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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새로운 시선

소리가 보이는 한글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

 한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특이하다.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문자(written script)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글은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돕기 위해 개발했고, 특정한 날을 택하여 공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날을 기념하여 특별한 기념행사와 학술대회를 진행하는 나라도 필자가 아는 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한글은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독특하다. 한글이라는 문자는 말소리를 표현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고안되었다. 'ㅋ'은 'ㄱ'의 소리인데, 하나의 획을 더하여 기식성(aspiration)을 나타내고 있고, 'ㄲ'은 강한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ㄱ'을 추가하는 등 발성의 요소를 문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글의 자소(letter)는 음소(phoneme)를 그대로 표현하도록 고안되어 있어서, 하나의 자소는 하나의 음소와 거의 일대일로 대응된다. 즉 문자가 소리를 바로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문자가 말소리를 표현하는 정도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이 그 문자로 쓰인 단어를 배우고 인식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속성이다.
 
 한글의 자소는 초성, 중성, 종성으로 모아져서 하나의 음절(syllable)을 이루며, 단어는 한 음절 이상의 음절조합으로 구성된다. 한글의 음절은 또한 몇 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단어 내의 음절 각각은 한자처럼 시각적으로 구분되며(예를 들어 '학교'라는 단어는 '학'과 '교'라는 시각적으로 구분된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음절은 형태소(morpheme; 의미 최소 단위)라 하여 뜻이나 문법적 기능을 지니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먹었고'의 경우에 '먹' 음절은 동사로서의 뜻과 기타 언어학적 정보를 지니고, '었'은 과거시제를 나타내며, '고'는 '그리고'처럼 이어지는 다음 말과의 연결성을 알려준다.
 
 말소리를 다루는 기존의 분야들은 음절을 소리의 한 단위로만 논해 왔다. 그러나 필자가 인간을 대상으로 단어인식 실험을 진행하던 중에 음절의 여러 다른 속성을 구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반란'이라는 단어는 2개의 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기로는 '반'과 '란'으로 구성되지만 말소리로는 '/발/'과 '/란/' 음절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표기(orthography)에서의 음절과 말소리(phonology) 차원에서의 음절의 차이는 인간이 단어를 인식하는 데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표기 차원의 음절과 말소리 차원의 음절을 구분할 필요를 느꼈고, 이에 따라 전자를 표기음절(orthographic syllable)로, 후자를 음운음절(phonological syllable)로 구분하였다.

 또 다른 음절적 특성은, 한 음절에 뜻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반란'의 '반'은 형태소로서 뜻이
있는 반면에 '나무'의 '나'는 뜻은 없고 단지 말소리와 글자형태만을 지니는 음절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음절의 특성도 인간의 단어인식 과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필자는 전자를 형태소음절(morphological syllable)로 후자를 비형태소음절(non-morphological syllable)로 구분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글은 언어학적 단위(linguistic unit) 측면에서도 시각속성 요소(visual feature),자소(letter), 음소(phoneme), 여러 종류의 음절(즉, 철자음절, 음운음절, 형태소음절)로 구분되어 있어서,다양한 정보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예를 들면, 영어의 'television'을 한글로 '텔레비젼'으로 표기하면, 영어의발음과 상당히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음절문자인 일어 문자의 경우에는 영단어를 표현하기에 매우 부족하여, 영어가 원래 지닌 소리를 부정확하게 표기한다. 한글의 이와 같이 우수한 점은 기본적으로 자소 혹은 음소 수준의 언어학적 단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한자는 기본적으로 음절단위로 표현되는데, 한글에는 적절한 음절단위가 있어서 한자를 한글로 쓰는 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다. 또한 형태소 단위도 지니고 있어서 형태소음절만 추가하면 표현하고 싶은 다른 단어를 얼마든지 생성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 '장'이라는 형태소음절을 추가하면 새로운 단어 '학교장'이 만들어지고, '학교장'에 '실'이라는 형태소음절을 더하면 '학교장실'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한글은 다양한 단위를 지니고 있어서 여러 수준의 정보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한글은 다양한 수준의 언어학적 단위를 반영하고 있는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사용하기 쉬운 문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말소리를 투명하게 표현한 한글

