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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글'에 해당되는 글 19건
2011. 12. 19. 09:40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이자, 이제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도 국제식품 규격으로 승인받은 세계적인 음식이 되어버린 김치!!

그런데 "'김치'라는 단어가 우리 고유어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 선조들은 '김치'를 아주 이른 상고시대부터 먹어 왔습니다. 물론 초기의 모양새와 그 명칭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고 해요.
초기에는 무, 부추, 죽순 등과 같은 남새(채소)를 그저 소금에 절인 형태였고, 이것을 '디히'라 불렀습니다.


지금의 고추를 양념으로 하는 빨간 김치가 나타난 것은 고추가 국내에 들어온 16세기 후반 이후의 일입니다.
'디히'는 김치에 대한 순수 우리말이인데요, 옛 문헌에 보이는 '겨디히(겨울김)치'나 '앳디히(장아찌)'의 ‘디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디히'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옛말 '딯-(떨어지게 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요, 물론 '딯-'라는 어형은 문증(文證)이 되지 않습니다.
'딯-'는 지금 '지-(落)'로 남아 있는 중세국어 '디-(落)'의 사동형쯤으로 이해됩니다. 소금에 절인 채소는 가라앉기 때문에 '떨어지게 하다'는 의미의 '딯-'를 이용한 단어 만들기가 가능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디히'는 '디'를 거쳐 '지'로 변하게 됩니다. '지'가 '디히'로부터 변한 어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를 한자 ‘漬(담그다)‘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연히 우리말 '지'와 한자 '漬'가 음이 같고 또 의미까지 상통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일 뿐입니다.

'지'는 지금 서울말에서는 독자적으로 쓰이지 못합니다. '싱건지(소금물에 삼삼하게 담근 무 김치), 오이지, 젓국지(조기 젓국을 냉수에 타서 국물을 부어 담근 김치), 짓독(김치독), 짠지' 등과 같은 보수적 성격의 합성어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경남 및 전남 지역에서는 '지'가 '김치'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고유어 '지'를 대신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김치'입니다. 이 '김치'는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온 말입니다.
'침채(沈菜)'는 '절인 채소' 또는 '채소를 절인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의 김치는 그저 채소를 소금에 절인 음식이었기에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명칭이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유어 '디히'에 이어 한자어 '침채(沈菜)'가 만들어진 것은, '디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잘 쓰이지 않게 되자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침채(沈菜)'는 16세기에 '딤' 또는 '팀'로 표기되어 나옵니다. 두 단어는 제1음절 두음(頭音)에서만 차이를 보입니다. '팀'가 16세기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반영한 것이라면, '딤'는 그보다 앞선 시기의 한자음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딤'와 '팀'는 각기 다른 변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병존하고 있는데요, '딤'는 '짐' 또는 '짐츼'를 거쳐 '김' 또는 '김츼'로 변한 뒤 지금의 '김치'로 변하게 됩니다.
한편, '팀'는 '침'를 거쳐 '침채'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현대국어에서 '침채'는 제수(祭需,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재료)의 하나인 '절인 무'를 가리킬 때나 쓰일 뿐 '김치'에 밀려나 잘 쓰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치'라는 단어가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온 것이며, 그것도 '팀'가 아니라 '딤'에서 변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치'처럼 소중한 말이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한자어라니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침채(沈菜)'라는 한자어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위안을 삼을 만하겠습니다.

 
본문 내용 출처 -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1권(p.191~194), 조향범


작가소개 - 조향범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의미론을 전공하였고,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지만 그 뜻을 정확히 모르는 말의 어원에 관한 책을 여럿 펴냈다. 주요 저서로는 <국어 어원론>, <지명 어원 사전>,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1, 2>, <선인들이 전해준 어원 이야기>, <청주 지명 유래>, <국어 친족 어휘의 통시적 연구> 등이 있다.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김영선

ⓒ온한글

한요 | 2012.03.17 17:44 | PERMALINK | EDIT/DEL | REPLY
'김치'는 순수 고유어가 아니었군요. 좋은 정보 잘 보고 담아갑니다^.^
BlogIcon 김지호 | 2012.05.24 13:41 | PERMALINK | EDIT/DEL | REPLY
김치가 우리나라의 순 고유어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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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7. 09:02


국어 교과서를 통해 살펴보는 한민족 100년의 역사
- 국립국어원 ‘디지털 한글박물관’ <한민족 일깨우다! 국어 교과서 한 세기 특별전> 개최 -

국립국어원(원장 권재일)은 565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여섯 번째로 디지털 한글박물관 특별기획전을 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국어 교과서의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살펴볼 수 있도록 <한민족 일깨우다! 국어교과서 한 세기 특별전>으로 구성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이번에 개최하는 디지털 한글박물관 <한민족 일깨우다! 국어 교과서 한 세기 특별전>에서는 근대 이후 우리의 말과 글을 교육하는 데 쓰였던 대표적인 국어 교과서 66종을 근대 계몽기, 일제 강점기, 건국기 및 교육 과정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 메인화면>


<▲ 전시목록>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학습용 교재로 쓰이며 근대 교재의 효시로 불리는 『사민필지(士民必知)』부터, 학부(學部)에서 편찬한 최초의 국정 국어 교과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 『신정심상소학(新訂尋常小學)』 등 근대 계몽기의 국어 교과서가 이번 기획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근대 계몽기 소개>


<▲ 근대 계몽기 소개>



<▲ 근대 계몽기 소개>




또한, 1910년 강제 병합의 결과 우리말을 빼앗기고 ‘조선어(朝鮮語)’ 또는 ‘조선어급한문(朝鮮語及漢文)’ 교과로서 배워야 했던 일제 강점기의 여러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조선어급한문독본(朝鮮語及漢文讀本)』교재들, 해방 이후 본격적인 교육 과정기가 열리면서 편찬된 건국기 및 교육 과정기의 국어 교과서들까지 이번 전시회에 소개되어 있어 국어 교과서를 한 세기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일제 강점기 - 문맹 퇴치, 문자보급 운동>

<▲ 건국기 및 교육과정기 - 초등학교 교과서 소개>



별도로 마련한 기획관에서는 각 시대별 교과서에 쓰였던 삽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삽화의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 숨어 있는 교육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도록 삽화와 함께 그 의미를 쉽게 풀이한 설명문을 수록하였습니다. 또한, 각 시대별 전시 내용을 담은 문제(퀴즈)를 마련하여 방문객들이 관람한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확인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였습니다.

<▲ 기획관>



<▲ 기획관 삽화 특집>


시대가 바뀌면서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육자료도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교과서 이외에 다양한 시청각 교재와 교구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야말로 가장 오랫동안 우리 교실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한 대표적인 교육 자료이자 교구이며, 세기를 거듭하며 발견한 인간의 모든 지식과 지혜, 경험들을 담고 있는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한 세기를 이룬 국어 교과서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도록 시기와 주제별로 전시관을 구성하였습니다.

매년 10월 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기 위한 ‘교과서의 날’입니다. 이번 특별 기획전 <한민족 일깨우다! 국어 교과서 한 세기 특별전>은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교과서의 날’에 맞추어 시작하였고, 10월 5일부터 언제든지 디지털 한글박물관 누리집을 방문하여 이번 특별 기획전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번 특별 기획전을 통해 어릴 적 친구와 함께 공부하던 추억을 떠올리시며 그 시절 나의 국어 교과서를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온한글을 방문하시는 분들께 소중한 추억이 떠오르기를 바라봅니다. 


본문 내용 및 이미지 출처 - 국립국어원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김영선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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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9. 09:36
여러분은 사전이라 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나요?
전 어릴 적 국어숙제를 위해 찾아봤었던 두꺼운 사전도 생각이 나고요, 또 한참 자라서 얼마 전까지 들고 다녔던 전자사전도 생각이 나네요. 그러고 보니 사전에 참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이렇게 사전이 있었을까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지난 10월 제564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디지털 한글박물관(www.hangeulmuseum.org)에 국어사전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옛 사전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지털 한글박물관 <옛 사전 특별전 - 사전의 탄생과 변천>에서는 국어사전의 옛 모습을 중심으로 하여 국어사전 탄생 이전의 옛 사전의 모습과 국어사전 탄생 이후 특수 사전의 모습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요, 대표적인 국어사전을 비롯하여 총 30여 종의 사전류를 국어사전 이전관, 국어사전관, 특수사전관의 3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특별히 기획관을 마련해서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로 구성된 옛 사전의 편찬과정을 소개하는 간단한 애니메이션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사전에 대한 정의는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최근에는 콤팩트디스크 따위와 같이 종이가 아닌 저장 매체에 내용을 담아서 만들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는 예전의 두꺼운 책으로만 기억되는 사전보다는 전자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이 더 친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것이 사전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쳐 사전의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예전의 그 두꺼운 종이사전이 담고 있었던 내용과 그 명목은 변치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전자사전이 생겨나기까지 우리 사전이 어떤 모습을 거쳐 변해왔는지, 그 옛날 사전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예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의 용도로 사전을 이용했을지,

디지털 한글박물관의 <옛 사전 특별전 - 사전의 탄생과 변천>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미지 출처 - 디지털 한글박물관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김영선

ⓒ온한글

BlogIcon 이세진 | 2010.12.04 16:2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말모이'라는 말이 상당히 정겹고 귀엽게 느껴지네요.
'사전'은 딱딱한 느낌이 드는데 반해서...ㅎㅎ
BlogIcon 온한글 | 2010.12.06 09:44 신고 | PERMALINK | EDIT/DEL
순우리말이 더 정겹고 이쁜 단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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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8. 09:20

‘촌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살면서 콕 쳐박혀 다른 지방의 문화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도시 촌놈’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여행을 다닐 때마다 계속 들곤 합니다. 

얼마전에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 정도는 다 가봤다는 ‘제주도’ 땅에 태어난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야 발을 디디게 됐습니다. 제주 공항 입구를 나설 때 부터, 야자수에 코발트빛 하늘, 이건 뭐 딴나라 같네요. 

일단 배고프니 밥집부터... 처음 간 집은 흑돼지 두루치기를 전문으로 하는 ‘동성 식당’이었습니다. 털이 까만색이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흑돼지. 가격표를 보니 흑돼지 삼겹살은 비싸지만, 야채와 흑돼지 다릿살을 넣어 철판에 볶아먹는 두루치기는 1인분에 5000원 밖에 안되더군요. 두루치기가 익어가는 동안 메뉴판을 살펴보니, ‘돔베 고기’라는 메뉴가 있었습니다. 

간판에는 '돔배고기'라 적혀있지만, 보통 '돔베고기'라 합니다.

일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조선족 분이신지 더듬거리시다 한 손님의 테이블을 가리킵니다. 아, 흔히 말하는 돼지고기 수육 같네요? ‘돔베’가 돼지를 뜻하는걸까요? 이상하다... 내가 아는 돼지의 제주도 방언은 ‘도새기’인데. 아이폰으로 찾아본 결과, 돼지고기의 제주도 방언도 ‘돗괴기’인데... ‘모르면 물어가라’는 속담이 정답. 주인 아주머니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돔베가 육지 말로 ‘도마’이우다”


아하 =) 흑돼지 수육을 자른 채로, 바로 도마위에 얹어 내어서 돔베고기인가보네요~ 점심은 두루치기였지만, 저녁은 돔베고기를 잘 한다는 집을 찾아가 먹었습니다. 서울처럼 새우젓이 나오지는 않지만, 쌈장에 찍어 매콤한 마늘 한 쪽 얹어 먹어도 꽤 좋더라고요. 

