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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각 글꼴로 주목받는 고암새김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각과 조우하다
 2007년 7월 24일 무더웠던 여름, 고암 정병례 선생과의 첫 미팅을 위해 서울 인사동 전각연구원에 담당 프로젝트 팀이 모였다. 서체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역량이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분야인 만큼 한 벌의 서체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작업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패키지의 모든 글꼴을 홀로 디자인한다면 그 디자이너의 개인적 성향에 치중되어 다양함을 잃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고암새김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한 가지씩 글꼴을 전담하는 개성 뚜렷한 네 명의 디자이너들이 한 팀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팀원들과 연구실에 들어서자 사이즈가 큰 작품부터 손가락 마디만한 돌에 새긴 작품까지 수천에 달하는 전각작품들이 현대적인 색감과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마음을 흔들었다. 크고 작은 돌 안에 수직, 수평, 원, 모, 각 등이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사실에 매료되었고, 저절로 감탄이 흘러 나와 한참 동안을 감상에 젖게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일부만이 즐기던 전각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수와 함께 할 수 있게 한다는 사명감에 팀원들의 얼굴마다 비장함이 흘렀다.


이미지 추출과 포지셔닝 작업
 전각예술에 흠뻑 취해 돌아온 후 고암선생의 작품들 속에서 이미지 데이터를 추출해내고 기존의 유사 서체들의 분석을 통해 고암새김체만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기존 서체들은 일관된 이미지를 추구하고 전통을 강조해서 점잖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비교할 때 고암새김체는 전통미의 멋스러움과 현대적인 세련미가 조화롭고, 유연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보다 차별화된 것을 요구하는 사용자들에게 전각의 맛과 멋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기존의 형식과 틀에 안주하지 않고 독창적인 기법과 표현양식으로 전각의 현대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써온 고암선생의 노력의 결과였고, 덕분에 폰트 상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서체의 선택의 폭이 넓었고 각 서체들마다의 컨셉도 보다 명확하게 잡을 수 있었다.


 


 고암선생의 글꼴들은 크게 modern(simple), Soft(feeling), Hard(reasonable), Classic(complex) 등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글꼴들의 이미지 포지셔닝을 하면서 이미지 맵을 작성하여 네 가지의 안으로 스타일을 정했다. 스타일이 정해진 글꼴을 각 디자이너의 특징과 성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나누어 시안작업을 시작했다. 


전통미와 현대미를 조화시키며 회화적인 느낌을 가미해 글자의 폭과 높이에 율동감을 주고 조판에서의 리듬감이 살아 있는 맛깔스러운 형태의 서체로 표현한다. 다양한 연령대에서 사용 가능하게 디자인한다. 


장식적인 요소를 접목하여 유연한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전각 특유의 날카로운 칼맛과 자소의 곡선이 만난 강한 듯 부드러운 느낌의 서체로 가독성과 독창성을 유도한다. 전각서체의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며 개성 있는 젊음 층의 선호도가 높은 디스플레이용 서체로 디자인한다. 


전각 특유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며 사람 냄새가 나는, 소박하지만 알찬 서체로 디자인한다. 자소의 모양과 크기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가로 세로획의 굵기에 차이를 주어 서체의 특징을 부각시킨다. 


활력과 역동성을 지닌 스타일로 작가의 강한 필력을 살리며, 한정된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자유로우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서체로 디자인한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역동적인 필력이 느껴지는 시안 4의 디자인은 남자 디자이너가 맡아야 했다. 하지만 팀원의 청일점이었던 디자이너에게 배당된 것은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특징인 시안 2였다.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컨셉으로 하고는 있지만 전각 특유의 힘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다소 중성적인 맛이 느껴지는 서체가 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손맛과 돌맛, 칼맛의 디지털화
 이렇게 고암새김체의 명확한 컨셉을 설정하고 본격적으로 디지털화할 준비작업을 하는 데에만 한 달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4가지로 분류한 스타일별로 200자 가량의 낱자 원도를 고암선생께 요청한 후 스캔을 받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순탄한 작업은 아니었다. 

 가로세로 10X20cm의 네모난 돌판 안에 빈틈없이 새겨진 글자들은 고암선생의 자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치밀했다. 그리고 원도를 디지털화 한다는 것은 컴퓨터 자판이 칼을 대신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작품 속에 담는 몇 안 되는 글자와는 달리 모든 낱말과 문장들을 만들어야 하기에 가독성뿐만 아니라 글자의 균형과 비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원도의 형태묘사는 물론이고 작품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철학까지도 녹여내는 역할이 요구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지털화인 까닭이었다.
 
