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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

한글의 제자 원리와 특징-소리를 디자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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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의 제자 원리

 「훈민정음」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해설을 한 부분은 첫머리의 제자해 (制字解)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글 자형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언어학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깊이 있게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적인 측면의 해설만을 토대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글 자모 28자는 각각 뿔뿔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자를 먼저 만든 다음 나머지는 이것들에서 파생시켜 나가는 식의 이원적인 체계로 만들어졌다. 자음(당시 용어로서는 초성)글자 17자는 먼저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제자해에서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래쪽 세 글자에 대한 내용이 쉬우므로 그 쪽부터 보기로 한다. 순음 ㅁ자는 ㅁ음, 즉 〔m〕음을 소리 낼 때 쓰이는 발음기관인 입술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치음 ㅅ자는 같은 원리로 그 소리, 즉 〔s〕음을 소리낼 때 조음점(調音點) 구실을 하는 이의 모양을, 후음 ㅇ자는 역시 같은 원리로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글자 ㄱ과 ㄴ도 그 소리를 낼 때 관여하는 발음기관의 모양인 혀를 본떠서 만든 점에서는 나머지 세 글자에서와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발음기관 자체의 모양, 즉 가만히 있을 때의 혀 모양이 아니고 바로 그 소리를 낼 때의 혀 모양을 본떴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아음(牙音, 즉 연구개음) ㄱ자는 그 소리 〔k〕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설근(舌根)이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으며, 설음(舌音) ㄴ자는 그 소리 〔n〕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혀가 윗 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는 것이다.

 설근이 목구멍을 막는다고 한 것은 혀 뒤 쪽이 연구개에 닿아 숨의 통로를 막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고, 혀가 윗 잇몸에 닿는다고 한 것은 혀끝이 윗 잇몸에 닿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다. 이때 ㄱ을 소리 낼 때는 혀 뒤쪽이 입천장까지 올라가므로 혀 앞쪽은 자연히 내려오는데 ㄱ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며, ㄴ을 소리낼 때는 반대로 혀 앞쪽이 윗잇몸에 가 붙으려니까 혀 뒤쪽이 처지게 되는데 ㄴ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 1과 그림 2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 그림은 〔ŋ〕과 〔n〕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각각 ㄱ과 ㄴ의 모습과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ŋ〕보다 〔k〕를 발음할 때의 것이 더 좋겠으나 해당 그림이 없어 대체한 것이다. 혀 모양에서는 똑같으므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것이나 좋을 것이다.)
  

   

 

  자음 17자 중 나머지 글자는 이 기본자에다 획을 하나씩 더해서 만들었다. 그 과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⑶은「훈민정음」의 해당 부분 원문이다.



 여기에서 획을 더해 만든 글자들은 그 화살표 앞쪽의 기본자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자음들이다. 즉, ㅋ은 ㄱ과 마찬가지로 아음(牙音)이며, ㅂ과 ㅍ은 ㅁ과 마찬가지로 순음(脣音)이다.

 같은 종류의 자음이되 획이 하나 씩 덧붙으면 소리가 한 단계씩 더 거센() 소리가 되는데 가획은 바로 그것을 표시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다만 괄호 안에 있는 글자들은 화살표 왼쪽의 기본자들로부터 가획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 경우에는 소리가 더 거세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뜻은 없다고 하였다.
 괄호 속의 글자 중 자는 그 중에서도 예외적인 글자에 속한다. 은 아음(연구개음)인데 그것을 아음의 기본자인 ㄱ에서 파생시킨 것이 아니라 후음 ㅇ에다 획을 덧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 ㅇ이 워낙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두 자는 오래되지 않아 자형에서 구분이 없어져 초성 자리에 쓰일 때는 아무 소리가 없는, 다만 빈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만 하게 되었고 종성 자리에서는 애초 자가 대표하던 〔ŋ〕으로 발음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음성적으로 거리가 먼 둘이 한 자형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모음(당시의 용어로는 중성) 글자 11자는 먼저 기본자 세 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이것들을 조합하여 만드는 방식을 취하였다. 기본자는ㆍ, ㅡ, l 인데 이들의 제자 원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음의 기본자 3자는 각각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음의 기본자들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글자들은 이들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과도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을 발음할 때는 각각 혀를 오그리고 펴고 세우게 되는데 ㆍ, ㅡ, ㅣ는 각각 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음자의 나머지 여덟 글자는 ㆍ 를 ㅡ와 ㅣ에 결합시켜 만들었다.