이렇게 힘을 채운 다음날, 제주도에 왔으니 요즘 한참 제주도에서 ‘뜨고 있는’ 올레길을 걸어야죠? 그런데 올레길의 ‘올레’가 뭘까요? 모 통신사의 ‘olleh’는 아닐거고... 

중세 한글에서는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좁은 길 ‘오라’, 또는 ‘오래’라고 했다네요. 그것이 발음이 바뀌어 ‘올레’로 정착한 것이라죠? 거기다 ‘제주도로 올래?’라는 이중적 의미도 있고요. 

올레길 1코스를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에야 언덕도 많고, 숨이 좀 깔딱깔딱 하기는 했지만 조금 힘을 내 올라가니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이는 시원한 풍경이 보이는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능선 초입에는 작은 대피소가 있었고, 유리창에는 이런 말이 써있었습니다. 

해석하면 ‘올레길에 오셨어요?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놀다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정도가 되겠죠? 제주도 사투리는 섬 지역인 만큼, 한글의 원형이 가장 옛말과 비슷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쓰이지 않는 ‘아래아’ 발음도 아직 사용되고 있고요. 금방 알아챌 정도로 재미있는 규칙들도 많습니다. 

올레길 1코스 중간 정도를 걸어가니, 이제 슬슬 배도 고프고 피곤해 옵니다. 그때 보이는 쉼터. 지금은 운영하고 있지 않지만, ‘쉬영 갑서’라는 말이 괜스레 정감이 가네요? 천 원 밖에 안하는 미숫가루를 맛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 앉아 서늘한 바람 쐬며 미리 싸온 도시락 까먹기에는 딱 좋은 자리였습니다. 

대강 식사도 했고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물어물어 교통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경치가 끝내준다는 섭지코지로 향했습니다. 시원한 눈맛의 바다 풍경에 해풍를 맞으며 자란 억새의 풍경이 기가 막힙니다. 섭지코지는 ‘좁다’는 뜻의 ‘협지’ 발음이 바뀐 것이고, 코지는 ‘곶’을 의미하는 제주도 사투리였습니다. 

간판에는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제주 사투리가 써있습니다. 제주도 사투리는 받침이 ‘ㅇ’으로 끝나는 단어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를 ‘하르방’, 할머니를 ‘할망’, 아저씨를 ‘아즈방’, 아줌마를 ‘아즈망’이라고 하는 것 처럼요.

이 정도로 제주도 여행 이야기는 끝내야겠네요?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제주도 현지 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만, 다음번에 제주도를 오게 되면 꼭 제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거나 대화해 보고 싶습니다. 제주도 사투리는 어떤 느낌일까가 정말 궁금하거든요. =)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2기 이정민

ⓒ 온한글  

BlogIcon 세미예 | 2010.11.08 09:4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주도 사투리가 참 재밌고 독특하더군요.
잘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BlogIcon JMHendrix | 2010.11.08 10:17 신고 | PERMALINK | EDIT/DEL
감사합니다. 언제 차분히 혼자 여기저기 다시 한 번 걸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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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9. 11:27

오는 10월 9일은 한글날이 564돌을 맞는 날입입니다. 한글날은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에 대한 관심 촉구를 위해 만들어진 한글의 기념일 입니다. 어느덧 564돌을 맞은 한글날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한글날은 1926년에 시작되었다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의 공동주최로 세종대왕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회 한글날 행사가 이뤄진 이 때는 '한글날'이 아닌 '가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군요.


1932년, 한글날을 양력 날짜로 환산
이후 조선어연구회의 기관지인 《한글》이 창간되고부터 가갸날을 '한글날'이라 고치고 기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32년부터 양력 날짜(율리우스역서)로 환산을 해서 10월 29일에 기념 행사를 갖게 됩니다. 1934년에는정확한 양력 환산법(그레고리오역서)을 적용하여서 10월 28일로 기념일을 정정하였습니다.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고 정인지 서문에 반포일이 9월 '상한'이라고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 한글날이 현재의 10월 9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법정공휴일→기념일→국경일, 한글날에 찾아온 변화
한글 반포를 기념하는 날인 한글날은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공휴일로 정해졌습니다. 1990년이 되어서는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인 기념일에서 법정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게 됩니다.

2006년부터 한글날은 국경일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국경일의 휴무여부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인데,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도 쉬지 않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한글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도록 하자는 한글단체나 전문가들의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한글날인 매년 10월 9일이면 한글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집니다. 이번 주말에는 한글 관련 행사에 참석해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이세진

ⓒ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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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7. 09:30

오는 10월 9일은 한글날이 564돌을 맞는 날입니다. 한글이 이 땅 위에서 사용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요즘같은 글로벌 세상에는 한글이 오직 '한반도'에서만 사용되지는 않죠. 해외에있는 동포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 혹은 한글을 차용하는 찌아찌아족 까지…)

그렇다면 한글은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년』에 쓰인 한글의 모습

처음 『훈민정음』에 보인 한글의 모습은 대부분 오늘날의 것과 일치하지만 얼마간은 달랐다고 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ㅏ, ㅗ, ㅓ, ㅜ’ 및 ‘ㅑ, ㅛ, ㅕ, ㅠ’가 ‘ㅣㆍ, ㆍㅡ’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ㅏ, ㅗ, ㅑ, ㅛ’ 등을 제자할 때 ‘ㅣ’와 ‘ㆍ’를, 또는 ‘ㅡ’와 ‘ㆍ’를 좌우, 또는 상하에 하나, 또는 두 개 결합하여 만든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ㆍ’가 완전한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적인데요. 거의 모든 획들이 직선이면서 그 모서리가 원필로 되어 있는 것도 후대 문헌에서와는 다른 부분입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1447년』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7년
독자적인 모음으로서의 ‘ㆍ’의 동그라미 모습이나 획의 모서리 모습은 계속 유지됩니다. 그러나 ‘ㅏ, ㅗ’ 등에서 ‘ㆍ’의 동그라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날의 모습이 이미 이 무렵에 완성된 것입니다. 

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月印釋譜)』부터는 ‘ㆍ’도 더 이상 동그라미 모양을 띠지 않게 되고 다른 획들도 모서리가 조금씩 사각으로 바뀌면서 부드러워집니다.



자모(字母) 수의 변화
창제 당시 28자라고 하였을 때는 ‘ㆍ’, ‘ㅿ’, ‘ㆆ’ 등이 쓰였던 것인데 후세에 이것들이 쓰이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중고교시절 교과서에서 이러한 것을 한번쯤은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에는 ‘아’, ‘안’ 등에 음가 없이 쓰이는 ‘ㅇ’과 ‘강’, ‘풍’ 등에 쓰이는 ‘ㆁ’이 구별되어 있었는데 이 구별도 곧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기에는 28자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순경음 ‘ㅸ’도 활발히 쓰였는데 이것도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서 잠시 시험적으로 도입된 것이긴 하나 ‘ㅱ’도 쓰인 적이 있고 치음(齒音)을 ‘ᄼ, ᅎ, ᅔ와 ‘ᄾ, ᅐ, ᅕ로 구별하여 표기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된소리 표기의 변화
된소리 표기로 각자병서(各自竝書)라고 부른 ‘ㄲ, ㄸ, ㅃ’ 등이 그때에도 쓰이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아주 한정된 경우에만 쓰였고, 오늘날 된소리인 것들은 대개 ‘ㅺ’, ‘ㅼ’, ‘ㅽ’처럼 ‘ㅅ’을 결합한 이른바 합용병서(合用竝書)로 표기하였다고 합니다.
‘ㅴ’나 ‘ㅵ’와 같이 세 자음을 결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ㆅ’, ‘ㅥ', 'ㆀ'와 같은 결합도 사용하였었다고 하네요.


※자료출처 : http://www.hangeulmuseum.org/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이세진

ⓒ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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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13. 11:38

하나의 문화로서 한글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요즘,
문득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이 한글학자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죠.
저도 사실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고요. 그래서 오늘은 주시경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을 사랑했던, 주시경 선생 이야기

주시경 선생은 1890년 15세 때 국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셨는데, 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주시경 선생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8년 6월 역사지지 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년 6월 보통과를 졸업하셨습니다.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는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문자론과 표기법', '음학과 문법론',
'사전편찬' 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문 생활을 바로잡고자 행해진 주시경 선생의 연구분야는 <국문론>,
<국문연구>, <말의 소리>, <말모이>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

주시경 선생은 순한글 신문 제작을 위해 '국문동식회'를 조직하고 한글 표기법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일과 연구를 병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지만 서재필이 추방당한 이후 독립신문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학업을 마친 이후에는 지식인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 교사로도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 등 다양한 활동도 전개하셨죠.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문문법>, <대한국어문법>, <국어문전음학>, <말>, <국문연구>, <고등국어문전>, <국어문법>,
<소리갈>, <말의 소리>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만의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애국자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은 민족의 상징인 민족어를 통해 민족적 통일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국어 연구와 그 보급에 더욱 힘쓰고 한글을 사용하고자 하며 한글의 가로풀어쓰기를 시도하였고,
이름도 '한힌샘'이라는 한글식 이름으로 고치는 것 등은 주시경 선생의 애국계몽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자료 참조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3559b
http://100.naver.com/100.nhn?docid=140609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이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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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11. 09:18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백과>

지난 '07년도에 MBC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를 기억하실 분들이 있을런지요? 저도 아주 어렴풋이 기억하며 다음 카페검색하게 되었고 MBC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카페 이름은 바투바투인데요, 과연 한글창제의 미스테리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접근해 들어가겠습니다. (영상을 올리지 않는 이유는 저작권 문제때문임을 참고 바랍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많은 의혹의 일설 중에 인도의 언어와 일본의 신대문자에 관한 것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인도의 구자라트에서 발견되는 한글 간판과 실제로 영상에서는 분명 한글인데 다르게 읽는 인도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글은 인도의 언어에서 온 것일까요?