 고암새김체를 디지털화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는 서체의 질감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질감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량이 필요했고, ‘손맛과 돌맛, 칼맛’의 삼박자가 맞아야 전각 본연의 느낌이 서체에 제대로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1차 시안작업 때는 전각 본연의 맛인 힘이 빠져버렸다는 평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 후 마우스를 칼 삼아 모니터에 점을 새기며 스스로 고암이 되어 보고자 했다. 기존에 발표되었던 서체를 분석해보며 적절한 점의 위치, 선의 모양 등을 정하고 하나의 원도에서도 힘의 강도에 따른 다양한 질감을 표현해보며 많은 시도를 한 결과 시안마다 전각 특유의 느낌을 살린 질감을 줄 수 있었다.


기본 서체의 완성과 패밀리 구성
 고암선생은 새김체의 디지털화 작업을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맡겨주셨다. 한 가지 시안에서도, 가령 ‘를’자 같은 낱자의 모양을 다양하게 표현한 후 그 서체에 가장 어울리는 조합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고 작업 내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작업 중 벽에 부딪히는 문제들은 팀원들끼리 머리를 맞대며 하나씩 실마리를 찾아갔고, 그래도 디자인이 잘 되지 않는 자소들은 선생께 추가요청을 하면서 2007년 11월 중순에는 기본 서체 1종인 완성형 한글 2,350자, 영문 94자, KS약물 986자를 1차 완료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이제부터였다. 고암새김체가 출시되기까지 그에 맞는 패밀리 구성과 네이밍, 홍보, 기획까지 디자이너 모두가 동참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바빠졌다. 굵기의 차이만 다른 패밀리 구성이 아닌, 사용자들의 필요를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업 틈틈이 구상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서체 패밀리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시안2(고암새김-나무)는 자소에 장식적 요소를 가미해 스타일을 강조한 레귤러 사이즈의 Original 한 종과 Medium, Bold 3종으로 구성되었다. Medium의 경우 ㅁ, ㅇ, ㅎ 등 획의 처음과 끝이 닫힌 몇몇 자음들의 내부를 채워 선이 아닌 면으로 그 모양을 나타내는 팬시적 요소를 가미시키고 획의 마무리를 소용돌이처럼 꼬이듯이 한 것이 특징인 서체로, 대소의 차이가 큰 글꼴들을 윗줄 맞춤으로 정렬하여 가독성과 운율감을 고려했다. 이는 고암선생의 초기 작업들의 스타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었다.


 
시안3(고암새김-땅)은 전각 특유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는 작업이었다. 중성의 세로 굵기 안에도 칼의 힘을 받아 홈이 생긴 부분까지 묘사하여 풍부한 질감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살리면서도 보다 새로운 느낌을 주기 위해 친근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 레귤러 사이즈 한 종의 Medium, Light 등으로 구성되었다.
 패밀리 라인으로는 큰 사이즈로 사용하였을 경우 중성의 홈과 자소의 텍스추어 넓이가 커진다는 것을 감안해 부담스럽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Simple 서체를 추가로 디자인해 활용도를 높였으며, 여기에 가로 세로 굵기의 비율 등이 보다 안정감을 주고 자소가 직선으로 정리되어 보다 정갈한 맛을 지닌 White 서체를 추가해 총 4종으로 디자인되었다.


 
시안4(고암새김-물)의 경우는 작가의 대표적 글씨를 모티브로 한 레귤러 사이즈 Original 한 종과 Medium, Bold 3종으로 구성했다. Original 서체는 말 그대로 고암선생의 전각 원도에 충실하게 작업한 것으로, 특히 ‘ㄲ,ㅅ,ㅊ’ 등의 글꼴들에서 고암 선생 특유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독특한 글꼴에서 오는 호불호가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문장이 길어졌을 때의 가독성 등을 고려하여 Medium도 제작하게 된 것이었다.

 
해와 나무, 땅과 물
 이렇게 해서 2007년 11월부터 시작되어 2008년 3월에 완성된 고암새김체는 ‘시안 1’ 3종,‘시안 2’ 3종, ‘시안 3’ 4종,‘시안 4’ 3종 등 총 13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들 각 시안에 평소 선생의 작품들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말, 꽃, 종, 발자국 등의 이미지들을 한 가지씩 딩벳으로 추가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세상에 나올 고암새김체에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고암선생과 디자이너 모두 서체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이름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평소 적색, 청색, 황색, 녹색 등 기본 색감을 이용하여 음양의 원리와 천지만물의 조화를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고암선생의 작품세계를 상징화할 수 있는 것들로 좁혀졌고, 마침내 사내의 의견까지 모아 적색의 해, 녹색의 나무, 황색의 땅, 청색의 물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들로 완성되었다. 

 이제는 9개월 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결실을 맺은 서체인만큼 좀더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원하는 사용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전각예술의 멋과 맛을 알리는 통로가 되길 바라며, ‘꿈을 품은 한 마리 연어처럼, 바다를 품은 한 마리 삼족오처럼’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고암선생의 열정과 솜씨가 보다 많은 사용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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