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제호(題號) 아래 각종 원고를 수집,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편집 ·간행하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인 잡지가 어린이와 만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 ‘특정한 제호’이다. 특히 그 책의 독자가 어린이임을 제호에서 얼른 밝히거나 혹은 뉘앙스라도 풍겨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을 위한 수많은 정기간행물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하지만 잡지의 제호에 어린이라는 단어가 혹은 어린이를 뜻하는 다른 용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무조건 어린이 잡지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시중에 나와 있는 어린이 문학 평론지나 어린이 패션 잡지임을 표방하는 것들 중에는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물들이 어린이용일 뿐 정작 그 책을 읽는 독자는 관련 분야의 어른들이거나 부모들인 것도 있다.
계몽지에서부터 논술지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1906년 11월에 창간된 <소년 한반도>이지만, 근대적인 잡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1월에 창간된 <소년>이라는 잡지였다. 1923년에 이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에 의해 <어린이>가 창간되는데, 이전 개화기 시대까지의 잡지들이 그야말로 개화와 계몽에 치중했던 것과는 달리 <어린이>는 아동문학 출판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이른바 어린이를 위한 문학잡지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후 해방이 되면서부터 <소학생> <진달래> <새동무> <어린이> <어린이 나라> 등 보다 다양한 잡지들이 쏟아져나오며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는데, 1960년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동문학가 어효선이 일제시대의 <소년>의 뒤를 잇는다는 취지로 창간한 <새소년>이나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창간했던 <어깨동무>, 중앙일보가 창간한 <소년중앙> 등이 이른바 ‘소년지 빅3’ 체제를 구축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체제가 70년대를 관통해 80년대까지 이어지는데, <어깨동무>의 발행처인 육영재단의 박근혜 이사가 ‘건전하면서도 웃음을 줄 수 있는 어린이 잡지’를 만들겠다며 20여 편의 연재만화로만 구성된 <보물섬>을 창간한 것을 기점으로 어린이 잡지 시장의 판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한국일보사와 경향신문사가 각각 <학생과학>과 <소년경향>을 내놓는데, <소년경향>의 경우 처음부터 만화 페이지를 많이 싣고 출발했다. 그리고 기존의 잡지들에서도 만화의 비중이 커지면서 본래의 컨셉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하나 둘 폐간되게 된다.
모두 <보물섬>의 돌풍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큐점프> <소년챔프> 등 만화전문지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더니 90년대 어린이 잡지 시장을 만화천국으로 몰아갔다. 오랫동안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통의 <소년중앙>이 말년을 만화판으로 보내다가 결국 문을 닫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어린이 잡지 시장의 주류가 일본 만화의 해적판까지 들끓는 만화일색이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듯 2000년대에는 만화의 채널이 잡지보다는 단행본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논술 등 학습적인 성격이 강한 잡지들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학습지 출판사가 직접 뛰어든 경우들로, 학습지 쪽의 노하우와 데이터를 200% 활용하는 알찬 마케팅 전략을 펴고 있다. 심지어 과학잡지들까지도 논술과 연계된 컨텐츠를 짜내느라 너나 없이 골몰하는 모습이다. 학습지 성격의 어린이 잡지의 원류는 70년대 소년지 붐을 타고 잠시 출간되다 말았던 <우등생>에서 찾을 수 있는데, 본격적으로 그들이 시장을 주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린이들을 위한 순수교양지를 추구하는 잡지들이 달라 보일 지경이다. 1950년대에 창간되어 어린이 잡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새벗>이 그 명맥을 2000년대까지 유지해 오다가 잡지의 대열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지금, <고래가 그랬어>와 <개똥이네 놀이터>만이 이 시대 별종(?)으로 출간되고 있다.
어린이 잡지는 전문지이다
일반적으로 잡지의 종류는 주 독자층과 내용에 따라서 크게 대중지, 전문지, 특수지 등으로 나뉘는데, 어린이 잡지는 서점에 그들만의 섹션조차 가지고 있지 못할 정도로 그 시장이 미미하다.
<생각쟁이><시사통><논술위즈키드><논 주니어><우등생논술><키즈독서평설><리딩프렌즈> 등 어린이의 시각으로 시사문제를 다루며 논술적인 접근을 하는 잡지들과 <고래가 그랬어>와 <개똥이네 놀이터> <어린이 좋은 생각> 등 어린이들의 교양과 인성계발에 소구하는 잡지, <과학소년> <과학쟁이> <어린이 과학동아> 등의 과학잡지 등이 전부인데, 이들을 찾으려면 어른용 잡지의 분류기준에 근거한 각각의 섹션을 뒤져야 한다.
여기에 몇몇 종교잡지까지 더한다 해도 책꽂이 한 칸도 채 못 채울 양에 불과해서일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성격의 잡지는 아니지만 학습지 출판사나 학원 등에서 홍보 목적으로 발간하는 회원용 잡지까지 합하면 더 많은 세를 확보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시장이 작아서 ‘어린이 잡지는 전문지’라는 생각이 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특정한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가 전문지라는 점에서 어린이 잡지는 전문지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서의 잡지의 특성은 정보와 의견의 정기적인 전달과 오락의 제공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어린이 잡지들 역시 이러한 기능에 충실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활약은 교육적인 측면에서일 것이다.