이번에는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요? 일본의 신사에 기록되어 있는 신대 문자, 신다이 문자라고도 하는 이 언어는 인도의 언어보다 한글과 더 흡사하고 음도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신의 언어라고 굳게 믿는 그 신대문자를 세종대왕이 베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전 외국 관광객들에게 관광 안내자가 한글창제를 설명하면서 한글의 글자는 '문풍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라고 말했다는 기사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도 말하고 쓰고 듣는 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일본의 신대문자를, 인도의 언어를 베껴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인도의 언어가 실제로 우리나라의 언어와 흡사함을 여러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령 신체부위에서 '이빨'을 인도에서는 '빨'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유사함이 다분하다고 해서 인도의 언어를 베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또 일본의 한 다큐메턴리 감독이 주장하듯 신대문자는 태초의 언어도 아니며 또 일본의 민간 신앙을 이끄는 지도자가 조선에 와서 신대문자를 세종대왕에게 전달해 준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일본에서 신대문자 99점을 보관하고 있다는 역사깊은 이세신궁에서 신대문자 옆에 보이는 현대의 언어가 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한글은 이러한 언어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창제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이 같은 한글창제를 둘러싸고 의혹의 눈길과 또 갖은 모방설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그 단초가 최만리의 상소문과 세종실록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기사에 썼던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에서도 한글창제를 둘러싸고 최만리와 진보세력이 상당히 갈등 했던 것처럼 실제 역사에서도 최만리는 "'한글'을 쓰는 것은 오랑캐들과 같아지는 것"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또 세종실록에서도 세종대왕이 고어를 참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은 분명 완벽하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상에 나오는 인도의 한 대학교수의 진술처럼 또는 일본의 일부 역사왜곡을 조장하는 이들의 진술처럼 한글이 그들의 언어를 모방했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 때문입니다. 사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연산군 때 없어질뻔 했는데요, 영상에서도 그때의 거사의 급박함을 보여주면서 연산군이 명백히 언문탄압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세종대왕이 만든 것을 그 후손이 막음으로써 언어는 단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만약 그때 훈민정음 해례본이 불타버렸다면 19세기를 지나 주시경 선생이 한글의 뜻을 밝힌다해도 이 수많은 의혹들을 벗겨내기에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한글의 자음은 사람의 입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그 원리는 익히 들어보아 아시겠시겠지만 'ㄱ, ㄴ, ㅁ, ㅅ,ㅇ' 에 한 획을 더 해서 'ㅋ, ㄷ*ㅌ*ㄹ, ㅂ*ㅍ, ㅈ*ㅊ, ㅎ' 이 나오는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모음은 사람을 뜻하는 'ㅣ'와 하늘은 뜻하는 '.' 와 땅을 뜻하는 'ㅡ' 이 세 가지를 만들어 '천지인'의 원리로 한글을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창제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없습니다. 있다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그의 천재성 그리고 그 천재성을 밝혀주는 해례본을 통해 과연 그 시대에 이런 과학적인 언어를 어떤 계기로 생각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미스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상의 마지막에서도 언급하듯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언어로 한글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이런 과학적인, 다시 말해 '조직적인' 언어로서의 한글은 조합이 잘 되어 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 찌아찌아족의 표기문자로 한글이 선택된 것도 알파벳이 적은 탓도 있지만 그 적은 알파벳으로 여러 언어를 만들 수 있고 또 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언어를 백성들을 생각하며 만든 세종대왕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죠.

그 자부심을 가지며 오늘도 우리말을 소중히 사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1기 김태형

ⓒ 온한글 




 
BlogIcon 김태형(간이역) | 2009.12.12 18:12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영상의 마지막에서도~' 로 시작하는 문장이 오타가 많아서 고쳤습니다. 다시 복사해서 온한글 블로그에 공개 부탁드리겠습니다. 14일에 공개되는지 알았는데 빨리 공개되었네요.
BlogIcon 온한글 | 2009.12.14 09: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김태형 기자님

말씀하신 부분 다시 수정해서 공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자격증무료자료받기클릭 | 2012.05.27 00:17 | PERMALINK | EDIT/DEL
해례본 미스터리글 잘 보았습니다.. 아래 자격증관련 정보도 있네요..

유망 직종 및 모든 자격증에 대한 자료를 무료로 제공 받을수 있습니다..

유망 자격증을 종류별로 무료 자료 신청가능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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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 | 2012.08.23 17:2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정말 답답하네요. 역사학자라는 놈들이 죄다 친일파라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않고 계속 감추려 합니다. 김해 허씨의 시조인 허왕후는 인도사람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쇄뇌한 반도사관으로 한반도 내의 사람들만 한민족으로 봅니다. 고대에 인도는 한민족들이 대거 이동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허왕후의 가문과 석가모니의 석가족입니다.
고마 | 2012.08.23 17:3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일본은 다 아시다시피 대표적인 한민족 이주 케이스입니다. 지금우리가 쓰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드셨지만 고조선시대에 음양법칙에 맞추어 표음문자와 상형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한자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이고 갑골문은 은나라에서 나왔으며 은나라는 고조선이 세운나라입니다.중국학자들 대부분이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직우리나라역사학자들만이 악을 쓰며 한반도에서 그런기록이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은 만주지방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고마 | 2012.08.23 17:36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한글의 경우도 그 원형이되는 글자를 고조선에서 이미 만들었습니다. 학자들이 이글잘 가림다 또는 가림토 한글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고조선의 세력과 고조선인들의 이주로 인해 퍼졌습니다. 즉 지금 한글이 자기들한테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나라는 실제로는 과거 한민족의 지배를 받거나 한민족이.이주해 간곳입니다
고마 | 2012.08.23 17: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일본은 다 아시다시피 대표적인 한민족 이주 케이스입니다. 지금우리가 쓰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드셨지만 고조선시대에 음양법칙에 맞추어 표음문자와 상형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한자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이고 갑골문은 은나라에서 나왔으며 은나라는 고조선이 세운나라입니다.중국학자들 대부분이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직우리나라역사학자들만이 악을 쓰며 한반도에서 그런기록이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은 만주지방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고마 | 2012.08.23 17: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정말 답답하네요. 역사학자라는 놈들이 죄다 친일파라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않고 계속 감추려 합니다. 김해 허씨의 시조인 허왕후는 인도사람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쇄뇌한 반도사관으로 한반도 내의 사람들만 한민족으로 봅니다. 고대에 인도는 한민족들이 대거 이동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허왕후의 가문과 석가모니의 석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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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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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날 어떤 언어생활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글이 없었을 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문자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고유문자가 없는 언어들이 어떤 문자를 채택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순수하게 한문을 사용했거나 한문에 한자로 토를 달았거나 향가에서 보는 것처럼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었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역시 조상들의 방법으로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문자가 없는 다른 언어의 경우처럼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등은 자신들의 언어를 적을 때에 로마자를 쓴다. 베트남어의 경우는 성조가 복잡하여 로마자에다 점과 기호 등을 부가해서 표기하는데, 로마자를 쓴다는 점에서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등과 다를 바 없다.

 그밖에 터키어, 스와힐리어, 소말리아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로마자를 문자로 사용한다. 우리도 이들처럼 문자 생활을 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어요’라고 적는 대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을 것이다.


 naneun jigeum pyeonjireul sseugo isseoyo.

 중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문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저명한 문인인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면서 한자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한자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대신 간화자로 크게 바뀌었으며 한어병음이라 하여 로마자가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편리한 언어생활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편리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문화적 자부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문자 일반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는 여러 문자가 있지만 언어의 수만큼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살아 있는 언어는 5천 내지 6천 개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들 중에는 문자가 없는 언어도 꽤 있으며 문자가 있는 언어들 중에도 실제 사용되는 문자는 백 개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의 공용어로 쓰이는 언어를 적는 문자는 30개 정도에 불과하다. 언어에도 사멸한 것이 있듯이 문자도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문자들 가운데 특정 시기에 특정인이 ‘만든’ 문자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들은 대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 차츰 진화해 왔거나, 다른 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창제’라는 말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다른 문자들 중에도 일부 만든 이가 뚜렷이 기록되고 인정된 경우가 있기는 하다. 410년에 아르메니아어 문자를 만든 아르메니아의 메스로브(Mesrob), 1283년에 태국문자를 만든 태국의 람캄행 대왕 등이 그들이다(타이문자는 캄보디아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다).

 이런 극히 일부의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자는 어떤 특정 시기에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서서히 조금씩 변형되며 형성되었다. 그래서 창제자를 말할 수 없다. 한글은 이에 반해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의 하나인 세종실록은 한글이 1443년에 만들어졌고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친히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지은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부터 왕자와 공주를 시켜 만들었다는 주장, 혹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을 리가 없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시켜서 만들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한글을 누가 만들었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은 세종실록 권102 세종 25년 계해 12월조 말미의 다음 구절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기록이 이러함에도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종대왕이 직접 단독으로 한글을 만들지 않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을 거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사에 바쁜 임금이 홀로 새로운 문자 체계를 고안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추정은 어디까지 추정일 뿐 기록상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상의 근거를 놓고 보면 실록에 ‘친제(親制)’가 명기되어 있는 만큼 직접 창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친제했다고 보더라도 이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몇 년만에 완성된 것인지,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 누구와 상의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된 지 3년만인 1446년에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간행되었다. 훈민정음해례는 새 문자에 대한 이론적 해설서이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문자 창제와 동시에 그 문자에 대해 해설한 책이 쓰인 경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집현전 학사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서 저술한 것이다(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고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배제했다가 해설서의 집필만 맡겼으리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기보다는 집현전의 학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부려서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 홀로 한글을 만들었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든 세종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새로운 문자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지만, 세종은 최만리를 크게 꾸짖으면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최만리는 세종 26년인 1444년 2월 상소문을 올려 새 문자를 만드는 데 반대했다.).

 그럼, 세종대왕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을까? 이는 ‘훈민정음해례’의 어제서문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서 어리석은 백성들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 생각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든다고 했다.

 과연 한문으로 우리말을 적기란 대단히 불편해서 양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이 문자생활을 하지 못하는 문맹상태인 것을 안타깝게 여겨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애민정신은 이미 ‘삼강행실도’를 만든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함으로써 풍속을 교화하려 한 것이다. 세종 13년인 1431년 한문본으로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후일 성종 12년인 1481년에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훈민정음해례’가 간행되고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이 바로 간행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석보상절>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돌아가신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님의 일대기를 서술한 것이다.

또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필요성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국 한자음을 통일할 필요성과 아울러 우리 한자음의 통일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데 한자음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소리글자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리글자로써 한자 하나하나에 대한 발음 표시를 해 두어야만 한자음이 통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 <동국정운>을 저술케 했고 중국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서는 <홍무정운역훈>을 저술케 했다.

 세종대왕은 당시 언어생활에 필수불가결했던 한자의 발음 통일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한자음은 매우 안정된 상태로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아무튼 세종대왕은 언어의 통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어떻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그가 기대하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에서는 편지를 한글로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고 16세기 이르러서는 한글소설이 저술되고 유통, 보급되기 시작했다. 관공서의 공식문서는 여전히 한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편지나 소설류 등에서 한글이 사용됨으로써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문학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해류가 만들어져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 내용을 접해보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15세기에 한글로써 간행된 문헌만 해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두시언해’ ‘악학궤범’과 같은 시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원각경언해>와 같은 불교 관련 문헌, <내훈>, <삼강행실도> 은 교화 용 문헌, <구급방언해>와 같은 의약 관련 문헌, <금양잡록> 등의 농사 관련 문헌,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어학 관련 문헌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글의 창제에 대한 이설에 대해 살펴보자. 한글이 고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가림토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하는 <한단고기(또는 환단고기)>의 기술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한단고기> 자체가 매우 의구스러운 문헌인데다 정말 고조선시대에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면 왜 그 이후에 사용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에서 쓰였던 ‘신대문자’를 본떠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신대문자’가 한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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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2. 13:0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날 거의 모든 활자 매체에서 본문용으로 쓰이고 있는 한글 활자체는 한글 명조체라 불리던 활자체다. 그런데 정작 이 활자체의 성격은 한자 명조체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왕조인 명조라는 이름 자체가 한글의 대표적 활자체 이름으로는 마땅치 않으므로, 문화체육부에 의해 '바탕체'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이 바탕체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쓰여져 사람들에게 본문용 활자체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오고 있다.




