등과 제4회 수업증서, 고등과 제3회 수업증서, 우등증(1915.3) 등에 ‘한글배곧’이 나타난다.

 주시경의 후학에 의해 ‘한글’이 처음 쓰인 기록은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의 머리말에 ‘한글모임자 한샘’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영의 「한글적새」와 「한글모 죽보기」의 두 원고는 1916~1919년에 엮어진 것인데 여기에서 ‘한글’이 쓰인 것으로 보아, 주시경의 제자들이 이 말의 보급에 앞장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영근 1984a/1994:295) 3)

 '한글’이 종래 천대하는 언문의 이름을 갈음하는 새 이름으로 널리 쓰인 것은 1926년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한 이후의 일이다. 1927년에 ‘한글’이 창간되어 이 이름이 일반인의 의식에 오르게 되고 이 해의 기념일부터는 ‘한글날’로 고쳐 일컫게 되어, 한글의 운동이 자꾸 성대하여짐에 따라, 한글이란 이름도 더욱 널리 퍼지고 깊이 뿌리를 박아 일반 사회가 즐겨 쓰게 되었다. (최현배 1976:52~53).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글에 대한 명칭어는 시대별로 용어 사용에 일정한 특징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창제 시기: ‘훈민정음’, ‘정음’, ‘언문’이 공존한 시기. 이때의 ‘언문’은 비하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② 16세기~ 19세기 말 : ‘언문’이 주류이고 ‘언자’(諺字)도 부분적으로 쓰였다. 후자는 ‘글자’라는 뜻이 강하여 전자보다 더 좁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③ 19세기 말~ 20세기 초 : 개화기 이후 민족의식이 본격적으로 발로되면서 ‘국문’이 등장하였다.
④ 20세기 초~ 현대 : 일제 치하에서 ‘국문’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게 됨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져 널리 쓰이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로 이어졌다.




1) 이 ‘한글모’는 ‘朝鮮言文會’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한글’은 ‘朝鮮言文’에 대응하고 ‘모’는 ‘會’를 뜻한다.
2)「한글모 죽보기」의 검토를 통해 ‘배달말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1911.9.3)도 문증(文證)되었다. ‘배달말글’이란 말은 광복 후 최현배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미 주시경에 의해 1911년에 사용된 것이다(고영근 1994).
3) 고영근(1983a/1994) “한글의 유래”,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고영근(1983b/1994), “개화기 국어연구단체와 국문보급활동”,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BlogIcon 멋진백작 | 2009.02.17 23:58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잡지형 블로그인가요? ^^
좋은 한글회사 ^^ 오래된 고객이랍니다.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

한알에스에스(영문으로 쓰기가 거북한^^)에 등록하고 자주 들를 게요.
엮인글과 댓글 감사합니다. oTL
BlogIcon 온한글 | 2009.02.18 09:32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백작님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정보 많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자주 찾아와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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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19. 12:00


 글/김 한빛나리(한글학회 연구원)


1.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한나라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과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켜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잘 닦아지나니라.

그 말과 그 글은 그 나라에 요긴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다스리지 아니하고 묵히면 덧거칠어지어 나라도 점점 내리어 가나니라.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니라. 또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 곧 그 사람들이 무리진 덩이가 천연으로 이 땅덩이 위에 홀로 서는 나라가 됨의 특별한 빛이라.

이 빛을 밝히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밝아지고 이 빛을 어둡게 하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어두워 가나니라.


 



 오늘날 우리가 숱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문화민족으로서 질 높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 중심에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의 억압 하에도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한글창제의 깊은 뜻을 가장 정확히 널리 펼친 분으로,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썼으며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분이었다.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우리말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으며, 한글의 맞춤법, 한자말이나 외래말을 우리의 쉬운 말로 다듬기 등 국어의 개화에 앞장섰던 선봉자였다.
 또한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선생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 세종의 정신을 전해줌으로써 우리 국어학이 보다 넓고 깊게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장본인이다.

