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적에, 한글 이름을 짓는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민’이라는, 당시로써는 지극히 평범한 한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는 ‘아롱’, ‘새로운’, ‘한듬’같은 이름이 많았습니다. 한글과 한문이 결합된 '새로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배도 있었어요.
아무리 유행이었다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한문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 이름을 둘러싼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곤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말, 친구중에 ‘한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었습니다. 예쁜 이름처럼 얼굴도 곱상한 남자 녀석이었죠. 하루는 이녀석이 고민을 털어놓더군요.
“야. 나 한문 이름 어떻게 써야 하지?”
1993년... 당시에는 박정희에서 전두환 정권을 거쳐 살아남은, ‘교련’이라는 군사훈련 과목이 엄연히 살아남아 있던 시절이었어요. 남학생들은 고등학교 진학하고 몇 주 후면 당연히 교련복을 준비해야 했던 시절입니다.
당시 저희 학교는 교련 선생님의 명령으로 교련복 왼쪽 가슴에는 꼭 한문으로 속칭 ‘오바로크’라 했던 자수로 박은 이름을 새겨야 했습니다. 이름이 ‘한빛’이고, 한자 로 표기할 수도 없다보니 엄청 고민이었던거죠. ‘미친 개’라는 별명의 교련 선생님께 여쭤봤자 한대 얻어 맞기나 할 것 같고 말이죠.
출처: 한겨레 인터넷 기사 '민족분열 최전선 국민교육 있었다' http://bit.ly/dezn5r
“長 一 光”
하핫, 이 녀석! 엄청 고민한 끝에 결국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번역’해 버린거죠! 나중에 물어보니, 녀석의 형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해요. 한빛이의 형 이름은 ‘한별’이었거든요. =)
며칠 전, ‘한글 학회’에서 발표한 <또다시 ‘광화문’을 묻는다>라는 글을 읽으며, 갑자기 한빛이에 얽힌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이 짠하게 아파옴을 느꼈습니다.
(링크: http://www.hangeul.or.kr/board/view.php?id=cm01&no=518)
출처: 오마이뉴스 '광화문 현판 복원 3개월 만에 균열' http://bit.ly/cAOlE5
‘문화재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견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굳이 한문으로 복원하지 말고, 그냥 한글로 현판 달아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때 당시야 ‘높으신 양반’들은 한글로 말을 하면서도 표기는 죄다 한문으로 하면서, 우리 글인 한글은 ‘언문’이라며 낮추던 시대라... 서민들이 많이 사용하고, 우리 음 그대로 읽는 ‘광화문’을 한자로 표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이제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한글로 읽고 쓰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시절의 현판을 굳이 그대로 복원할 필요가 있을까요? 쳇... 그것도 제대로나 하지 말야...
부끄럽습니다만,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도, 한글에 조금 더 자부심을 가지고 예뻐합시다. 예전과는 달리, 서체도 예쁜 것 많잖아요? 당당하게 한글로 된 옷도 입고, 자기 이메일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프로필과 별명도 한글로 지어봅시다. 아, 저부터 한글 필명을 뭘로 할지 고민해봐야겠군요. 좋은 의견 있으시면 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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