 바탕체는 본문용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어느 특정 활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한글 명조체라 불리던 활자체의 줄기 성격이나 닿홀소리 글자의 윤곽, 비례 등이 비슷한 활자체 모두를 뭉뚱그리는 활자체 이름이다. 따라서 같은 바탕체에 속하면서도 성격이 여러 가지로 조금씩 다른 활자체들이 많이 있다. 곧, 한 시기 안에서도 활자체를 설계한 사람이나 활자 제작사에 따라 혹은 같은 설계자라도 처음에 설정한 활자체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바탕체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하물며 시기를 넘어서서는 근본적으로 활자체의 성격이 많이 달라지게 되어 시대에 따른 다양한 성격의 바탕체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본문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바탕체의 형태구조가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변천과정을, 특히 170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글자 원리에 충실했던 기호적 구조의 한글 활자체가 약 250년이 지난 1700년대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필기도구인 붓의 성격, 필기의 자연스러운 손글씨 흐름과 활자의 균정(均整)함이 조화를 이루는 활자체로 완성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797년(정조 21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에 쓰였던 오륜행실도 활자체(그림1)다.

  물론 이 활자체 이전의 붓글씨나 목판 글자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글자체가 있었으나, 활자체로서 균정감과 통일감 및 조화감이 이처럼
 완성도 높게표현된 활자체는 이전 자료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 활자체야말로 오늘날 바탕체의 진정한 원조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본문용 활자체의 구조 변천을 살피기 위해 특히 1700년대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후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한 것은, 오늘날 대표적인 
  본문용 활자체가 바탕체며, 이 바탕체의 직계 원조라 할 수 있는 활자체가
 위에서 살쳐본 바와 같이 1700년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700년대 이전의 약 250년 동안 한글 활자체 변천의 직접적인 원인은
 손글씨의 영향이며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영향은 한글 붓글씨의 양식화
 였다. 훈민정음 창제기에 발표된 글자꼴은 붓글씨로는 표현이 어려운
 기하학적 성격이어서 이후 대략 150여 년 동안 한글 글자꼴의 붓글씨체는 일정한 양식이 정립되지 않았고, 목판글자체나 활자체도 부분적인 붓글씨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한글 붓글씨의 양식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특히 목판글자체에 그 영향이 나타나면서 한층 균형잡힌 글자꼴을 보이고 있다.
 한글 붓글씨 양식화의 결과는 ‘궁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한글 붓글씨의 전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에는 정체와 흘림, 반흘림 등의 양식 아래 글씨를 쓰는 이 나름의 다양한 개성들이 표현되고 있다.

 1600년대 말의 한글 활자체는 이미 정립된 한글 붓글씨체의 강한 영향으로 공간 균형이 잘 이루어진 글자꼴을 보여주고 있으나 활자체의 전체 성격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1700년대에 와서 한글 활자체에 큰 변화를 주게 되는 요인이 생겼는데 그것은 한자 활자 명조체의 출현이었다.  이는 중국(明)에서 수입한 명판본(明版本)들 (그림2,3)을 글자본으로 새겨 주조한 한자 활자체를 시작으로 이후 이른바 생생한 나무활자, 정리자(整理字) 놋쇠활자(그림4) 등의 한자 활자체로서, 이제까지의 한자 붓글씨체 해서체(楷書體) 활자체와 달리 이글은 인쇄 전용 활자체였다.

   

 이 활자체는 수직 수평의 직선 균형과 굵은 세로줄기와 가는 가로줄기의 대비, 세모꼴의 기하학적인 돌기 등 인위적인 구조의 글자꼴로서, 이제까지의 부드럽고 유기적인 성격의 붓글씨와는 크게 달랐다.

  이러한 인쇄 전용 한자활자체의 출현은 함께 쓰이는 한글 활자체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한자 활자 명조체와 함께 쓰이는 한글 활자체에서 한자 활자체의 성격을 한글에 적용하는 데에는 대체로 세 가지 방향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이제까지의 한글 활자체에서 줄기의 성격을 조정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 적용으로 가로 세로줄기에서 붓글씨 흔적인 돌기들을 생략하고 기울기를 좀 더 펴서 수직 수평에 가깝게 하는 것으로, 한자 활자체 영향이 가장 약한 방향이었다.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한자 활자체의 성격을 적용하여 굵은 세로줄기와 가는 세로줄기를 대비, 수직 수평의 직선 균형, 가로줄기의 오른쪽 끝과 세로줄기의 머리에 세모꼴의 돌기 들임 등, 손글씨 성격과는 다른 인쇄 전용 활자체로서의 인위적인 구조를 이룬 방향이었다.
 세 번째는 한자 활자체의 인위적인 균정법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균정함으로 대체하여 완성도 높은  한글 붓글씨체 성격으로 발전시킨 창의적 적용의 방향으로, 바탕체의 원조로 평가되는 ‘오륜행실도 활자체’가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오륜행실도 활자체의 구조는 굵은 붓글씨의 성격이 강조되면서도 성격의 통일성과 균정함이 함께 조화되고 있는 점에서, 그때까의 한글 활자체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는 한편으로, 이미 정착된 한글 붓글씨체 양식이 활자체로서 적용되는 하나의 훌륭한 표준을 제시한 것이다. 오륜행실도 활자체 이후 비로소 시작된 한글 활자 바탕체 성격의 흐름은 한글 활자체 성격의 주된 흐름이 되어 오늘날의 본문용 활자체에 이르고 있다.

 바탕체의 큰 흐름 속에서 많은 활자체들이 등장하지만 그 구조와 성격과 의미는 활자체마다 다르다. 특히 활자체의 구조는 활자를 만드는 제작방법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동안 활자 제작 방법은 전통적인 옛 활자의 주조방법에서 일본에서 수입한 전태식 새 활자 주조방법, 그리고 벤튼자모조각기에 의한 주조방법과 이후 사진식자 및 오늘날의 디지털 폰트에 이르기까지 변천에 변천을 거듭해왔다.
 바탕체의 흐름이 시작된 것은 옛 활자에서 새 활자 주조방법으로 바뀌기 바로 전인 1700년대 말로, 옛 활자에 속하는 바탕체로는 1800년대에 다시 주조한 한자 활자체 정리자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체가 있는데, 이는 오륜행실도 활자체보다 균정감이 떨어지고 붓글씨 성격이 더욱 뚜렷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곧이어 1800년대 말의 새 활자 시대로 접어들면서 바탕체는 큰 변화를 겪는다.

 옛 활자 시대에 주로 활자를 주조한 곳은 관(官)이었으며 이때의 활자체 구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원리적 형태의 보존이었다. 동일한 시기의 붓글씨체나 목판글자체 글자꼴이 한층 더 쓰기 쉬운 모양으로 변했다 해도 관에서 주조한 활자체는 바른 표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잘 비교할 수 있는 사례가 새 활자 시대 초기의 활자체들이다. 주로 한글 새 활자의 주조를 맡은 곳은 일본 쯔쿠지(秉地) 활판제조소였는데, 1860년에 최초로 주조된 새 활자 최지혁 글자본의 최지혁체(그림5,6)는 민간의 의뢰에 따라 만들어진 바탕체로서, 1886년에 관립 인쇄국인 박문국의 의뢰에 따라 주조된 한성주보 활자체(이후 ‘한성체’로 약칭함, 그림7)와는 그 구조에서 큰 차이가 있다.
 민간에 의해 만들어진 최지혁체는 활달한 붓글씨의 성격이 강한 대신 균정감이 떨어지고 닿소리 글자꼴도 손글씨에 따른 단순한 모양으로 이루어 졌으나, 관에 의해 만들어진 한성체는 균정감이 높고 붓글씨의 성격이 강하면서도 닿소리 글자꼴에는 원칙적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새 활자의 측정 단위로는 포인트와 일본 호수(號數) 방식을 함께 썼는데, 최지혁체는 5호 작은 활자에서 2호 중간 활자, 1호 큰 활자(그림8)가 만들어졌으며, 한성체는 비교적 작은 4호 활자로 만들어졌다.
 

  옛 활자인 오륜행실도 활자체의 크기는 새 활자의 1호 크기와 비슷하며, 결국 옛 활자에서 새 활자로 바뀌면서 획의 본문용 활자 크기가 작게 조정되었고, 그만큼 책의 크기는 작아지면서 본문 활자 수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일본의 활판 제조소는 최지혁체 활자 1호, 2호, 5호를 갖추었고 1882년에 민간 선교단체에 의해 의뢰되어 주조된 성서활자체인 3호 활자 성서체(그림9)와 4호 활자 한성체를 한글 활자의 패밀리로 갖추어 놓고 1900년대 초의 대부분의 새 활자 인쇄물에 이를 활용했다.




 



  이 가운데 비록 성격의 차이는 있으나 동일한 바탕체에 속한 최지혁체와 한성체는 자주 한 인쇄물 속에서 본문용과 제목용으로 나뉘어 활용되었다.
  1910년대에는 한성체와 비슷한 구조의 더 작은 5호와 6호 활자체(그림10)가 등장하여 작은 본문에 활용되고 있지만, 활자가 작아질수록 활자체의 균형은 그만큼 좋지 않았다. 1915년에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 사용된 1호 활자 교과서용 바탕체는 줄기들이 비교적 단정하고 균정한 성격이었으며, 닿소리 글자꼴은 원리적 형태이나 균형감은 오히려 더 작은 4호 활자 한성체보다 떨어지고 있다.

 1920년대에는 9, 8포인트의 작은 한글 활자체들이「조선일보」「동아일보」창간을 계기로 한글 신문들의 본문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일제에의해 한글활자 매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1942년까지의 20여년동안 신문 활자는 한글 바탕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문 본문용 활자의 개량을 위해 수 차에 걸쳐 활자체를 바꾸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활자체들은 <그림 11>에 보이는 것처럼 다른 여러 출판물들에도 자주 활용되었다.
  <그림 12>처럼 1920년대 초에 신문의 본문용 활자체로는 닿소리 글자를 크게 하고 조금 납작한 비례의 바탕체가 활용되다가 다시 붓글씨 균형이 뚜렷한 정체 비례의 바탕체로 교체되었고 또다시 환원되기도 하는 등 많은 시행착오들이 나타났다.

 
  1930년대부터는 차츰 각 신문사 나름의 본문용 활자체가 정리되었는데 「동아일보」는 국내 최초로 신문 본문용 활자체를 응모하여 이원모의 활자체(그림 13)를 채택하고 이를 1933년부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원모체는 바탕체가 아닌 한자 명조체의 성격을 그대로 한글에 적용한 활자체로서 위에서 살펴본 1700년대 한자 활자 명조체의 성격을 적용한 두 번째 방향의 활자체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본문용 활자체로 바탕체를 계속 개량하여 글자가 더 커 보이도록 닿소리 글자꼴을 크게 구성한 활자체를 활용하였다.

 1939년에는「조선일보」본문용 활자들(그림 14) 중 조금 큰 발문에 박경서의 4호, 5호 활자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그 가지런한 균정감과 균형감 그리고 완성도에서 이제까지의 활자들에 비해 뛰어나게 돋보이는 활자체였다.