 이들 모음자 중 ⑸는 ㆍ를 하나씩 결합하여 만들고 ⑹은 두 개씩 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⑸ 가 단모음임을, ⑹ 이 이중모음임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것은 초출(初出)과 재출(再出)이라는 용어로 구별했는데 ㅛ, ㅑ 등은 ㅣ+ㅗ, ㅣ+ㅏ로 구성되어 있어 ㅣ에서 일어나는 소리이므로 재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ㆍ가 ㅡ의 위쪽과 아래쪽, ㅣ의 왼쪽과 오른쪽 어디에 배치되었느냐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여기에도 어떤 뜻을 담고 있다. ㆍ가 왼쪽과 오른쪽에 찍힌 것은 그 모음이 양모음 (陽母音) 임을 나타내주고, 아래쪽과 왼쪽에 찍힌 것은 음모음 (陰母音) 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엄격한 모음조화 규칙이 있었으며, 더욱이 훈민정음 제작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 (性理學)에서 음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으므로 양모음, 음모음의 구분이 이처럼 제자의 원리에까지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음자의 ㆍ는 「훈민정음」 및 「동국정운」(1447)에서는 제 모습을 지키지만 이들 이외의 문헌에서는 ㆍ가 아직 완전히 동그라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문헌에서나 동그라미 모양이 흐트러진 문헌에서나 다같이 ㅗ, ㅏ, ㅛ, ㅠ 등의 ㆍ는 이미 그것이 기원적으로 ㆍ자였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실용적으로 이들 모음을 「훈민정음」에서와 같은 형체로 쓰기 불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글자에서 ㆍ가 제 음가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ㅗ는 자형상으로는 ㅡ와 ㆍ의 결합으로 만들었으나 ㅗ가 음성적으로 ㅡ음과 ㆍ음의 복합이라는 뜻을 담았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ㅗ, ㅏ 등에서 ㆍ의 모습을 살려 둘, 그 글자의 제자 과정을 굳이 살려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이상 28자 이외의 자모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도 해설을 하고 있다. ‘세종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자모를 만들었던 것이다. 먼저 순경음(脣輕音)이라 불린 ㅸ가 있었다. 이는 ㅂ 밑에 후음 ㅇ을 연서(連書)하여 만든 것인데 순경음이 ㅂ에 비해 입술을 거벼이 다무는 소리임을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 ㅂ 〔p〕음이 폐쇄음임에 비해 ㅸ〔ß〕음이 마찰음임에서 생기는 차이, 즉 숨의 차단의 정도가 다름을 나타냈던 것으로 해석된다. ㅸ 이외에도 ㅱ, ㆄ를 비롯하여 등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한자음의 표기에만 쓰였을 뿐 한국어의 표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28자 이외의 자모로 ㄲ, ㄸ, ㅃ, ㅆ, ㅉ, ㆅ처럼 같은 글자를 두 개씩 겹쳐 만든, 이른바 각자병서(各字竝書)가 있었다. 이렇게 두 글자를 겹쳐 만든 것은 이 소리들이 엉기는 소리임을 표시해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엉긴다(凝)’는 표현은 된소리에 대한 인상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모음자에도 11자 이외에 많은 자모를 만들어 썼다. 이들은 그 발음에 따라 11자 중의 2자 내지 3자를 복합하여 만든 것으로서 ⑺에서와 같이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여기서는 ㆍ의 형체를 살리지 않고 현재의 글자체로 예시하겠다. 그리고 당시에도 한국어 표기에는 쓰이지 않던 6개의 자모가 더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빼기로 한다.)



  
 이상에서 보면 한글의 제자 원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글자의 모양을 발음기관에서 따왔든 천(天), 지(地), 인(人) 삼재에서 따왔든 그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 하나와, 낱자 28자가 제각기 다른 연원을 가지고 관련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 글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만듦으로써 글자의 조직성을 높였다는 것 하나다.
 이 중 발음기관에서 글자의 모양을 본뜨겠다는 착상은 매우 기발하며, 자모들을 이원적으로 만들겠다고 한 착상도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다. 한글을 흔히 과학적인 문자, 독창적인 문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특히 ㄱ과 ㄴ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에 대한 기술(記述)의 과학성은 각별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글 창제 때 중국 한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이나 그 이전 「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12월 조의 기록에 다같이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한글의 자형이 고전을 닮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표현이 너무 소략하여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글은 모양이 전반적으로 네모지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다고 해도 실제 자형은 여러 가지로 달리 디자인될 수 있을 터인데 입술의 모양이든 혀의 모양이든 ㅁ, ㄱ, ㄴ처럼 네모꼴로 만든 것은 한자의 영향일 수 있을 것이다. 기본 글자를 만들고 거기에 가획을 하거나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도 한자의 육서(六書)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한자뿐 만 아니라 당시 주변 국가의 문자들을 여러모로 참조하고 그것들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영향이든 한글의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발명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앞 시대까지의 축적된 지혜에서 한걸음 발전한 산물인 것이다.

 
2. 한글의 특징

 앞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면서 한글이 문자적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고, 다른 자리에서도 한글의 독특한 특징을 여러 가지 보아 왔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좀더 부연해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먼저 한글 자모의 복합성에 대해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이원적인 구성방식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자모의 한 부분이 어떤 음성정보를 대표하는 구실을 한다.
 가령 ㅋ은 한 자모지만 가운데 획이 분리되어 나올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유기성(〔+aspiratel〕)이라는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요소다. 이것은 ㅌ의 가운데 획도 마찬가지다. ㅛ,ㅑ등도 한 자모들인데 그 중의 한 획이 반모음 j 를 대표하고 있다. 한 자모가 한 음소보다 작은 자질들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 다른 문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 특징을 Chao(1968)는 다음과 같이 꽤 유머러스하게 지적한 바 있다.