 인간은 말소리로 언어를 획득한다. 5세 정도 되면 모국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생성해낸다. 태어나서 말소리를 듣고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 없다. 단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그 언어를 배운다. 그러나 읽기는 교육과 학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동이 문자로 쓰인 단어를 읽고 이해하려면, 그 문자 단어를 본인이 알고 있는 말소리 단어로 바꾸는 과정을
학습해야 한다. 읽기에서 아동이 배워야 하는 것은 문자 단어를 그 구성요소인 자소, 음절 등의 하위 어휘요소(sublexical unit)로 분리해내는 것과 분리된 하위 어휘요소를 말소리 단위로 바꾸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문자 단어를 말소리로 전환한 후에는 이전에 획득한 말소리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단어이고,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의 이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를 배우는 과정은 문자부호를 말소리부호로 바꾸는 암호해독(decoding)이라고도 한다.
 암호해독 학습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요인은 문자 단어의 하위어휘요소가 말소리 단어의 구성요소를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글의 문자 단위인 자소(letter)는 거의 일대일로 말소리 단위인 음소(phoneme)와 연합되어 있다. 그래서 자소와 음소의 연합규칙을 학습하고 나면 누구나 문자 단어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그런데 영어단어의 경우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영어단어 읽기의 어려움은 알파벹이 음소와 일대일로 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의 경우에는 자소가 음소를 명료하고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읽기획득 즉 암호해독과정을 배우는 것이 어렵지 않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문맹이 그렇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그렇지만,문자와 말소리 단위간의 연합규칙이 명료하지 못한 영어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미국에서는 문맹퇴치사업이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특성은 한글이 말소리를 투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오는 이점이다.

 자소와 음소 간의 일관성 있는 연합규칙은 쓰기를 배우는 데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에 받아쓰기 시험에서 선생님이 불러주는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틀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자를 쓰는 과정은 뇌에서 두 종류의 원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 방법은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틀린 경우에 해당되는 원리로써, 말소리로 표현된 단어를 음운음절로 나누고 다시 음운음절을 음소로 분해한 후에, 해당되는 음소와 자소연합규칙을 사용하여 자소로 바꾸는 경우이다. 이 원리를 사용하는 경우에 음소와 자소의 연합이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일관성이 없다면,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쓰기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 다른 글자 쓰기 원리는 말소리로 표현된 단어를 음운음절로 분해한 후에, 음운음절에 상응하는 철자음절을 기억 속에서 이끌어내고, 철자음절을 자소단위로 분해하여 적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하려면, 미리 음운음절과 철자음절을 연합하여 암기하여야 한다. 암기해야 하는 음운음절과 철자음절의 이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학습자는 매우 큰 어려움에 당면하게 될 것이다. 마치 한자의 글자와 대응되는 말소리를 쌍으로 암기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글처럼 음소와 자소 간의 관련성이 일관적이고 거의 일대일의 대응을 가지는 경우에는, 음소와 자소 연합에 대한 규칙만 학습하고 나면 학습하지 않은 것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 또한 한글 말소리를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되는 현상이다.