  내려쓰기 본문에서 박경서체는 처음으로 활자의 기둥을 맞추도록 조각되었으며 마치 원도에 의해 설계된 것처럼 놀라운 통일성과 균형감을 갖추고 있었다.  새 활자는 제 크기의 씨앗글자(種字)를 먼저 나무에 뒤집어 새겨서 이를 구리로 도금한 뒤, 여기에 납을 부어 활자를 주조하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작은 씨앗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일은 그만큼 어려워지며, 그 결과 활자체의 균형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활자조각가 박경서의 활자체는 <그림 15>의 4호, <그림 16>의 5호의 작은 활자에서 이 같은 놀라운 균형을 이루어, 한성체 이후 새 활자 최후의 높은 완성도를 이루어냈다.

 한성체가 닿소리 글자꼴의 원형을 고수한 것에 반해, 박경서체는 당시의 상황에서 한층 더 보편적인 바탕체 성격을 만들어내기 위해 글자 하나 하나에 조화되는 균형과 닿소리 글자꼴들을 재해석하여 적용해갔다.

  1954년에 국내 최초로 벤튼자모조각기와 사진식자기가 도입되기 시작하자 활자제작의 경우, 작은 씨앗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조각기술 대신 활자체 원도의 설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제작과 설계가 분리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설계된 원도를 가지고 활자 크기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는 원도활자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림 17>은 초기의 원도활자인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원도활자 시대 초기에 주조활자나 사진식자의 원도 설계에는 최정호, 신문 본문용 활자 원도설계에는 최정순 등의 많은 이들이 활동하였다. 이들이 원도 설계에서 표본을 삼은 활자체 구조는 박경서체였다. 최정호의 경험담에서 확인되는 바, 그들은 박경서체를 확대하여 구조 분석을 해가며 원도 설계에 고심하였다. 

 이들의 역작 가운데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본문용 활자체는 최정호에 의한 바탕체 패밀리인 '최정호체'다. 최정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 나름의 균형과 완성도 높은 바탕체인 ‘최정호체’를 설계해냈다.  물론 박경서체를 밑그림으로 했지만, 여기에 시대가 요구하는 조형감과 원도 설계의 필요조건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박경서체를 재해석하고 다시 한 차원 높인 바탕체를 창작해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감각의 총체적 결과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가장 자랑스러운 본문용 바탕체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디지털 폰트 시대에 최정호체는 많은 폰트들의 밑그림으로 단지 복제되어가고 있기만 하다. 한글을 사랑하며 특별히 한글 활자체를 다루는 전문가들에게는 최정호체 다음의 한 차원 높아진 바탕체가 기다려지고 있다.

시대의 감각을 선도할 수 있도록 묵묵히 노력하는
제2의 박경서, 최정호를 기다리며...


* 이 글은 고 김진평 교수가 「정.글.」창간호에 기고했던 글을 전제한 것입니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꼭 부탁합니다. | 2010.10.15 22:4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너무 좋은 정보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깝게도 참고 그림들이 보이지 않아요. 혹시 데이터 다시 검사해보시고 깨진 그림들을 다시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내용 꼭 참고 그림을 보면서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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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6. 10:1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 서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990년대에 들어와 활성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서체의 분류나 명칭에 대한 견해는 각양각색이어서 서체연구에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선행연구들이 각각의 기준을 바탕으로 서체를 분류한 것에 의하면 모필과 관련된 서체용어만도 40여 종1)이나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에 생산된 서체가 그만큼 복잡다단함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체란 일정한 시기에 통용되면서 사회성을 확립하여 '정형화'될 때 한 유형으로 인정되는 바, 서체 분류에 있어 일정한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한글 서체 연구는 주로 글자 기계화와 관련하여 글자체 개발을 위해 이루어져 왔으며 조선시대 서체에 대한 연구는 그나마 서예술적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한글 서체의 분류 및 그 명칭들이 서예술적 요소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 보다 본질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령 어떤 합리적인 기준이 미비한 채 단순히 선행연구의 것들을 적절히 절충한 명칭으로 분류하는 단편성 등이 그것이다.

 물론 각 연구자마다 서체의 분류 명칭이 다른 점은 조선시대에 출현한 한글 자형이 그만큼 복잡해서 일정한기준을 두고 유형화하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다행인 것은 선행 연구자들의 서체분류의 바탕을 살펴보면 서체를 대략 세 가지 군으로 유형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문자의 시원을 보인, 직선, 둥근 원, 둥근 점으로써 정방형으로 이룬 글자체군,
 둘째, 붓글씨로 썼을 때 나타나는 필서의 기운이 있는 것으로서 필사본의 글씨체나 활자본, 판각본에 나타난 글자체군,
 셋째, 이 붓글씨체 중 노봉으로 기필하여 오른쪽 흐름 축을 맞추어 독특하게 구성된 서체군 그것들이다.




1.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형성요인

 한글은 종래 한자를 빌려 쓰던 틀을 완전히 깨고 우리말에 맞도록 창제된 소리글자라는 점에서 발생학적인 특수성을 갖는다. 우선 글자의 자형과 글자가 가지는 음가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정형화된 글꼴을 제시해야 글자를 이해하는 데 혼란이 없을 터인즉, 창제 당시를 보면 나름대로 글자의 도안적 성격과 아울러 기본 글꼴로서의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서체의 대강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글자보급과 관련된 특수성이다. 이 또한 한글이 창제 글자라는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곧, 창제된 글자를 언중에게 최단기간에 보급하기 위해 당시 어떤 방편을 강구했을까 하는 문제인데, 현전하는 당시의 자료가 주로 판본이나 활자본인 점을 고려하면 판각이나 활자에 의해 다량의 서책을 찍어내는 방법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서체연구에 있어서 판본이나 활자본, 필사본을 그 목적에 따라 나누어 연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판본과 활자본도 결국 필사한 서체를 모사한 것이기 때문에 간본에 의거해 서체를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 초기에 도안된 서체와 그 뒤 붓글씨 형태의 서사적 글꼴이 주를 이루는 시기가 서체분류에 있어 큰 분수령이 되므로, 서사형태나 방법에 의해 서체를 나누는 것이 좀 더 변별성과 객관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낱자의 ‘모아쓰기’ 로 하는 문자생활도 또 하나의 특수성이다. 한글은 소리글자로 창제되었는데 실제 문자생활에서는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를 합자하여 한 음절에 하나의 합자형이 대응되도록 했으므로 서체연구는 합자형과 관련하여 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당시 서사도구가 ‘붓’ 이었다는 점도 서체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사도구의 변천은 단순하다. 개화기 이전까지의 자료는 판본이나 활자본, 또는 필사본으로 남아있는데, 이들은 붓글씨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나 ‘펜’ 종류가 유입됨으로써 붓과 펜이 혼용된 것으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한글 서체에 대한 연구는 붓으로기록된 자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분류기준
 
 앞서 지적한 바에 근거해 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분류 기준이 되는 자질로 ‘전형성’ ‘중앙축성’ ‘기필의 노봉성’을 들고자 한다.

2-1. 전형성
 전형성은 글자로서 보편성을 확보하기까지 글자의 전범으로 주어지는 특성으로 글자 창제 때 나타나는 특성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당시에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층은 한자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서, 읽기나 쓰기가 꽤 자유로워 한자의 필기엔 대단히 능숙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여, 그것을 지배층 뿐 아니라 일반에게까지 보급하기 위해서는 자형을 쓰기 위주 보다는 읽기 위주로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2) 또 시각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엄격히 제한된 도안적인 형식을 구사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고딕체 모양의 글자 형태가 나왔을 것이며 바로 그 점에 전형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제 후 간행된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동국정운」등에서의 자형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전형성을 가진 형태로 나타난 점은 바로 ‘읽기 위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자는 필서의 맛이 없이 직선적이면서 모가 나고 원은 완전히 둥근 형태여서 판각이나 활자로 사용하기에는 적당했을지라도 당시의 주 필기도구였던 붓으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형태였다.
  아래 <그림 1>을 보면 창제 글자로서의 전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략 세 가지 원칙이 부여된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서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끝과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었다.
 둘째, 글자의 획은 직선과 둥근 원만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시각성을 강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보여지듯이 한글과 한자를 동일한 면에 함께 사용했음에도, 한자의 해서나 행서와는 전혀 다른 고딕체 형태의 한글을 사용한 것은 시각적으로 현저함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후 「훈민정음 언해본」에 오게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전형성이 다소 약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 2>에서 그 변화를 비교해볼 수 있다.



 위를 비교해 보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정방형의 직선적인 글꼴이던 것이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붓글씨체 느낌으로 완성됨을 볼 수 있으며, 우선 중성자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기 시작하여 정방형을 벗어남과 동시에, 획 간 공간 조절이 강조되어 조형성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평이던 가로 서선이 오른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쓰기가 중심이 되는 이른바 궁체에 오게 되면 <그림 3>에서와 같이 한글 창제 당시의 전형성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아래의 <그림 4>는 이러한 전형성의 변화를 해례본의 서체에서부터 궁체 흘림체까지의 흐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2-2. 중앙축성

 다음 기준은 모아쓰기 방식으로 운필함에 특정한 순서가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글자 구성의 축을 어떻게 잡았느냐 하는 것이다.

 운필 시 흐름의 축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각 서체별 특징이 나타나는데, 해례본에서는 정방형 틀에 모아쓰기 하는 한글의 제자원리에 따라 자소를 직선, 둥근 원, 둥근 점만으로 구성하되 획의 연결성은 전혀 없으면서 앞선 자소의 좌우 혹은 상하의 중앙부분에 다음 자소를 위치시키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획의 순서와 관계 없을 뿐 아니라 획의 모양에도 변화가 없고, 오직 흐름의 무게를 두는 흐름축이 글자 가운데에 있는 이러한 특징을 바로 ‘중앙축성(中央軸性)’형이라 한다.


 <그림 5>와 <그림 6>은 모아쓰기를 함에 있어 ‘ㅡ, ㅗ, ㅜ, ㆍ’와 어울리는 글자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축성이 중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3)
 <그림 6>은 모아쓰기를 하여 글자를 구성할 때는 구성의 차례를 좇아 각 자소 위치는 반드시 앞 구조의 중앙에 배치됨을 보인 것이며,〈그림 7〉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등에서 볼 수 있는 중앙축성의 실례들이다.



 이러한 중앙축성은 「훈민정음 언해본」에 오면 다소 변형된다.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방형 서체구성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차츰 필서의 맛이 나는 서체로 바뀌게 되면서 다음 획으로 향하는 필의를 살려 씀에 따라 글자 모양도 변형되고, 조형성까지 갖추는 등 다양하게 써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른쪽 세로획을 중심으로 한 오른쪽 종렬 축의 서체가 된 것이 아니고, 한자의 행서나 해서의 필서와 같이 글자의 중앙에 흐름의 축을 싣고 있다. 특히 국한문 혼용을 많이 사용하게 됨으로써 한글도 그 흐름 축이 한자와 같이 중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구성했다.



 다음의〈그림 8〉과〈그림 9〉를 보면 글자의 중앙을 흐름의 축으로 하여, 좌우 같은 비율로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와 다르다.




      

 궁체 단계에서는 위의〈그림 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종성자의 오른쪽 끝과 우측 중성자의 맨 오른쪽 세로획에 흐름의 축을 두고 맞추어 쓰도록 구성, 초·중·종성자 모두 종렬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또한 우측 중성자는 더욱 길게 늘어나고 우측 중성자나 종성자의 세로획은 반드시 끝을 뽑아서 아래에 있는 다음 획으로 향하게 한다. 즉, 궁체에는 글씨의 흐름을 오른쪽 흐름 축에 정확히 맞추어 쓰는 서체적 특징이 있다.