시사문제를 다루는 잡지들의 제호에서 보여지듯이 중장기적으로 논술시험을 대비한 컨텐츠를 다루는 잡지가 많아진 것은 우리의 입시문화를 반영하고 있음이다. 중고등학생도 아닌 어린이들이 훗날의 시험을 대비한 잡지를 직접 고르지는 않을 테지만, 부모들은 아이에게 잡지를 선물하는 선심을 쓰면서도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선뜻 지갑을 열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아니 확신에 의거한 시장인 것이다.
과학잡지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잡지 제작자들이 독자들을 위해서(?) 지나치게 교육적이지만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독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들어 보거나 모델이 되어 보고, 혹은 토론자로 나서는 컨텐츠가 있는가 하면 연예오락 사이트에 대한 기사도 다양한 방법으로 싣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린이 잡지의 난점이 여기에 있다. 어린이 잡지는 그 속성상 독자가 되는 어린이들과 실질적인 구매층인 부모들, 두 종류의 집단을 동시에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 두 집단은 아주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알고 보면 너무나 다른 기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은 결국 제작자들의 기획과 편집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특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지일수록 더욱 잡지로서의 전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 잡지 출판에 사명감을 불태우는 기획자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 없다.
어린이 잡지 속 한글꼴의 부담
디자인적인 어려움도 어린이와 부모 두 집단을 설득해야 하는 컨텐츠 기획에서부터 시작된다. 단행본과 달리 문학, 과학상식, 시사문제, 학습, 연예오락, 요리 등 온갖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이합집산적인 컨텐츠를 일정한 컨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색깔도 보여주어야 한다. 게다가 아직까지 만화 섹션이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고, 평범한 어린이들을 직접 등장시키는 페이지가 적지 않아 비주얼에 있어서 세련된 페이지들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맹점을 처음부터 안고 가야 한다.
어린이 잡지 역시 기본적인 스타일은 잡지 시장 전체의 트렌드에서 영향받기 마련이다. 그 시대 편집 디자이너들의 시각적인 공감대가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한동안 이런 저런 실험적 요소들이 난무하던 지난 세대의 잡지들과는 그 양상이 달라져 레이아웃이 훨씬 정돈되었고, 컬러의 사용도 보다 세련되어졌다. 그리드 바깥 여백이 좁아진 모습도 눈에 띈다.
주목할만한 것은 잡지들마다 각 섹션을 위한 아이콘 활용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데, 그 잡지의 아이덴티티를 엿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로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또한 본문용 서체들을 점차 줄여서 자간과 행간을 좁힘으로써 텍스트 부분의 밀도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명조체 일색이던 것에서 벗어나 본문에 고딕체를 많이 쓰는 추세도 어린이 잡지들이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비중의 차이만 있을 뿐 서체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산돌 명조와 고딕, 윤명조와 윤고딕 등이 아직까지 대세로, 제목용 서체로는 개똥이체나 광수체 등 손글씨 스타일의 쓰임이 절대적으로 많아졌지만, 본문용 서체는 대동소이한 편인 것이다.
만화 페이지들에서도 작가의 스타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본문용 서체를 쓰는 경우도 많다. 어린이책 디자이너들은 한글서체를 6개 이상 고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어린이들의 감성과 잘 맞을 것 같은 서체가 있어도 편집작업에 들어가면, 가독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의 어린이책에서 디자인적으로 그 안정성이 검증된 서체를 되풀이해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험정신에 입각해 새로운 서체를 시도하는 것은 신선하다는 평가와 마케팅적으로 넘어야 할 산을 자처했다는 염려스러운 시선을 함께 받게 한다. 특히 제작기간이 단행본만큼 충분하지 않은 잡지의 경우 매달 마감일을 지키는 것만도 벅차서 섣부른 실험 따윈 엄두도 못낸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한 번만 삐끗하면 인터넷을 통해 곧바로 호된 질책이 피드백되는 세상이 아닌가?
어린이 잡지를 다루는 디자이너들은 어린이들의 감성에 와닿는 신선함에 가독성까지 겸비한 한글꼴을 기다리고 있다. 서체 디자이너들도 어린이책 전용 서체의 필요성과 세분화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렇다할 성과를 언제쯤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어린이 매체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완성된 상품의 적용 실험을 충분히 하지 않고서는 마감일을 다투는 편집 디자이너들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체 디자인 회사는 상품을 기획할 때 사용자들의 매체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험까지 계획해볼 일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서체회사들의 입장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적용하는 잡지의 고유한 디자인 컨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터인데 모든 잡지를 놓고 실험해볼 수는 없는 일이고, 모든 잡지에 쓰일 만한 결과물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보편적인 결과치가 얼마나 새롭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출판사들이 그 잡지만의 전용서체의 제작을 결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겠기에 어린이 잡지를 만지는 디자이너들의 만족도가 절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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