 ⑴  한국 문자(‘한글’ 또는 ‘언문’ 이라 불린다)의 체계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있다. 첫째, 그것은 일본 문자인 ‘가나’보다는 알파벳에 가깝다. 둘째, 문자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단위 기호의 부분들이 음성의 분석적 자질을 대표하는 문자체계이다. 중국 문자에서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어떤 다른 문자체계에도 그러한 것이 없다. 예컨대, 영어의 자음 b는 기둥이 위로 되어 있어서 유성음이고 p는 기둥이 아래로 되어 있어서 무성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성 치음인 d는 기둥을 아래로 하면 q가 되는데, 만약 이와 같은 분석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무성 치음 〔t〕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문자에서는, 자모의 일부분조차도 때로는 음성학적으로 연관성이 있다. 예컨대, 경음의 글자는 평음기호를 겹쳐서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면, ㅅ은 평음 s이고, ㅆ은 경음 s(흔히 로마자로 ‘ss'로 표기한다)를 나타내며, ㄱ은 k를 ㄲ은 경음 k('kk')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모음자의 어떤 변형은 선행하는 반모음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ㅏ는 a, ㅑ는 ya, ㅓ는 를, ㅕ는 y를, ㅗ는 o를, ㅛ는 yo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이 특징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Sampson(1985)이다. Sampson은 순전히 한글만을 위해 지금까지 문자의 분류에 등장한 일이 없는 자질문자(featural writing) 란 종류를 하나 따로 설정하였다.
 
 <그림3> 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한 자모가 음소보다 작은 음성자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독립된 문자의 종류로 분류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글을 자질문자라는 별개의 종류로 분리해 내야 하느냐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문자의 분류는 각 자모가 한 덩어리로서 언어의 어떤 단위를 대표하느냐에 따라 음절문자, 음소문자로 나누는 만큼 한글은 그 점에서 역시 음소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이한 문자의 종류로 등록될 만큼 한 자모의 일부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한글은 글자들 사이에 유연성이 높다.
 우리는 ㄱ과 ㅋ이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요, ㄴ, ㄷ, ㅌ이 다른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라는 것을 글자형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또, ㅏ, ㅓ, ㅗ, ㅜ에 비해 ㅑ, ㅕ, ㅛ, ㅠ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글자들이며 그러한 공통점을 제외하면 ㅏ와 ㅑ, ㅗ와 ㅛ가 하나로 묶이는 글자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한 자모 안의 획이 무의미한 단순한 획이 아니고 어떤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획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은 한글의 다른 특징으로 ‘모아쓰기’에 대해서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음절 단위로 묶어 다시 한 자로 만들어 쓰는 특이한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세종실록」권 102의 기록에 나와 있다. 새 문자에 대해 거의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 그 짤막한 기록에서 이 모아쓰기에 대한 규정을 넣고 있는 것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이 규정은 「훈민정음」의 예의(例義)와 합자해(合字解)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모아쓰기에 대해서 이처럼 계속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방식이 워낙 특이 하여 올바로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음자와 모음자를 분리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다시 음절 단위로 묶어 운영하려고 하니 자연히 어려움도 따르고 세심하고 상세한 규정도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자, 즉 모음자를 초성자, 자음자와 완전히 다른 꼴로 만든 것이 무엇보다 그러하지만 글자 모양의 디자인에서부터 모아쓰기를 전제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한글을 이처럼 모아쓰기로 운영하려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당시 문헌은 으레 한자와 한글이 섞여 쓰였고 또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다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때 한자 하나에 한글도 한 글자의 꼴로 나타내는 것이 한글을 풀어 썼을 때 보다 어울렸을 것이다. 또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도 ‘訓民’을 ‘ㅎㅜㄴㅁㅣㄴ’ 으로 표기하는 것보다 ‘훈민’ 으로 표기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그 동기가 어떻든 모아쓰기는 한글로 하여금 매우 특이한 문자가 되게 하였다. 활자를 만들 때 한글은 ‘한’을 하나 ‘글’을 하나 독립된 활자로 만든다. 이때 ‘한’이란 묶음을 부를 언어학 용어는 무엇인가? ‘letter’ 도 아니요 ‘alphabet’ 도 아니요‘syllabary’ 도, ‘character’도 아니다. ‘alphabetic syllabary’ (Taylor1980) 라고나 할까?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그만큼 특이한 증거다.
 컴퓨터의 한글코드를 만들 때도 조합형으로 하느냐 완성형으로 하느냐가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완성형이란 처음부터 ‘ 한, 값 ’ 처럼 음절단위로 묶인 글자모양을 입력하는 방식인데, 이러한 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이 한국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역시 특이한 모아쓰기 방식이 빚어내는 사건들이다. 이 외에 더 근원적인 문제로 사전의 자모 배열 순서며 받침의 문제들이 있음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다. 한 마디로 모아쓰기는 한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한글의 운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일 것이다.

 * 이 글은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인 이익섭 교수의 저서 중 「한국의 언어」중에서 저자의 재가를 얻어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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