 이상을 바탕으로 글자의 축성을 개념도로 보이면 <그림11> 과 같다.



2-3. 기필의 노봉성
 다음 분류 기준으로는, 서체에 작용하는 것이 필법이며 조선시대의 서사도구가 붓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필의 노봉성(露鋒性)4)’을 들 수 있다.

 획의 기필(입필)에 있어 역입 여부에 따라 각 서체의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는 획이 곧은 직선이나 둥근 원이면서 시작의 머리 모양이 한자의 전서처럼 둥글거나 막대 모양으로 뭉툭하게 된 것이 특징이다. 붓끝을 감추지 않으면 획의 시작 머리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 필봉의 이치다.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는 기필할 때 반드시 역입하여 필봉을 감추어 장봉으로 휘필하는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판각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편리한 쪽으로 생각하여 디자인하거나 판각기술로 다듬었을 것이나, 만일 붓으로 한자의 전서처럼 획을 쓴다면 기필에서 반드시 역입, 장봉하여 서사해야 필봉의 뾰족한 맛을 감출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글꼴은 한자 해서의 필획과 닮은 점이 많다. 다음의〈그림 12〉에서 보다시피 가로 세로획은 마제잠두(馬蹄蠶頭) 형으로, 기필에서 송필을 거쳐 '수필' 에서는 회봉함으로써 필압에 따라 서선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난다. 이는 당시 한자 필서에 익숙했던 식자층들이 필서를 하다 보니 한자 획과 닮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많아지게 된 것으로, 한자 해서를 서사할 때 기필을 역입하여 장봉하는 운필법을 따랐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궁체는 앞의 해례본체와는 달리 기필을 역입하지 않고노봉으로 서사했다는 점이 방법상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아래〈그림 13〉과 같이 봉이 겉으로 드러나(노봉) 날렵한 맛이 나며 주로 작은 글씨에 많이 썼다.

 이 궁체는 궁중 여성들에 의해 많이 필서되었으며 획의 시작과 대부분의 끝 획에서 필봉이 겉으로 드러남으로써 그 미세한 변화를 엿볼 수 있으며 단아하면서도 활달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는 운필상 방필에 의한 서체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조선시대의 서체를 전형성, 중앙축성, 기필의 노봉성을 자질로 들어 분류해 보았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표 1〉에 따르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는 읽기 위주의 서체이며 중앙 흐름 축을 가진 서체로 운필상 역입하여 장봉하고, 「훈민정음 언해본」의 글씨체는 쓰기 위주의 서체로서 초기에는 중앙 흐름 축 중심으로 쓰다가 점차 오른쪽으로 흐름 축이 이동하는데 운필상으로는 역입하며, 궁체는 쓰기 위주이나 우측에 흐름 축을 형성하며 기필 시 역입하지 않고 반드시 노봉으로 시작한다.


3.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유형과 명칭

 위의 분류기준에 따라 조선시대의 한글 서체를 ① 훈민정음 해례본체(줄여서 해례본체), ② 훈민정음 언해본체(줄여서 언해본체), ③ 궁중서체(줄여서 궁체) 등으로 3대분할 수 있다. 이렇게 명명한 것은, 서체적 특징을 정형화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그 형성범위가 넓으면서 내용은 객관적이되 고유한 성격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전제되었을 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명칭을 붙인 좀 더 구체적인 이유5)는 다음과 같다.

 1) ‘해례본체’는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처음으로 목판으로 나온다. 여기에 사용된 글자는 자·모의 모아쓰기 형태로서 자형은 바른네모꼴이다. 서선이 곧고 획의 굵기가 일정한 것이 마치 그려서 디자인한 모양으로 붓글씨 맛은 없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글자가 목판에 새겨지면서 붓의 맛보다는 칼의 느낌이 강하고, 시각적으로는 창제 글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로 강하고 뚜렷한 글자형을 나타내고 있다. 획은 직선과, 완전 둥근 원, 그리고 둥근 점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뒤에 나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에 사용된 글자형들도 다 이 체로 분류할 수 있다.

 2) ‘언해본체’ 해례본체와는 달리 당시의 서사용구인 붓의 특징을 잘 살려서 쓴 서체이다. 붓으로 쓴 육필이나 혹은 육필을 모본(등재본)으로 하여 판각한 판본이나 활자본에 나타난 붓글씨체로서 후에 나온 궁체를 제외한 모든 한글 붓글씨체는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글씨와 같은 유형이므로 ‘언해본체’로 분류할 수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월인석보」전후의 ‘세종어제 훈민정음’만을 따로 제책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훈민정음 국역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세종의 어지와 예의 부분만 언해했는데, 처음에는 해례본의 이름과 같은 「훈민정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세종 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조 때 간행되어 나오면서 제목을 고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훈민정음」에 없는 치두, 정치에 관한 규정이 추가되어 있으며 해례본 간행 직후 1년 이내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원간본은 1459년 세조 4년에 간행되었지만,「석보상절」의 권두에도 실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어제 훈민정음’을 새로 넣었다기보다는 1447년 간행된 「석보상절」의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언해는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의 반포 이후 1447년 「석보상절」의 간행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판각된 서체는 판의 체제나 서체로 볼 때 한문필서에 익숙한 사람의 글씨를 등재본으로 하여 ‘세종어제’란 4자를 추가하고 앞 부분의 넉 줄을 개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필획을 보면 기필, 송필, 수필의 기맥이 뚜렷하고, 가로획 서선은 오른손 쓰기에 의해 오른쪽으로 어깨가 차츰 올라가고 있다. 또한 서사하는 순서에 의해서 초·중·종성자가 놓이는 위치와 모양이 다르게 변하고, 획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의 서체적 특징이 있어 획간과 자간의 연결과 흐름은 물론 필서로서의 속도감이 뚜렷해 보이는 붓글씨체이다.

 3) ‘궁체’ 오직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서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궁중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창안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궁체로 된 것은 앞선 다른 서체와는 달리 최초의 간본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서체가 완전한 필법과 결구로 자형이 정립되어 정형화하기까지는 많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그 특징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최초나 대표적인 간본 자료의 이름을 쓰지만, ‘궁체’만은 서체가 창안된 특수한 환경적 요인과 배경을 중시하여 명명한 것이다. 즉 궁중이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여성이라는 신분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창안된 서체인 것이다.

 궁체는 붓으로 필서함으로써 붓글씨의 흐름과 특징이 확연한 것으로, 필법에 따른 자형과 결구 등이 한자 필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서체인 「훈민정음 언해본」에 쓰인 체와는 다른 독특한 서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자를 써 오던 습관으로 서사된 획과는 완전히 다른 서체로서, 초성자와 중성자에는 일정한 '서법적' 기
준이 있고 글자의 조형성과 정형화된 형태적 틀을 갖춘 정제된 서체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미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서체라 할 수 있다.
 
 글씨는 특정 서체를 범본으로 하여 연마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자 서체의 흐름을 ‘전서-예서-초서-해서-행서’로 보되 이를 발전순서 보다는 출현이나 분화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듯이, 궁체도 특수한 여건에서 출현한 것이지 범본이 있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글 서체의 유형을 위와 같이 해례본체, 언해본체, 궁체등으로 대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유형의 특성을 가지면서 한 자 한 자, 한 획 한 획을 연결 없이 또박또박하게 표현한 것은 ‘정자’로, 획과 획의 붓길(필의)에 따른 연결과 글자간의 연결과 흐름을 살린 서체는 ‘흘림’으로, 글자간의 연결이 있으면서도 획은 축약으로 변형되는 등 글자형은 물론 연결 정도가 커서 어떤 것은 마치 암호처럼 사용된 것도 있는 서체는 ‘진흘림’으로 하위분류하면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표 2〉에 대응하는 각 서체의 보기는 다음〈그림 14〉<그림 15>, <그림 16>에서 찾을 수 있다.
 










1) 홍윤표, 2004, 「한글 서예 서체의 명칭」, 서예학술대회 발표 요지,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서예문화연구소, 1~13쪽
2) 김성계, 2002, 「훈민정음에 나타난 글꼴의 형성원인」, 비닥디자인 저널 통권 1호, 한국시각디자인협회
3)해례 초성해 ‘ 與   而爲  之類’ 에서 보이는 ‘  ’ 모양 을 초성자가 없음에도 초성자 자리를 비워 ‘   ’ 으로
쓰지 않고 굳이 중성자를 글자의 중앙에 배열한 것은 창제자가 글자의 축을 중심에 두고자 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4)기필(起筆)이란 처음 붓을 대어 쓰기 시작하면서 붓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시작하는 운필의 한 형태이며, 노봉(露鋒)이란 획의 시작과 끝에서 뾰족한 붓의 끝(필봉)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 운필의 한 형태이다.
5) 동·식물 분류 체계나 성씨 형성 체계를 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써 형태적 혹은 본질적 특성을 따거나, 최초의 시원을 나타내는 지명, 조상 이름 등을 따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글 문자와 관계되는 명칭 문제는 관련 학문 분야에서 이미 통용되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hangulsalang | 2010.08.11 05:0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그림이 뜨지 않는데 다시 링크 걸어주실수 있나요?
BlogIcon 온한글 | 2010.08.13 09: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hangulsalang님 안녕하세요.
우선 http://onhangeul.com/30043633020
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사진은 곧 다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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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3. 09:45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날이란?
한글날은 세종대왕께서 우리 글자인 한글(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한 날을 일제시대인 1926년에
기념일로 정해 기리다가 지난해부터 국경일로 정해 경축하는 날이다.




 한글날의 시작은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6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480돌인 날에 조선어연구회와 신민회의 공동주최로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 400여 명이 모여 ‘ 가갸날 ’ 을 선포하고 처음 기념식을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두 해 뒤인 1928년에 기념일 이름을 ‘ 한글날 ’ 로 바꾸기로 한다.  날짜도 훈민정음 반포일이 조선왕조실록에 음력 9월로 기록되어 있다 하여 음력 9월 마지막 날인 29일로 옮겼다가 1934부터는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날인 양력 10월 28일로 바꾸어 1937년까지 기념식을 착실하게 시행했다.

 그런데 일제가 일본말만 쓰라며 우리말은 못쓰게 탄압해 한글날 기념식을 못하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날짜를 10월 9일로 바꾸어 다시 시행한다.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반포일이 음력 9월 상한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인 10월 9일로 바꾼 것이다. 다음 해인 1946년 미군정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마침 한글 반포 500주년이 되던 해여서 덕수궁에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제대로 세워진 후에도 한글날은 계속 공휴일로 이어졌으며 한글학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한글 단체들이 주관하는 한글날 행사가 매년 있어왔다.


왜 한글날을 만들었나?

 1446년 세종대왕이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그 뒤 500여 년 동안은 널리 쓰이지 못한다. 한문에 길든 학자와 관리들이 큰 나라인 중국 눈치를 보면서 우리 글자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부터 한글을 많이 쓰게 되는데, 대한제국 때 고종이 공문서에도 국문을 쓴다는 칙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나라 글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 주시경과 여러 선각자가 한글을 살려 써서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0년에 일제 식민지시대를 맞게 된다.

