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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새로운 시선

소리로 시를 짓는 몇 개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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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소리가 있다.
 눈 오는 소리, 바람 소리, 시계 소리, 의자 삐걱대는 소리, 마른 꽃이 조금씩 삭아가는 소리, 먼지 떠오르고 가라앉는 소리,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별빛 얼어붙는 소리, 고양이 수염에 졸음이 조심스레 엉겨 붙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져 저만치 달아나는 소리…….
 어떤 소리는 귀에 들리고, 어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떤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있지만 어떤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없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김광규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문학과지성사 2007년)에 실린 「춘추(春秋)」라는 시다.
 흥미로운 것은,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 병술년 봄을 보냈다”는 진술이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 그것이 시적 과장일 수는 있어도 ― 시적 진실을 어겼다고는말할 수 없다.
 인간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을 뿐이지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수유 꽃 피는 소리”는 들리지 않으므로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이다. 그래서 시인은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제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들리는 소리를 어떻게 실감나게 받아 적을까 하는 점이다.


텃밭에 가랑비가 가랑가랑 내립니다
빗속에 가랑파가 가랑가랑 자랍니다
가랑파 가꾸는 울 엄마 손 가랑가랑 젖습니다.

_정완영, 「가랑비」(『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사계절 2007년
)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의 동시조(童時調)인데, 우리말의 소리와 가락이 의미와 절묘하게 결합된 시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텃밭에 비가 내린다. 가느다랗게 내리는 “가랑비”(실비)이다. 시인은 그 소리를 “가랑가랑”이라고 받아 적었다. “가랑가랑”은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소리이다. 소리가 그것의 주체인 가랑비의 성질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비를 맞으며 “가랑파”(실파)가 자란다. 그 자라는 소리가 “산수유 꽃 피는 소리”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인은 더 밝게 귀를 열어 그 소리를 “가랑가랑”이라고 듣는다. 내리는 실비와 자라는 실파 사이를 이어주는 “가랑가랑”이라는 소리가 더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살갑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시가 더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이 둘을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랑가랑”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가랑가랑” 자라는 “가랑파”를 “가랑가랑” 젖는 손으로 가꾸는 어머니의 손길 말이다. 어머니의 그 “가랑가랑” 젖는 손길에 이르러 “가랑비”와 “가랑파”의 유순한 성질이 “가랑가랑”이라는 소리와 함께 독자에게 감각적으로 스며든다.

 이 시는 ‘텃밭’ ‘가랑비’ ‘가랑파’ ‘어머니’라는 소재를 “가랑가랑”이라는 하나의 소리로 이으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우러져 이룰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풍경을 더없이 작고 순박하게 펼쳐 보인다. 모두가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어서 조금만 함부로 대했다가는 곧 사라져버리고 말 것 같은 세계. 마치 평화의 실상이, 자연과 사랑의 실상이 그렇다는 듯이. 이런 작고 부드러운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가랑가랑”이라는 소리이다.
 들리는 소리를 어떻게 실감나게 받아 적느냐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시의 성패, 특히 의성어와 의태어를 즐겨 사용하는 동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는 소리를 좀 색다른 방식으로 받아 적은 경우이다.


풀벌레 소리는
말줄임표
……

장독대 옆에서도
풀숲에서도
……

밤새도록
숨어서
……

재잘재잘
쫑알쫑알
……

―안도현, 「풀벌레 소리」(『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년)



 제목이기도 한 풀벌레 소리를 받아 적었다. 이 시는 소리를 듣고 그 들리는 바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받아 적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 소리를 말줄임표로 받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진리의 실상은 언어화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세계(『노자』)를 연상케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뚜라미 소리를 ‘귀뚤귀뚤’이라고 받아 적는 순간 귀뚜라미 소리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귀뚤귀뚤’이라고 하지 않고, 예를 들어 ‘귀뚜라미가 운다 / …… / ……’이라고 나타내게 되면,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비언어성을 통해 비로소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실제에 가깝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시를 다음과 같이 고쳐 쓴다면 세계의 실상을 형상화하는 데 비언어화가 언어화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풀벌레 소리는
……
장독대 옆에서도
풀숲에서도
……
밤새도록
숨어서
……


 1연에서 “말줄임표”라는 말을 빼고 마지막 연을 삭제했다. 요컨대 풀벌레 소리를 마지막 연에서처럼 “재잘재잘 / 쫑알쫑알”이라고 언어화하는 것보다 “……”처럼 언어화하지 않는 것이 풀벌레 소리를 구체화하는 데 더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소리는 소리 자체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것보다 그것을 ‘○○ 소리’ 정도로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다.
 「춘추(春秋)」에서 독자가 시인이 말하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소리가 구체적으로 언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참새는 짹짹’이나 ‘하하하 호호호 웃었어요’에서 보는 것처럼 외부의 소리를 의심 없이 받아 적을 경우 흔히 표현의 상투성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런 난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의 객관적 소리는 종종 주관적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표현되기도 한다.
 뛰어난 소설과 함께 동시의 명편을 적잖게 남긴 이문구의 「들비둘기 소리」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에서 나는
새소리는
다 노랫소리 같은데
들비둘기 소리는
울음소리 같았다.
지집 죽구

지집 죽구
원통해서
못 살겠네.
흉내쟁이
합죽 할매의 흉내도
울음소리 같았다.

 ―『풀 익는 냄새 봄 익는 냄새』(랜덤하우스중앙 2006년)


 비둘기 소리는 ‘구구구구’나 ‘구국구국’ 정도로 받아쓰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지집 죽구 / 지집 죽구”라는, 전혀 새로운 소리로 기록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산에서 살아가는 새와, 사람들 곁에서 사람들과 어떻게든 관련을 맺으며 살아가는 들비둘기의 생태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사람들과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산새들의 소리는 하나하나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아 “다 노랫소리 같”이 들리지만, 사람들과 이웃해 사는 동안 그들의 대소사를 먼발치에서나마 어느 정도 겪어올 수밖에 없었던 들비둘기가 내는 소리는 분명 어떤 한스러운 인생을 환기하는 소리로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것이 내는 소리가 더욱더 주관적으로 인식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케 한다.


 이렇게 볼 때 들비둘기 소리인 “지집 죽구 / 지집 죽구”는 들비둘기 소리가 아니라, “흉내쟁이 / 합죽할매”의 “원통해서 / 못 살” 만큼의 어떤 한 서린 사연을 환기하면서 전혀 새로운 “울음소리”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소리 받아 적기가 단순한 흉내의 차원을 벗어나 주관적 감정과의 교류를 통해 새롭게 인식되는 순간, 소리는 소리의 차원을 벗어나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소리를 낳으면서 의미화된다.

 여기에 개구리가 있다. 이제 막 소리를 내어 울려는 참이다. 주의 깊게 따라가며 소리를 받아 적어 보자. 참고로 어떤 시인은 이렇게 받아 적었다.
“가갸 거겨 / 고교 구규 / 그기 가. // 라랴 러려 / 로료 루류 / 르리 라.”(한하운,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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