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이란? | |
전각에 대한 견해는 서예에 대한 이야기부터 소재의 범주에 대한 것들까지 논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말하여지곤 한다. 나에게 묻는다면 글씨와 그림, 조각이 합일되어 ‘금은동목석, 심지어 흙까지 모든 재료에 칼로 새기는 것’이라고 모든 범주를 담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전각은 독자적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도법(刀法)만 있는 서각(書刻)과는 달리 모각(模刻)의 한계를 뛰어넘은 창작작품만이 전각의 범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 |
예술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나의 예술작업의 시작도 무지에서 시작되었다. 전각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기 쉽지 않았던 시절의 불모지에서 사람들의 눈에 내 일은 그저 도장 파는 일에 불과했다. 무언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 잡혀 인장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그 의미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생업을 위한 고도의 기능에 불과했다.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예술이란, 대중과의 소통이다. 작가의 메시지나 스타일을 대중들과 나누는 일이다.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대다수가 인정하는 순간이 오면 이미 예술가는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대중이 몰이해하는 범주를 건드려 마침내 그 막힌 담을 깨뜨리는 일이 예술가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
전각가로서의 삶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
근사한 명분 같은 것은 없었다. 하고 싶었고, 해서 무언가 이루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저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자동차를 타고 한 걸음에 달려가기 보다는 더디지만 없는 길을 내면서 역사의 주름을 잡아가는 사람이 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이 전각을 하게 한다는 것인가? | |
1970년대, 20대 후반부터 나는 무언가 내 삶의 버팀목이 될 것을 찾고자 무진 애를 썼다. “무슨 일이든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오랫동안 연애편지 쓰는 기분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답이 예술가로서의 삶이었다. 또한 10여 년이나 인장(印章)을 해오는 동안 무언가 더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갈증에 시달렸던 이유도 결국 그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전각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했지만 다들 손끝의 재주인 기능성과 고전 답습 정도에 머물 뿐 예술혼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 터여서 나는 개척자로서의 길을 나서야 했다. |
결국 전각의 예술성을 환기시킨 장본인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을텐데…? | |
마침내 전통인장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표현해내게 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바로 그 다른 점 때문에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은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처음엔 다들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늘 보수적인 서단과 미술계의 잣대인 ‘정통성’이라는 벽에 부딪혀야 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미술대학을 갔더라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전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
그렇게 일말의 후회도 없는 전각의 매력은 과연 무엇인가? | |
전각공부는 처음에 지름이 3Cm밖에 안 되는 방촌(方寸)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 작은 공간 안에 점과 선과 면이 직곡(直曲)의 합일로 어우러지도록 하는 작업은 우주를 끌어들이는 작업이라고 할 정도로 리듬감과 테크닉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나는 그 세계의 아름답고 절묘한 맛을 비단 인장 뿐 아니라 타이포그래피 디자인,판화 등 여러 평면적인 예술분야와 조각, 설치 등 입체적인 작품세계로 표현해내는 실험을 계속해왔으며 최근엔 퍼포먼스나 애니메이션의 영역까지 접근하는 등 전각의 세계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모든 과정과 노력이 내게는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언제나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할수록 더욱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 |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일이란 단순히 여러 분야에 명함을 내민다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남다른 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
전각이라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들, 가령 도장이나 빨간색을 떠올리는 등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우선 다색화(多色化)를 모색했다. 빨간색만이 아닌 우리 고유의 오방색(五方色)과 전각의 오방색인 적록청황흑(赤紫靑黃黑) 또는 금박·은박을 이용하여 우리의 정서를 보다 다양한 느낌으로 담아내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비단 글자만이 아닌 전각화(篆刻畵)를 시도하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현대적인 감각의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아마도 회화적인 전각화를 시도한 것으로는 세계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 | |
그러한 노력들이 현대 전각의 개념과 위상을 바꿀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그 이전까지는 전각의 위치가 서예의 한 분야 정도로만 여겨지지 않았던가? | |
전각을 서예의 하위 개념이 아닌 현대 예술의 한 분야로 정립해나가기 위한 노력은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 90년대 초중반 굵직한 미술대전에서의 잇단 수상이 내 독립운동을 의미 있게 해주었는데, 특히 95년 조계사에서 세계 처음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한 금강경을 선보였던 것이 개인적인 입지 뿐 아니라 전각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인식시키고 나 자신에게도 사명감을 더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새김아트라는 용어를 주창하게 된 것도 그 사명감의 발로에서였나? | |
현대의 전각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사용해온 전각이라는 용어의 틀 속에 담기에는 훨씬 넓은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뭔가 새롭고 넓은 그릇이 필요했고, 그 해답으로 ‘새김’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법(子法)에 있어 그저 전서의 스타일에만 국한되거나 돌이나 나무 등 재료에 한계를 두거나 일정한 색만을 고집하는 등의 기존의 우물에서 벗어나 보다 광활한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표현해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단순히 물리적인 작업 뿐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감성까지도 새겨 넣어야 진정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
전각을 글꼴상품으로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
평소 멀티 아티스트가 되고자 애써온 사람으로서 전각의 디자인 상품화 또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최근 전각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혹은 알고 사용해서 표절시비에 걸리게 되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상품화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예술이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꼭 처음부터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좀 더 발전시켜 인류문화사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작품을 하는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사라지지 않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 TD> |
한글전각을 하면서 느끼는 한자전각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
한자의 경우 상형문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좌우대칭형이기 때문에 모양을 내기가 쉬운 편이다. 그런데 천지인의 원리를 원·방·각만으로 기호화한 한글은 직선과 곡선의 구분이 매우 명확한 기하학적인 문자로 결과물은 보다 모던한 반면 시각적인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서간체와 궁체, 훈민정음 목판본 등을 종합분석하면서 경직된 각도를 벗어나 공간을 재구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나름의 조형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다. | |
최근 붓글씨를 서체화한 캘리그래피를 비롯해 손글씨가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데, 전각서체 역시 손맛이 관건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한가? |
전각서체는 새김이라는 고유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손글씨와는 여실히 차별화된다고 본다. 종이 위에 쓴 글씨만으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것들과 달리 전각서체는 먼저 인고(印稿)를 쓴 뒤에 그것을 돌이나 나무 등의 재료 위에 쓰고 새겨 찍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며, 따라서 다루는 재료의 물성과 칼맛이 느껴지는 질감 있는 서체가 되는 것이다. | ||
특유의 비주얼적인 완성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 ||
가장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가장 철저하게 숨겨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리고 토할 것만 철저하게 토해내야 한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늘 경계하며 직곡의 강약과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 ||
전각이라는 장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늙지 않는 느낌이다. 미래를 향해 가는 현대예술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누구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하고 있으니 생각만은 오히려 더 젊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
'온한글이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일본 캘리그래피의 대가 오기노 탄세츠 (0) | 2009.02.04 |
---|---|
[인터뷰]<건방진 우리말 달인>의 저자 -엄민용 (0) | 2009.02.03 |
[인터뷰] 이상규 국립국어원장-한글날 큰잔치 조직위원회 (0) | 2009.01.29 |
[인터뷰] 장성환-우유부단함에 대한 유쾌한 조언, 사인 (0) | 2009.01.23 |
[인터뷰] 대학생 한글꼴 모임의 의의 - 한울 7.0 회장 함민주 (0) | 2009.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