 그 정신과 뿌리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정보통신(IT) 강국이 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한글을 지켜내고 갈고 닦는 데 헌신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정신이 탄생시켰던 최초의 한글단체 한글학회의 역사만 해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 우리말글과 함께 걸어온 100년, 한글학회

2.1. 우리말글 연구기관의 탄생

 한글을 다듬고 연구하는 기관이 생긴 것은 세종대왕이 대궐 안에 세운 정음청(언문청)이 처음일 것이다. 정음청은 한글(훈민정음)을 가꾸고 국민생활에 편리함을 주기 위한 여러 일들을 해왔으나, 시대를 거듭하면서 한글은 사용금지 혹은 폐지 등 오랫동안 핍박과 시련을 겪기도 한다.
 갑오경장 이후에야 다시 생기를 되찾아 과거시험을 한글로 치르거나, 공용문서나 각종 경전, 교과서에 한글이 쓰이고, 순한글 신문(독립신문)이 나오면서 우리말 연구와 활동이 조직화되어갔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뜻있는 학자들이 연구모임을 갖게 되고 그 체계를 잡아 한글학회가 태어났으니, 정음청이 국가기관이었다면 민간학술단체로서는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한글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태어난 한글학회는 우리말 연구와 한글운동뿐만 아니라, 나라가 일제의 창칼 아래 짓눌렸을 때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우리말글로 겨레얼을 되살리고자 하는 민족단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 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고,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창립정신은 100년을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다.

2.2. ‘한글날’ 제정

 한글학회는 우리 겨레의 세계적 자랑거리인 훈민정음 반포의 날을 기리기 위하여 왕조실록(113권) 세종 28년 병인 9월 조에 나타난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것을 근거로 ‘가갸날’을 정하고,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 곧 한글이 반포된 지 8회갑(480년)이 되는 날, ‘신민사(新民社)’와의 공동주최로 각계인사 400여 명을 식도원에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가갸날’로 선포하였다.

 그 뒤 날짜 환산방법에 따라 그 날짜가 여러 차례 바뀌다가 1928년에는 그 이름도 ‘한글날’로 바뀌게 되었다. 왕조실록 근거에 의해 9월의 끝날인 음력 29일로 정해졌던 것이 1932년에는 양력 10월 29일로 옮겨지고, 또 음력과 양력의 환산방법을 되짚어 10월 28일로 바뀌었다가, 1940년 7월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의거해 10월 9일로 다시 정해져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2.3. ‘한글 맞춤법’ 제정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기 위한 바탕은 ‘훈민정음’에 규정되어 있다. ‘합자해’에서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 ‘글자’를 이룬다는 원리와 그들의 위치, 차례 등을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글자는 음소글자이지만 그 실제의 쓰임에서는 음절단위 글자로 모아쓴다는 ‘형태주의 맞춤법’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1930년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의 제정을 결의하고 몇 년 동안의 작업 끝에 1933년 한글날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우리 어문규정의 틀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그 뒤 몇 번의 수정과 개정을 거친 뒤 정부가 한글학회의 한글 맞춤법의 틀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맞게 다시 고쳐 1988년 문교부 고시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년의 유예기간을 둔 뒤 198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다.
 



 1908. 8. 31. 국어 연구 학회 창립.

 1909. 11. 7~1910. 6. 30. 제1회 ‘강습소’(중등과) 설립, 운영(강사:주시경, 졸업생 20명).

 1913. 3. 23. ‘한글모’로 개칭(회장:주시경).

 1926. 11. 4(음력 9. 29).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돌)에 ‘가갸날’이라 이름하고 그
                첫 기념식.

 1927. 2. 8. 동인지 월간《한글》 창간호 펴냄(4× 6판, 세로짜기). 제2호부터는 4×6배판

 1931. 1. 10. 학회 이름 ‘조선어학회’로 개칭.

 1933. 10. 29(한글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책으로 펴냄.

 1936. 10. 28(한글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펴냄.

 1940. 6. 25.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

 1942. 10. 1. 이른바 ‘조선어학회 수난’이 일어남.

 1947. 10. 9. 《조선말 큰사전》 제1권 펴냄.

 1948. 9. 2.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의 강의 시작.

 1949. 3. 24. ‘재단법인 한글집’의 설립 허가.

 1949. 9. 25. 학회 이름 '한글학회'로 개칭.

 1957. 10. 9. 《큰사전》 제6권 펴냄. 이로써 큰사전 완성.

 1958. 6. 15. 《중사전》 펴냄.

 1960. 4. 30. 《소사전》 펴냄.

 1960. 5. 1. 《중사전》 수정작업 시작.

 1962. 11. 1.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

 1966. 2. 28. 《한국 지명 총람》 서울편 펴냄.

 1967. 1. 30. 한글 전용 위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72. 9. 5. 월간《한글 새소식》 창간호 펴냄.

 1974. 7. 22. 학회 병설로 한글문화협회 결성.

