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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한글 책꽂이

<사랑한다 우리말>-알수록 반가운 우리 한글~

 

 말은 그것을 쓰고 부리는 이의 뜻과 마음과 앎을 남에게 전해 통하려는 도구다. 때때로 말은 도구됨을 넘어서 말하는 자의 의식이며, 그 사람 자체다.
 말은 그것을 쓰는 자와 하나됨 속에서 삶의 신령스러운 토대인 것이다. 말은 실재 현실 전체를 향한 정향(定向) 속에 이미 있는 것으로, 존재에 선행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은 우리를 무(無)나 공(空)에서 불러내 존재자로 세계의 안에 위치시킨다.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의 고립에서 벗어나 남과 통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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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無)나 공(空)과 다를 바 없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어로 참여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아 무언어의 경지에 애써 들려고 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생각이나 인식을 끊는 것이다.
 헛된 생각이나 인식은 번잡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저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음은 수행자들이 이승의 번민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다. 묵언 수행자에게 침묵은 깨달음의 경지로 통하는 길이지만 말은 아주 머나먼 우회로다.


 진리는 사물 자체로가 아니라 말의 참됨으로 나타난다. 말의 참됨이라는 비춤이 없는 사물은 진리가 아니다. 사물은 말 이전에 있는 것으로 말로써 불러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벗어나 그 존재성을 얻는다.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그것은 뜻 없는 사물에 지나지 않지만 꽃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아울러 말은 사람됨의 본새와 그 크기를 드러내는 도구다. 생각이 삿되지 않고 반듯한 사람은 말을 바르게 쓴다. 동양에서 도덕적 완성은 바르고 참된 말과 그 말에 부응하는 실천으로 도달한다. 말을 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말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말은 앎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앎에 잇대인 앎의 중요한 요소다. 자기도 모르는 것을 지껄이는 사람은 무지몽매하거나 미친 사람이다.
 


                                




 장승욱은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말 사랑이 깊어서 그걸 끌어안고 속내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이치를 캐본 뒤 그 뜻을 밝혀내는 우리말 연구자다.
 이전에도 장승욱이 지은 책을 읽고 큰 도움을 받은 바 있는데, 또 감칠맛 나는 우리 토속어를 모아 엮은 책을 새로 내놓았다. 토박이말은 우리 옛 어른들이 날숨과 들숨처럼 자연스럽게 쓰던 입말이다. 우리의 오랜 얼과 삶이 담겨 있어 알면 알수록 반갑고 쓰면 쓸수록 그윽한 말이다. 연륜이 깊은 이 토박이말들은 우리의 자산이다.새것을 숭상하는 거센 세태에 밀려 사멸해가는 우리의 고운 입말들을 살려 쓰는 것은 잃어버린 자산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먼저 ‘아늠’과 ‘대궁’과 ‘이밥’과 ‘강밥’에 대해 살펴보자. 아늠은 볼을 이루고 있는 살이다.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에서 “그제야 아내는 말귀가 열리는가 아늠을 씰룩대며 비웃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대궁은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이다. 김유정의 소설 ‘산골 나그네’에서 “먹던 대궁을 주워 모아 짠지 쪽하고 갖다 주니 감지덕지 받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임금이 먹는 밥은 수라, 지체가 높은 이들이 먹는 밥은 진지, 아랫것들이 먹는 밥은 입시, 귀신이 먹는 밥은 메다.
 밥이라도 똑같은 밥이 아니다. 먹는 이의 신분 차이에 따라 그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밥은 지어진 질료적 형상에 따라 진밥, 된밥, 선밥, 탄밥으로 나뉘기도 한다. 반찬 없이 먹는 밥은 매나니, 꽁보리밥과 같이 두 번 삶는다고 곱삶이, 소금을 반찬 삼아 먹는다고 소금엣밥, 남이 먹다 남긴 밥은 대궁밥이라고 이른다. 이밥이라는 말을 그냥 쌀밥이라고 아는 사람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밥은 입쌀로 지은 밥이다. 이동하의 소설 ‘장난감 도시’에서 “상에는 하얀 이밥에 생선 토막이 올라 있었다”에서 보듯 이밥은 하얀 쌀로 지은 밥이다. 보리·콩·조·기장과 같은 잡곡을 쓰지 않고 밥 짓는 멥쌀로만 지은 밥이 이밥이다. 입쌀과 찹쌀을 아울러 볍쌀이라고도 하는데, 입쌀은 밥을 지으면 끈기가 적고 찹쌀로 지은 밥은 끈기가 많다. 강밥은 국이나 찬도 없이 맨밥으로 먹는 밥을 이르는 말이다. 송기숙 소설 ‘암태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 성미에 나대기는 남의 두 몫 세 몫 나댈 것인데 닷새 동안이나 한데서 말뚝잠에 강밥을 먹고 나면 몸이 견뎌날까 싶지 않아 미리 몸보신을 좀 해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어휘의 앞머리에 오는 ‘강’자는 대개는 드세고 호되며 억지스러운 성질을 암시한다. 강추위, 강더위, 강술이 다 그렇다.