 
 단어 인식과 관련된 한글의 특성

 한글처럼 자소와 음소 간의 관련성이 투명한 문자와, 한자처럼 철자음절과 음운음절의 관련성이 불투명한 문자-왜냐하면 한자는 자소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소와 음소간의 관련성을 생각할 수 없다. 단지 한자는 부수로 나뉠 수 있고 이 부수도 음운음절과 관련될 뿐이다-로 쓰인 단어는 뇌에서 다른 방법으로 인식된다.
 단어의 인식은 대분하여 두 종류의 과정을 거치는데, 하나는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자소나 음절과 같은 하위어휘요소를 이용하여 단어항목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어항목과 관련된 단어지식 정보를 활성화시켜서 이후의 문장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와 같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는 경우에, 처음에는 'ㅇ'으로 시작하는 부분을 찾고, 그 다음에는 모음 '어'부분을 찾고, 그래서 '어'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만나게 되고, 그 단어들 중에 'ㅁ'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골라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최종적으로 '어머니'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라는 자소 혹은 음절조합이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단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이전에도 이미 '어머니'가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라는 단어항목 밑에 기록되어 있는 단어의 발음, 품사, 의미, 유의어 및 관련된 단어,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용례 등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 단어항목 밑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정보를 끄집어내어 '어머니'가 왜 그 문장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하면, 궁극적으로 그 단어를 이해 혹은 인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실험결과에 의하면, 한글단어는 왼쪽 뇌에서 주도적으로 인식되고, 한자단어는 오른쪽 뇌에서 주도적으로 인식된다. 즉 단어항목이 존재하는가를 판단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처리가 한글단어는 좌뇌에서, 한자단어는 우뇌에서 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로'라는 표현에 주의하여야 한다. 한글의 정보처리가 좌뇌에서만 일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뇌에 존재하는 사전(심성어휘집(mental lexicon) 이라 부른다)은 왼쪽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글의 경우에는 바로 심성어휘집을 이용하여 단어의 의미 같은 정보를 인출해낼 수 있지만, 한자단어의 의미 같은 정보를 인출하기 위해서는 우뇌를 거쳐 좌뇌의 심성어휘집에 접속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실험결과는 문자가 말소리를 얼마나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느냐에 따라 뇌에서의 단어인식 방법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뇌 좌우 반구의 차이 외에도 여러 실험의 증거들이 문자가 말소리를 표현하는 정도에 의해 시각적인 단어인식과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인간의 뇌는 적어도 글읽기에 있어서는 문자의 언어학적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문자를 해독할 수 없어서 읽기를 수행하지 못하는 언어장애를 난독증(dyslexic)이라고 하는데, 위의 연구결과를 추론해보면, 한글 단어만 읽지 못하는 환자와 한자 단어만을 읽지 못하는 난독증환자가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필자와 공동연구자들은 이런 종류의 환자를 발견하였다.
 한 여성 난독증 환자는 고졸의 학력인데도 '土', '四'처럼 매우 쉬운 한자를 전혀 읽지 못하는 반면 한글문자로 쓰인 단어는 거의 완벽하게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직 대학교수인데 뇌졸중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난독증 증세를 가지게 된 한 남성환자는 한자단어는 어려운 것도 잘 읽고 이해하는데 한글단어는 거의 읽지 못했다.
 이런 연구결과는 문자와 말소리가 관련되어 있는 방법에 따라 단어인지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래의 뇌 사진은 한글단어를 인지할 때와 한자단어를 인지할 때 활동하는 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kbs 위기탈출넘버원>