 1975. 2. 22. 한글문화협회 아래 전국 국어 운동 고등학생 연합회를 둠.

 1977. 10. 8. 한글회관 낙성식.

 1979. 9. 8. 한글 글자꼴 연구 모임 가짐.

 1982. 12. 3. ‘한글 풀어쓰기 연구 모임’발족.

 1984. 2. 21.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

 1984. 9. 10.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85. 25~27. 제1회 우리말글 연수회.

 1986. 12~22. ‘한힌샘(주시경) 연구 모임’발족.

 1987. 12. 3. 《문학 한글》 창간호 펴냄.

 1987. 12. 22. 《주시경 선생에 대한 연구 논문 모음 1》 펴냄.

 1988. 5. 15. 《한힌샘 연구》 창간호 펴냄.

 1988. 12. 20. 《교육 한글》 창간호 펴냄.

 1991. 10. 9~15. 한글도안 상품 큰잔치.

 1991. 12. 3.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펴냄.

 1991. 12. 22. <우리말 큰사전》 펴냄.

 1993. 10. 9. 한힌샘 주시경 선생 흉상 세움.

 1994. 10. 9. '한글학회 한글정보'(컴퓨터 통신 서비스) 개설.

 1996. 2. 1. 전자국어사전 <한글 우리말 큰사전> CD-ROM 제작.

 1996. 10. 9. 한글학회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http://www.hangeul.or.kr)

 1996. 12. 16. '국어학 자료 은행' 완성(논문 20,375편).

 1997. 7. 7~19. 제1회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

 1998. 12. 30. 국가 지원(문화관광부) <한국 땅이름 전자사전>(CD-ROM) 제작.

 1999. 7. 9.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 개최(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

 1999. 12. 15. 《깁고 더한 쉬운말 사전》펴냄.

 2000. 5. 13. 첫 '우리말글 지킴이'(아나운서 황현정) 위촉 후 덕수궁에서 광화문까지
                  거리홍보.

 2001. 5. 26. 첫 ‘아름다운 우리말 상호’(섬마을밀밭집, 종로구) 선정, 그 보람
                 (상징현판)을 걸어 줌.

 2001. 6. 2. 제1회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주식회사 이슨과 공동주최.

 2001. 12. 15. <우리 토박이말 사전> 펴냄.

 2002. 2. 22~3. 5. 유럽 지역 한국어학교 순회강연회.

 2002. 4. 4. <한국일보> <소년한국일보>사와 함께 "한글을 세계로!" 운동 시작.

 2004. 6. 3. 국회의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꿀 것을 담은 건의서(“국회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꾸어 주십시오!”)를 경제정의실천연합(공동대표 김성훈)과 공동으로 제출.

 2004. 9. 4. 온겨레 한말글 이름 큰잔치의 하나로 제1회 전국 한글 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 개최.

 2005. 4. 2. 학회 부설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위원회(KLPT)’,‘한국어 능력 시험’주관 
                기관으로 선정.

 2005. 6. 2. 국립국어원의 후원으로 “국어상담소 운영을 위한 공개 토론회”개최.

 2005. 12. 17. 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가 ‘한말글 문화협회 다시 일으키는 잔치’를 엶.

 2006. 8. 30. 얼말글 교육관 개관.

 2006. 10. 9. 국경일로의 승격 후 첫(560돌) 한글날 기념행사.

 2006. 11. 8. 법제처 용역과제인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를 위한 법률 개정안’ 수행,
                  최종 보고서 제출.

 2007. 4.30. 한글문화연대 비롯 관련 단체들과 ‘노원구의 영문자 간판 의무시행령’ 
                 철회 요청 기자회견.



 


 ‘한글 맞춤법’뿐 아니라 ‘표준말’을 사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 표기법’ 등 어문생활에 필요한 규범들도 한글학회가 정리하였다.