 식민지 시대에도 한글이 훌륭하고 중요함을 깨달은 주시경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를 세워 겨레말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던 중 1926년에 이르러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들이 '겨레의 보물인 한글을 갈고 닦아 우리말을 살리고 겨레의 얼을 지키는 일을 더욱 잘 하자'는 취지로 훈민정음 반포일을 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한글날 그 다짐과 정신을 되새겨 오다가 1933년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그 때문에 1942에는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들이 함흥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한글날은 이렇게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겨레가 사라질 위기에 있을 때 세계 으뜸가는 글자인 우리 한글로 우리말을 지키고 빛내어 겨레를 지키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으로 만든 날이다.   


한글날이 겨레와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

 어두웠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글은 우리 겨레의 희망이었고 한글날은 독립을 준비하는 기념일이었다. 한글날이 있었기에 한글이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겨레의 말과 얼을 지키며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선각자들이 한글날을 만들고 목숨까지 바치며 한글을 지켜 나갔기에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 말글로 된 교과서도 만들고 공문서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한글날은 나라를 잃은 시기엔 독립을 다짐하고 준비하게 한 '건국 공로일'이며, 광복 후엔 국민을 자주민주시민으로 키워내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는 데 이바지 한 민족 최대의 기념일이다. 대한민국 시대의 한글날은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을 생각하고 그 바탕에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 날이다.
 한글이 우리나라를 문맹 없는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면 한글날은 한글을 지킬 뿐만 아니라 빛내 주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지게 된 이야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글날은 광복 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어 매년 한글 단체들이 공식적으로 행사를 주관해 왔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엔 서울시가, 그 다음 해엔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관광부)가 주관하기 시작하면서 마지못해 하는 행사처럼 치러진다. 그리고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가 마침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리면서 3등 기념일로 전락하게 된다.

 경제단체들이 연합해 ‘공휴일이 많아서 나라 경제가 어렵다’며 투덜대자 정부가 이를 위해 세운 대책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글 사랑 정신이 식고 겨레의 말과 얼이 흔들리니 나라까지 흔들리고 기울게 되어 국제 투기 자본의 먹이가 되는 경제 식민지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과 노동자의 저항을 줄이고 환심을 사려고 공휴일을 많이 늘렸었다는 사실이다.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만 쉬던 것을 음력 설까지 쉬게 하더니 이를 3일로 늘리고, 한가위도 이틀만 쉬던 것을 3일로 늘려 놓았다. 게다가 성탄절만 쉰다고 불교인들이 불만을 표하니 석가탄신일도 공휴일로 지정한다. 그러니 전경련, 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로서는 휴일이 너무 많아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불만스러워할만도 했을 것이지만, 그 폐해를 완화시키기 위해 한글날을 희생시킨 것은 한글단체와 민족지도자들을 봉기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로부터 한글단체는 15년에 걸쳐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게 되었고 2005년 마침내 국회에서 국경일 지정 법안이 통과되어 국경일이라는 위치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는 그릇이다. 말이 흔들리고 지저분해지면 그 나라까지 흔들리고 지저분해진다. 한글날을 짓밟으니 우리 말글살이가 혼란스럽게 되고 민족자주정신이 흔들리면서 국운도 시들었던 것이다. 한글단체들의 ‘한글날 국경일 승격 운동’은 이러한 전제와 대의에서 시작되었다.

 정부가 끝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키자 1991년 2월 전국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라고 외치며 서울 명동까지 거리행진을 한다. 그리고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1991년 10월 1일에 국회의장에게 ‘한글날 국경일 제정 청원서’를 내는 것을 필두로 한글단체들은 정부와 국회에 건의와 청원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애타는 호소도 못 들은 듯 오히려 한글날 기념식도 무성의하게 해치우곤 한다. 또한 김대중 정부에 와서는 그때까지 기본적으로 한글 전용 정책이던 것을 일본처럼 한자를 혼용하는 정책으로 바꾸려 하더니 결국 한자 병용 정책을 강행한다. 이에 한글단체가 분노해 거세게 반대 시위를 하고 나오니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겠노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한글 단체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를 여는 등(1999년 7월 9일) 대정부 촉구를 보다 본격적으로 하니, 마침내 신기남 의원 외 34명이 ‘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법률안 ’ 을 입법안으로 발의한다 (2000년 10월 2일). 그리고 그 해 11월 15일자로 여야 의원들이 ‘한글날 국경일 추진을 위한 의원모임’을 발족하고 30일에 국회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공청회’를 연다.

    그러나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게 한 경제단체가 또 반대하니 행정자치
   부가 그들 편을 들어 법안을 제대로 심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에 한글
   단체와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전택부)를 만들어 국회와 정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촉구 결의
   대회나 1인 시위를 하는 등 더욱 활발한 운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2005년 12월 5일 국경일 지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
   하게 된 것이다.
 







국경일 제정의 의의

   한글학회와 외솔회,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등 한글단체뿐 아니라
  전교조, 국어교사모임, 참교육학부모회 등의 교육단체와 국회의원,
  시민단체까지 힘을 모아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난
  15년에 걸친 세월 동안 이 많은 단체들이 하나가 되어 한글날을 국경
  일로 만들고자 했었던 참뜻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정부와 정치인, 경제단체와 일부 학자들까지 한글과 한글날을
  우습게 여기는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한글날을 온 국민과 함께 뜻깊게 보내는 데 앞장서야 할 지배층들이
  한글날을 3등 기념일로 내리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는 얼빠진 정신과 풍조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둘째, 우리 한글 문화, 자주 문화를 꽃피우자는 것이었다.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가 인정하는 세계 으뜸 글자다. 그럼에도 헌신짝 보듯 해온
  역사를 반성하고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사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는 하나 내놓을만한 우리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문으로 씌여졌던 고전들은 중국 문학과 문화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고, 일제시대 때 길든 일본식 한자 혼용이 우리 말글살이인 줄 알고 한글을 살려 쓰는 것을 가로막는 한국인도 많았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말과 우리 글자인 한글로서 우리 문화를 부흥시키는 계기를 삼고자 했다.

 셋째, 과학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한글을 더욱 갈고 닦아서 과학 강국, 철학 강국이 되자는 것이었다. 정보통신 학자들이 ‘세종대왕은 셈틀(컴퓨터)을 이용한 정보통신시대를 내다보고 600년 전에 한글을 만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한글과 셈틀은 찰떡궁합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글은 우리 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되는 데 크게 이바지해왔다. 그 공을 살려 문화 경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은 국경일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한글날을 마음껏 즐기고 기리자

 우리에겐 삼일절, 개천절, 제헌절, 광복절 등의 4개 국경일이 있지만, 지금까지 중앙 정부 차원에서 매년 기념식이나 치르는 것 외에 국경일의 참뜻을 살리는 국민 참여행사를 마련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보니 국경일이란 그저 등산이나 가고 집에서 노는 날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 같다. 국경일은 경사스러웠던 날을 온 국민이 함께 기념하며 경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글날이 정부와 국민이 모두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국경일이 되고 세계인이 주목하는 문화의 잔칫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스스로 500여 년동안 천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한글이 제 빛을 발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를 바란다.

 한글 창제 정신과 만든 원리는 민주정치와 과학시대에 딱 어울린다. 한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보물이고 긍지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잘 계승하고 그 글자를 가진 겨레라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학문, 예술, 정치, 문화의 선진국을 만들자.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먼저 마음껏 자랑하고 즐겁게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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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헌 | 2010.09.30 22:1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그런데 본문 처음부분에 조선어 학회라고 쓰셨는데요. 제가 알기론 조선어 학회는 1932년도에 창립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1926년도에는 조선어 연구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드네요. 사실확인 부탁드립니다.
BlogIcon 온한글 | 2010.10.05 09:11 신고 | PERMALINK | EDIT/DEL
한주헌님 안녕하세요.
지적 감사합니다. 님이 말씀하신 대로,
1926년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맞네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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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7. 13:09


 지구상에는 수천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수가 정확하지 않아서 적게는 3000개, 많게는 60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유는 정밀한 조사의 부족도 있지만 언어의 구별 기준, 혹은 방언과 언어의 구별 기준이 모호한 데에 있다.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수가 이렇게 많지만, 이 많은 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적다.
 역사적으로 흘러간 과거에 존재하였던 문자를 포함한 총수는 대략 400여 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의 수는 30~4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언어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사용하는 말소리는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된다. 한국말의 소리는 귀에 들리는 청각적 존재이고, 이것을 시각적 존재인 문자로 나타내 주는 것이 ‘한글’이다. 우리의 문화적 긍지이면서,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에서 그 위력을 더욱 크게 발휘하고 있는 한글.
 우리에게 친숙한 이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당시부터 쓰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인 이 낱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 시작은 물론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정음(正音)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우리 문자를 전체적으로 지칭한 표현은 ‘訓民正音’과 ‘正音’이다. 후자는 ‘正音二十八字’(제자해)라고 구체화되어 표현되기도 했다.「훈민정음」에 나타난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를 모두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1) ‘훈민정음’과 ‘정음’의 용례
㉠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正音 스물여덟 글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와 뜻을 들어 보이시니 이름 지어 가로되 訓民正音이라 하셨다. (정인지 해례서문)
㉡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정음을 지으심에 先人의 서술에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함의 이치로 이룬 것이 다. (정인지 해례 서문) 
㉢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이제 正音을 지은 것은 애초부터 슬기로써 도모하고 힘써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聲音에 기인되어 있는 이치를 지극히 한 것이다. (제자해)
㉣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初聲凡十七字 (····云云····).
  정음 28자는 각각 그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초성은 17자이니···· (제자해)
㉤  正音作而天地萬物之理成備. 其神矣哉. 是殆天啓聖心 而假手焉者乎.  
  아! 정음의 지음에 천지만물의 이치를 이룩하여 갖추니 신묘하도다. 이는 거의 하
  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서 그 손을 빌린 것이로다. (제자해)
㉥ 正音制字尙其象 因聲之每加
  정음의 제자는 그 모양을 존중하여 소리에 따라 거세지면 획을 더하였다. 正音之
  字只卄八 정음의 字는 오직 스물여덟. (제자해 訣)
㉦ 正音初聲, 卽韻書之字母也. 聲音由此而生, 故曰母.
  정음의 초성은 곧 운서의 자모이다. 聲音이 이로부터 생기므로 母라고 말한다.
  (초성해)

 
 해례본과 함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5년 기사에도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세종실록 28년 9월 기사에도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이라 하여 ‘訓民正音’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훈민정음’은 책 이름 으로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리키기도 하고, 세종이 만든 문자 체계를 가리키기도 하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위의 ㉡ 이하에 쓰인 ‘正音’은 ‘訓民正音’에서 관형부 ‘訓民’을 생략한 것이다. ‘正音’은 제자해에 4회, 초성해에 1회, 정인지 서문에 2회 나타난다. 여기에 쓰인 ‘정음’이 문자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다. ㉣의 ‘正音二十八字’와 ㉥의 ‘正音制字’와 같이 ‘正音’이 ‘字’와 한 덩어리로 묶여 사용된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훈민정음의 약칭으로서의 ‘正音’은 「直解童子習」(成三問 지음), 「釋譜詳節 序」,「月印釋譜 序」에서도 쓰였다.
「석보상절 서」의 협주에 “正音은 正 소리니 우리 나랏마 正히 반기 올히 쓰논 그릴  일후믈 正音이라 니라” (정음은 바른 소리니 우리나라 말을 바르고 반드시 옳게 쓰는 글이므로 그 이름을 정음이라 한다)라고 ‘정음’의 뜻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이 협주는 ‘正音’을 문자로서 인식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에서 ‘正音’이 ‘성음’(聲音)의 대립어로 쓰이고 있는 점도 ‘정음’이 문자 체계를 지시하는 것임을 잘 보여 준다. 이 문맥에서 ‘성음’은 음성언어 즉 ‘말소리’이고 ‘正音’은 그것을 시각화한 글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정음’이 쓰인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용어에는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정음의 초성은 운서의 자모’이며 ‘이로부터 성음(말소리)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 문맥에서 ‘정음’은 현대 언어학의 ‘음소’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 언어학에서 심리적 차원에 존재하는 음소단위로부터 생리적· 물리적인 말소리(음성언어)가 생성· 인지된다는 관점과 ㉦에 나타난 ‘正音’과 ‘성음’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것이다.