 강모는 마른 논에 꼬챙이로 땅을 파서 억지로 심는 모를 이르고, 강술은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을 이른다. 반찬 없이 맨밥으로만 먹는 밥을 강밥이라고 하듯 상궤에서 벗어난 물 없는 논에 모심기,안주 없는 술 마시기도 강모, 강술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뒷바라지’ 이르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뒤에서 받쳐주고 도움을 주는 말을 뜻한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려면 우선 ‘바라지’가 무엇인지 아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뒷바라지’라는 말을 풀어놓은 항목을 보자. “바라지는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방벽의 위쪽에 낸 작은 창을 뜻하는 말인데, 옥바라지나 해산바라지와 같이 음식이나 옷을 대어주거나 일을 돌봐주는 일도 바라지라고 한다. 바라지를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함과 위안을 주는 것이 바라지인 것이다. 뒤에서 하는 바라지가 뒷바라지다.” 옥에 갇히거나 해산을 했거나 병에 걸렸거나 하는 사람들은 제 힘만으로 저를 거둘 수 없으므로 필경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렇듯 남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의 귀찮거나 괴로운 일을 대신 맡아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게 뒷바라지다.

 ‘드난’이란 말의 용례를 보자. 한무숙의 소설 ‘만남’에 “가르쳐 주는 분이 있다면 그 집 드난을 살더라도, 헛간에서 자더라도 해낼 테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드난은 사전풀이에 따르면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 지내며 그 집의 일을 도와줌.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드난이란 말은 본디 ‘들고 난다’에서 왔다. 그러니까 남의 집에 곁방살이를 하며 들고 나며 그 집안일을 돕는 것 혹은 사람을 말한다.
 남의 집 행랑 따위에 거처를 두고 낮밤 가리지 않고 드나들며 그 집일을 하노라면 내 처지를 돌보는 일엔 소홀함이 불가피하니, 그 집일에 매임이 되고 득달이 셀수록 제 처지는 괴롭고 누추할 수밖에 없을 터다. 드난살이의 어려움은 가난에서 비롯되었을 터니 그 일이 괴롭고 누추하다고 해서 남 탓할 일은 아니다.

 ‘앙짜’라는 말을 보자. 이것의 용례는 염상섭의 소설 ‘모란꽃 필 때’에서 볼 수 있다. “애기라는 아이를 보니 사실 총기가 있어 보이고 예쁘기는 하나 앙짜요 고집이 셀 것 같다.” 앙짜라는 말의 사전풀이는 ‘앳되게 점잔을 빼는 짓. 성질이 깐짝깐짝하고 앙상스러운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염상섭의 소설 문장에 나오는 앙짜는 첫 번째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짜라고 하는 이름씨들은 대개는 사람을 일컫는다. 괴짜, 별짜, 왈짜, 몽짜, 정짜, 은근짜들이 다 그렇다. 괴짜는 별난 사람을 일컫고, 별짜는 조선 말기 제복을 입지 않은 순결, 즉 별순검을 가리킨다. 왈짜는 깡패를 이르는 말이고, 몽짜는 음흉하고 심술 맞으며 욕심 부리는 사람이다. 정짜는 한 번 오면 물건을 꼭 사가는 단골손님을 이르는 말이고, 은근짜는 몰래 몸 파는 여자를 가리킨다.

 이밖에도 말가리와 모지랑이, 몸맨두리와 두매한짝, 미움바치와 윤똑똑이, 대궁밥과 밀푸러기, 든날벌과 도랑치마, 잡도리와 고수련, 비갈망과 동부레기 등이 이어진다. 우리말로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은 지 서른 해가 넘지만 토박이말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알곡같이 쓸모 있는 말로 가득찬 이 작은 토속어 모음집은 곁에 끼고 틈날 때마다 읽고 익혀두면 글 쓸 때 두루 도움 받을 만하다.
                        

 우리말 사랑에 남다를 뿐 아니라 곰바지런한 사람인 장승욱은 ‘사랑한다 우리말’에 쓸모 있고 아름다운 우리 토박이말 205개를 찾아내 그 뜻을 풀어내 생활이나 글에서 살려 쓸 수 있게 엮었다. 흩어진 토박이말들을 알알이 꿰니 그 정성과 살뜰함이 기분을 화창하게 한다. 몇 날 며칠을 곁에 두고 읽으며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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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뉴스메이커> 2007년 12월 25일자(755호)에 실린 서평을 필자의 재가를 받아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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