2.4. 조선어학회의 수난

 일제가 국학 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투옥한 사건으로,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과 한글을 통해 민족 얼을 드높이고자 했던 한글학회 회원들이 1929년에‘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만들어 <큰사전> 편찬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제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조작했던 사건이었다.
 1942년 8월 함흥 영생여고 학생을 붙잡아 취조하던 중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일을 맡고 있는 석인 정태진 선생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증인으로 내세워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검거,‘치안 유지법’이라는 내란죄로 기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끝내 함흥 형무소에 있었던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징역과 집행유예를 받은 이도 있었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모두 풀려났고 그 뒤 조직을 가다듬어 1949년에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가 꾸민 기소사유와 판결


본 건 조선어 학회는 대정(大正) 8년(1919년) 만세 소요 사건(萬歲騷擾事件)의 실례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 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 양상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꽃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에 그쳐서,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 6년(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 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 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 이념을 삼아 가지고, 겉으로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 배양 단체로서 본 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 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종 일관 진지하고 변하지 않은 그 활동은 조선 어문에 쏠리는 조선 인심의 기미(機微)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조선 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 관념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 향상, 민족 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伸張)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 한글 학회 50년사에서 따옴

 


2.5. 세계로, 미래로!

 한글학회는 100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어문정책과 국어학 연구, 사전편찬, 도서출판, 교육, 계몽 등 다양한 한글운동을 해 왔다. 국제활동에도 눈을 돌려 1971년부터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세계 언어학자들과 함께 한국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꾀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한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2000년부터는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위원회를 만들어 외국에서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인증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국외에서도 우리말이 바르게 보급되고 한국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원들을 초청하여 한국어를 바르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연수도 진행, 지금까지 70여 나라 500여 명이 한글학회의 국외 한국어 교원 연수를 마친 바 있다. 이들 역시 한글학회의 든든한 가족으로서 한국어의 교육 및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3. 한글만 쓰기를 위한 움직임과 그 열매

 한자를 버리지 못한 만큼 사회 전반의 발전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글자살이는 한자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는 버렸어야 했지만 이 나라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과거에 얽매어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글만 쓰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자교육을 강화하려는 등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글의 창제는 비로소 우리말이 제 치수에 맞는 옷을 입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과학적인 음운조직을 가진 한글은 우리말에 잘 맞는 글자인 까닭에 배우기도 쉽고 우리 민중이 나라의 정책을 쉽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은 물론,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 주시경 선생 같은 분들이 한자의 사용이 우리 문화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일찍이 깨닫고 <독립신문>(1896) 창간을 한글전용으로 했던 것이 우리 국민에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고취시켰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독립도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부터 우리 신문이 모두 한글 전용으로 발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생명과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빨리 더 많은 발전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몇 십 년 동안을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가 못내 아쉽다. 다행히 지금은 신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출판물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한자와의 싸움을 벌였는가? 아직도 그 잔뿌리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동안 한자혼용론자들의 주장에 맞서온 노력들을 살펴볼만하다.

3.1. 한글 전용 법률

 1948년에 최초로 공포된 대한민국헌법은 원래 한글로 적혔다고 한다. 이에 한글학회는 국회에 고마움의 뜻과 아울러 일반 공용문서를 한글로 쓰도록 하는 법률을 정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서와 한글전용 발표식을 한글날에 하도록 하는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내고 담화도 발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그 해 10월 1일 제78차 국회에서 한글전용법이 통과된 것이다.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



새 나라의 건설 대업이 바야흐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중대한 이 시기에 임하여, 우리의 할 일은 실로 백 가지나 천 가지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오, 또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곧 태산교악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자주 정신’을 앞세우고 나가는 일이다.

과거 약 천여 년 동안, 우리는 남의 문화의 종노릇을 하고, 남의 정신에 사로잡히어, 제 역사가 혁혁하건만 이를 덮어 두었고, 제 문화가 찬란하건만 이를 묻어 버렸었다. 이것이 인습이 되고 고질이 되어, 남의 버릇을 흉내 내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오히려 자랑으로 알게까지 됨에 이르러 버린다면, 실로
보람 있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만대의 자손에게 노예의 굴레를 전하여 주는
민족적 반역 대죄를 면할 길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과연 그렇게 마비되었을까? 아니다. 먼지에 쌓인 거울이오, 구름에 덮인 태양이다. 닦으면 반드시 밝아질 것이오, 구름을 헤치면 다시 명랑해질 것이다. 과연이다. 참으로 과연이다. 이번 국회에서 공포한 새 헌법의 원본을 한글로 기록한 것은 곧 우리 문화가 어엿함을 확인함이오, 우리 정신이 새로와짐을 증명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자주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한글헌법의 공포는 자주정신의 부흥을 뜻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문화와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과 공로는 오로지 이백의 국회의원의 민족적 자주정신에 말미암은 것이매,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다른 모든 국사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의정할 것을 믿고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광명한 앞날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며, 마음에 든든함을 가득히 느끼는 바이다.