 뇌 영상의 여러 영역과 관련된 기능을 제한된 지면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문자의 종류에 따라 활동하는 뇌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한글 단어가 인식되고 저장되는 뇌의 양상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쓴다. 예를 들어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를 어절이라 부른다. 각 어절은 '남교수가'에서처럼 몇 개의 단어 즉, '남교수'와 '가'로 구성되거나, '하였다'에서 '하', '였', '다'처럼 몇 개의 형태소로 구성된다.
 필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남교수가'처럼 명사로 구성된 어절은 뇌에 명사 따로 조사 따로 저장되어 있다. 반면에'하였다' 같은 동사어절은 '하였'+'다' 형태로 뇌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였'은 함께 저장되어 있고 '다'는 별도로 기억되어 있다. '남교수가'가 뇌에 저장되어 있는 구조는 일반적인 상식처럼 단어별로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였다'와 같은 동사어절의 경우에는 뇌 사전에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을까에 대해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서는 '하다'로 적혀 있지만 '하였다'가 '하다'에서 출원되었다는 지식이 없으면 국어사전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 지를 알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인지신경과학적인 실험결과를 토대로 필자가 얻은 결론은 '하'와 '였'은 함께 묶인 형태로 저장되어 있고, '하였다'의 마지막 부분인 '다'는 문장의 종류를 나타내는 부분인데, 이 형태소는 따로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다. 이런 저장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정보처리의 경제성(cognitive economy)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인간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최상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억용량은 최소로 유지하면서도 정보의 변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왔다. 만일 '하', '였', '다'를 별개로 저장하고 있으면 뇌의 기억용량을 최소로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하'와 같은 형태소가 어떤 뜻으로 저장된 것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하'가 '하다'의 동사어간일 수도 있고, '下', '夏', 등의 다양한 다른 뜻의 형태소일 수도 있다.
 반면에 '하였다'를 전체로 기억하고 있다면, '하다'라는 동사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하였고', '하였지만', '하였을', '하였는데'처럼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그 변형 모두를 별개의 항목으로 기억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기억해야 할 항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기억저장의 문제를 일으킨다.
 가장 이상적인 저장형태는 '하'가 가지는 여러 의미 중에 어느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으면서도 기억에는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였'은 하나로 저장하고 '다'는 따로 저장하는 경우에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을 이룰 수 있다. '하였'으로 저장되어 있으면, '하'는 '동사' 의미로만 사용이 가능하고 다른 의미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국어학적으로 볼 때 '였'처럼 가운데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10여 개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하'다음에 붙어서 변형을 만들 수 있는 가지 수가 많지 않다. 따라서 의미도 분명하게 할 수 있으며, 기억도 많이 필요하지 않는 이상적인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하였다'에서 '다'처럼 끝부분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50가지 이상이기 때문에 앞부분에 붙여서 기억하면 수많은 종류의 변형이 가능하고 이들 모두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을 준다. 따라서 기억의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붙여서 기억하는 것 보다는 분리해서 별도로 저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쓰며, 명사와 조사로 이루어진 어절은 명사 따로 조사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였다'와 '아름다워' 같은 동사와 형용사 어절은 뜻을 나타내는 앞부분의 형태소와 가운데에서 시제 등을 알려주는 형태소는 하나로 저장되어 있고,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등을 알려주거나 다음 어절과의 연결성을 알려주는 어절의 마지막 부분은 독립적으로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국어가 교착어이고 형태론이 잘 발달된 언어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한글문자가 표음적이면서 음절단위로 사용되는 특성과 위에 설명된 내용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필자의 실험실에서는 한글어절이 뇌에 저장되어 있는 부호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을 5년 동안 지속해왔다.
 첫 번째 연구주제는 위에서 말한 '하였'과 같은 어절의 일부분이 '하'와 '였'과 같은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 아니면 'ㅎ', 'ㅏ', 'ㅇ', 'ㅕ', 'ㅆ'처럼 자소 혹은 음소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는 국어어절이 음소, 자소, 혹은 형태소 등의 단위로 저장되어 있기보다는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교수는'과 '하였다' 같은 어절은 '남', '교', 혹은 '다'와 같은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결정적인 실험은 실어증환자(뇌출혈이나 뇌졸중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언어 사용에 장애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환자에게 사자 그림을 보여 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게 하는 과제를 요구하였는데, 흔히 명칭성 실어증으로 분류된 환자는 그림의 이름을 잘 말하지 못하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때의 짝 이름을 떠올리려고 할 때 얼굴이나 모습은 눈에 선한데 이름이 혀끝에 맴돌아서 잘 말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명칭성 실어증 환자에게 약 100여 개의 유치원생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그림을 보여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말하게 하면, 이 환자들은 50%도 넘게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환자들은 '그곳이', '그것이' 등의 지시어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발화한다.