앞으로, 일반 법문을 전부 한글로 제정하고, 모든 공용문서와 성명.지명도 단연 우리 글자로 사용하도록 시급히 법적으로 정할 것을 믿고 바라며, 특히 이 정신의 실현이 촉진, 완수되게 하기 위하여, 앞으로 문교행정을 담당할 부문에는 더욱 이 한글헌법 공포의 정신을 여실히 또 원만히 살리어 나가기에 확호한 신념과 역량이 구비한
인사가 전적으로 배치되어야 할 것을 또한 믿고 바란다.

이에, 우리 학회는 감히 과거 삼십 년 동안 오직 한 마음, 우리글과 우리말을 부둥켜안고 지키기에 온전히 바치어 온 붉은 피와 뜨거운 정성을 가지고, 이제 삼천만 형제자매로 더불어, 우리 민족 문화의 급속한 향상과 국가 만년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이 자주 정신의 실천궁행에 굳은 결의로써 일치 매진하도록 전력할 것을 선명하는 동시에, 또 감히 책임 당국에 대하여 이 거족적 행진 전도에 조금도 장애가 없도록,
길 인도를 잘 하여 주시기를 거듭 부탁하는 바이다.

1948년  7월  24일
조선어 학회



                      

 

 

3.2. 한글전용 촉진회 조직

 우리 겨레의 자주문화를 세워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글전용법이 1948년 10월 9일 한글날에 발표되었으나, 이의 실천을 위해 앞장서서 이끌어갈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9년 6월 12일에 ‘한글전용 촉진회’를 조직하였다.

 한글전용 촉진회는 본부를 한글학회 안에 두고, 각 도시에 지부를 두어, 한글만 쓰기의 실행을 대대적으로 철저히 촉진시켰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전주, 대구, 목포, 광주, 청주, 광주(경기), 김포,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국어교육 강습회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3.3. ‘한글전용 국민실천회’의 활동


 1968년 10월 2일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2개년으로 단축시키기고 이를 강력히 시행할 것을 선언(1968. 10. 7. 대통령)한 뒤 10월 25일에는 ‘한글전용 촉진 7개항’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문교부 안에 ‘한글전용 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의 한글전용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이 나오자, 한글 동지들은 국민들도 정부와 뜻을 같이하여 한글전용의 국민운동단체를 창립하기로 하고, 최현배 선생을 발기인으로 한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68년 12월 21일 한글 관련 26개 단체들도 발기단체로 참여함으로써 한글전용 촉진회까지 통합되고 지방에 지부까지 둔 전국규모의 범국민 운동단체로 태어나게 된다. 이 단체에서 하고자 했던 뜻과 활동이 오늘날 한글만 쓰기를 여는 중요한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글전용 국민실천회 3년의 활동 

1. 관공서 및 각 단체에서 직장 무료 강습 17회

2.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및 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입안 건의

3. 쓰기의 건의 35번

4. 바른 국어 생활과 바른 맞춤법 출장 무료 질의응답 157번

5. 편집 및 교정 무료 봉사 61건

6. 건설용어, 농업, 상업용어의 왜말 조사 6번

7. 간판 업소 심방 무료 지도 138번

8. 음식점 차림표 바로잡아주기 69번

9. 우리말로 이름 지어 주기(무료), 업소 15곳, 사람 153명

10. 라디오 교양방송 및 주선 35번

11. 잡지 투고 게재 교섭 247번

12. 국어 관계 편지로 궁금 풀이 93번

13. 대학 국어운동 학생회의 활동 지원

14. 쉬운 말과 바른 말 자료 채집 43,000 낱말

15. 각 부처에 한글전용을 위한 쉬운 말 용어 제정 촉구 6번

16. 한글 타자 전국 선수권 대회 개최 (1969. 10. 9.)

17.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관계 자료조사 제공 8건

18. 공화당 국회의원 총회 강연회 및 그 밖의 계몽 강연회 21번

19. 한글명함 무료로 선사하기 13,600장(136명에 100장씩)

20. 한글문패 달아주기 63,375장

21. 한글전용 정책 자료조사 발간 (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1집 1,000부 관계기관에 무료 제공)

22. 쉬운 말 쓰기와 각 부처의 용어 제정물 등에서의 채집(‘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2집’ 원고 자료 1,530여 건)

23. 각종 정기간행물에서 한글만 쓰기 관계자료 채집 카드 작성(2,000여 카드)

                     



 


 

한글 관련 단체의 역사 1 <끝>-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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