 다음으로, 그들이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림들을 골라낸 후에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만일에 단어가 머리 속에 음소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ㅅ/로 시작하/아/로 끝나는 단어'라고 단서를 주는 경우에 이름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음소를 단서로 제공하는 경우에는 별 효용이 없었다. 그러나 "/사/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라고 음절단서를 제공하면 즉시 '사자'라고 말한다.
 신기한 사실은 "'자'로 끝나는 단어입니다"라고 할 때에는 말하지 못하다가 "'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하는 경우에는 잘 말한다는 것이다. 즉 단어를 뇌에서 찾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단어를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동등하게 찾아 들어가는 것이라면, 어떤 종류의 음절을 주든 관계없이 모두 그림 이름을 잘 떠올려야 한다. 그러나 환자는 왼쪽의 시작하는 음절을 제시해준 경우에 더 잘 말한다. 이런 결과는 '남교수' 혹은 '하였'과 같은 단어 혹은 어절의 일부분이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고, 음절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속 실험에서는 '하였다'의 '하' 음절이 철자음절인지 아니면 음운음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반란'이라는 단어는 철자음절로는 '반'으로 시작하지만, 음운음절로는 '/발/'로 시작한다. 언어심리학의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에게 '학교'라는 단어를 제시하면, 한 번에 바로 '학교'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첫 음절 부분에 의해 단어의 후보들이 뇌의 사전에서 활성화되고, 활성화된 후보들 중에 실제 제시된 단어와 같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단어가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뇌 사전에 국어단어나 어절의 일부가 철자음절 단위로 기억되어 있다면, 동일한 철자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에 경쟁이 있을 것이고, 음운음절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음운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의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험결과는 '반란'의 철자음절인 '반'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음운음절인 '/발/'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어휘경쟁이 일어났다. 즉 국어의 단어나 어절은 쓰인 모습대로의 철자음절로 저장되어 있지 않고 말소리로 읽을 때 생성되는, 또는 들을 때 사용하는 음운음절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설명도 위에서 적용하였던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뇌를 쓰는 한국인

 이어지는 실험에서는 이런 음운음절로 단어나 어절을 저장하고 있는 뇌 사전의 경우, 청각을 이용해 단어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것과 눈으로 보고 이해할 때 사용하는 사전이 각각 다른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인지를 조사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가 아마도 왜 한국인은 국어단어를 음운음절로 저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일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각으로 문장을 들을 때나 시각으로 동일한 문장을 읽을 때나 우리는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다. 이런 이유는 우리 뇌의 어느 부분에선가 청각으로 언어를 받아들이든 시각으로 수용하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문장을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의 실험에서 청각과 시각 문장처리 중 어느 단계에서 두 감각 간에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인지를 조사해본 결과,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미 청각과 시각이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문장을 청각으로 들을 때에도 단어나 어절을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음운음절로 분절하고 그 분절된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뇌에서 찾고, 시각으로 문장을 읽을 때에도 시각단어를 철자음절로 분절한 후에 분절된 철자음절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에서 그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찾는다.
 즉 시청각 자극을 받아들인 후에 청각이나 시각 모두는 자극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의 단어를 찾는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뇌에 존재하는 사전은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전은 말소리 정보에 기초하여 단어를 저장하고 있는 사전인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언어를 처음 배우는 것은 말소리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읽기를 배우기 전에도 어린아이는 이미 말소리로 된 사전을 뇌 속에 지니고 있다. 읽기를 시작하면 우리나라의 아동은 말소리가 투명하게 표현된 한글문자를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말소리로 전환하는 과정을 학습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동은 문자로 표현된 단어를 만나게 되면 먼저 철자음절로 분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 후에는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간의 관련성을 배우고, 그리고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과의 연관성을 적용하여 글 읽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의 아동은 읽기에 사용될 사전을 별도로 뇌 속에 새롭게 구성하는 것보다는 이전에 말소리로 이미 만들어 놓은 사전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읽기를 배우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제시된 단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영어처럼 철자가 음소를 투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들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과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이 별도로 존재한다. 한글을 창제하신 분들은 문자의 제자법이 이렇게까지 단어를 인지하고 저장하는 방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후세들이 한글문자의 표음적 특성과 뇌 활동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것이다.

 이제까지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과, 글 읽기와 단어인식에 대한 과정을 논의하면서 한글이야말로 매우 과학적으로 말소리를 직접 담아낸 가장 진보한 문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읽기학습과정과 배운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 본 결과, 한글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독특하고 효율적인 정보처리가 일어난다는 근거들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유산인 한글을 더욱 갈고 닦으며, 인식과 생성의 원리를 찾는 연구를 계속해 자랑스러운 우리 문자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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