 한편 해례본에는 ‘정음’안에 ‘초성, 중성, 종성’이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성운학에서는 음(音)과 성(聲)을 구별하여 쓰지 않았다. 따라서 ‘正音二十八字’에 속한 문자들은 초성, 중성, 종성이라는 청각적 소리단위이면서 동시에 시각적 문자단위이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문(諺文), 언자(諺字), 반절(反切)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쓰이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동시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명칭어로 가장 널리 사용된 용어로 ‘언문(諺文)’이 있다. 언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예는 「朝鮮王朝實錄」 기사 중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일 것이다.
 이것은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의 실록 기사이고, 이어서 세종 26년(1446년) 2월 16일에 최항,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韻會」를 번역하게 했다는 실록 기사에도 나온다. 같은 해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상소문(실록 번역문)에서는 무려 22회나 쓰였고, 이 상소문을 본 후 최만리 등을 불러 꾸짖는 세종의 말을 기록한 기사에도 ‘언문’이 출현한다.

 훈민정음 또는 정음이 공식적인 명칭이라면 언문은 속칭으로 사용했던 용어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언문을 비칭(卑稱)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적어도 세종 당대에는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실록의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세종 25년 12월 30일)라는 기록이다. 실록에서 임금이 친제한 문자를 언문이라 한 것이다. 언문이 비하적인 의미를 가졌다면 이런 문맥에서 결코 쓸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최만리의 반대상소에 쓰인 언문의 용례다. 언문이 비하적 의미를 함의했다면 최만리가 임금이 직접 만든 문자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훈민정음(혹은 정음)이 격식을 갖춘 정중한 용어라면 ‘언문’은 이것을 평범하게 칭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실록 기사에는 우리 문자를 지칭하는 언문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특이한 경우로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언문의 용례가 있음은 언급해둘 만하다.

(2) 국법(國法)은 귀천(貴賤)·남녀(男女)를 막론하고 6, 7세 때부터 언문(諺文)을 가르치는 데, 이를 이름하여 ‘가나(假名)’라고 하며 공사(公私)의 문서는 모두 이 ‘가나’를 사용합니다. 진문(眞文)의 관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서(試書)를 알고 해서(楷書)·초서(草書)를 대략 이해하는 사람이면 곧 이 자리에 차임합니다.(순조 9년(1809년) 12월 2일)

 이 기사는 도해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 최석(崔昔) 등이 일본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별단(別單)을 옮긴 것이다. 이 기사에서의 언문은 당시의 조선인이 일본 문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으며, ‘眞文(漢字)’과 대립되는 용어이다. 이는 우리가 훈민정음을 가리키기 위해 ‘漢字’의 대립어로 쓴 ‘언문’의 용법과 같은 것이다.

 한편 실록 기사에는 언문과 같은 뜻으로 ‘언자(諺字)’라는 용어도 더러 나타난다. 그 중 이른 시기의 것 두 예만 보이기로 한다.

(3)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대학연의」를 언자로써 어조사(語助辭)를 써서 종실 가운데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는 자를 가르치려고 하였다.(문종 원년(1451년) 12월 17일)

(4)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언자(諺字)를 사용하여 「잠서(蠶書)」를 번역하게 하였다.(세조 7년 3월 14일)

(5) 승전색(承傳色) 설맹손(薛孟孫)이 언자와 한자를 섞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승정원에 보였다.(성종 10년(1479년) 9월 4일)


 (3)의 기사는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대학연의」의 본문에 구결을 달았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종전 한자의 약체(略體)로 된 차자(借字) 구결을 대신하여 일찍부터 한글 구결을 만들어 활용했음을 알려준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훈민정음이 왕자의 한문의 학습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는 「잠서 언해」에 관한 기록에서 우리 문자를 ‘언자(諺字)’라 부른 예이다. (5)는 양반관료가 훈민정음과 한자를 섞어서(이른바 국한문 혼용) 서간문을 작성한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이 언문을 언자라고 부른 예도 적지 않는데 이로 보아 두 용어는 구별 없이 혼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언문과 별도로 우리 문자를 가리킨 용어로 ‘반절(反切)’이 있다. 이 용어는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의 ‘범례’항에 나온다. 여기에는 ‘諺文字母’ 아래 ‘俗所謂反切二十七字’라 하여 반절을 우리 문자 명칭어로 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반절이 우리 문자를 지칭한 용례는 없다.
 
 반절이란 용어는 중국 한자음을 성모와 운모라는 두 개 단위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데에서 훈민정음을 반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반절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 문자 명칭어로 보기 어렵다. 중국의 성운학에서 쓰이던 용어가 잠시 전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문(國文)의 출현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문자를 지시하는 명칭으로 훈민정음, 정음, 언문, 언자 등이 통용되다가 19세기 말엽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고, 청나라와의 사대관계가 약화됨에 따라 독립과 자주의식이 고취되면서 우리의 고유문자는 국가의 문자로 그 지위가 격상된다.
 즉 諺文이 국가의 문자가 되면서 그 명칭이 ‘국문(國文)’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문이라고 칭하게 된 시기는 「고종실록(高宗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軍國機務處啓, 議政府以下各衙門官制職掌. 學務衙門 管理國內敎育學務等政
(··중략··) 編輯局 掌國文綴字各國文繹及敎課書編輯 等事.
학무아문은 국내의 교육과 학무 등을 관리한다. 편집국을 두어 국문 철자와 각국의 문장을 번역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을 관장케 한다.(고종 31년(1894) 6월 28일)

 갑오개혁 이후 군국기무처에서 의정부 이하 각 관청의 편제와 직무를 근대 정부조직으로 개편하면서 학무아문(學務衙門) 내에 편집국을 설치하여 ‘國文綴字’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토록 한 기록이다. 이 규정에 이르러 종전의 ‘언문’이 ‘나랏글’ 즉 국가의 공용 문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1443년에 창제된 이후 450년 동안 우리 문자 생활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훈민정음이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능 좋고 간편한 우리 문자를 뒷전에 두고, 어렵고도 불편한 남의 문자[漢字]에 얽매여 있던 질곡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밖에 ‘國文’이 나타난 주요 기사는 다음과 같다.

(7) 凡國內外公私文字. 遇有外國國名地名人名之當用歐文者. 俱以國文繹施行事. 일체 국내외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서에 외국의 나라 이름, 고장 이름, 사람 이름을 구라파 글로 쓴 것이 있으면 모두 국문으로 번역할 것입니다.(고종 31년 7월 8일)

(8) 銓考局條例.(··중략··) 一. 普通試驗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外國事情內情外事 俱發策.전고국 조례(銓考局條例). 보통시험에는 국문, 한문, 글자쓰기, 산술, 국내 정사, 외국사정, 국내 사정, 외무 관계 문제를 모두 시험 문제로 낸다.(고종 31년 7월 12일)

(9) 勅令第一號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중략··) 第十四條 法律勅 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칙령 제1호에서는 “내가 결재한 공문규정을 공포하게 하고 종전의 공문 공포 규정은 오늘부터 폐지하며 승선원 공사청도 전부 없앨 것이다.”라 하였다.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섞어 쓴다.(고종 31년(1894) 11월 21일)

(10) 勅令第四十九號 法官養成所規程. 第四條 凡本所의 生徒되 者 年齒二十歲以上으로 入學試驗에 及第 者 或現在官署에 奉職 者限홈. 入學試驗科目이 左와 如홈. 一. 漢文作文. 一. 國文作文. 一. 朝鮮歷史及地誌大要.
칙령 제49호 법관양성소 규정. 제4조 본 양성소의 생도로는 20살 이상으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또는 현재 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제한한다. 입학시험 과목은 아래와 같다. 1. 한문 작문 1. 국문 작문 1. 조선역사와 지리대요(고종 32년(1895) 3월 25일) 

(11) 勅令第八十六號 公文式 裁可頒布. 第一章 頒布式.(··중략··) 第九條 法律命令은다 國文으로 本을 삼 漢譯을 附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칙령 제89호 공문식을 재가반포하다. 제1장 반포식 제9조. 법률과 명령은 다 국문으로 서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덧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토록 함. (고종 32년 5월 8 일)
 
(12) 學部告示第四號 (··중략··) 學徒 八歲以上으로 十五歲지 增集야 其科程은 五倫 行實로붓터 小學과 本國歷史와 地誌와 國文과 算術其他外國歷史와 地誌等 時宜에 適用 書冊을 一切敎授야 (···하략···) 학생은 8살부터 15살까지 더 모집하고 그 과정은 오륜행실로부터 소학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에 적용되는 책을 일체 가르쳐서···. (고종 32년 9월 28일)
 
(13) 內閣總理大臣李完用奏, 以學部大臣李載昆請, 議設置國文硏究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아뢰고 학부대신 이재곤이 청하여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고종 44년(1907) 7월 8일)  

 
(7)은 각종 문서의 외국어 고유명사를 국문으로 번역토록 한 것이다. (8)은 각급 아문의 관리 등용 시험에 ‘國文’을 부과한 것이고, (9)는 국가의 공용문서 기록에 국문을 기본으로 삼고 국한문도 쓸 수 있게 한 역사적 규정이다. 이 칙령 1호 14조에 의해 한글은 국가의 문자로 공인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다. 이 내용은 (11)에서 보듯이 칙령 89호로 더욱 구체화되어 반포된다.  
 
 (10)는 법관양성소 입학시험 과목에 ‘國文’을 부과한 규정이다. 이들은 세종 당대에 제한적으로 이서배(吏胥輩) 선발 시험에만 훈민정음을 부과한 이후 관리 임용 시험 전반에 ‘國文’을 부과한 최초의 사건이다. (12)는 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國文’을 가르치도록 한 법률이다. (13)은 우리글을 연구하는 국가 기관 ‘국문연구소’의 설립 기사이다. 주지하다시피 주시경 등 주요 인사들이 많은 토론을 거쳐 국문을 새롭게 정비한 ‘의정안’을 만들었으나 국운이 다하여 시행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가리키는 ‘國語’는 널리 쓰이지만, 우리글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國文’보다 ‘한글’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현재 ‘國文’이라는 용어는 노년층에서 일부 쓰이기는 한다. ‘國文’은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줄여서 부르는 ‘國文科’ 정도에서 부분적으로 쓰일 뿐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술어로서의 기능은 ‘한글’에게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한글'의 출현
 
 한글’이라는 용어는 일제의 억압으로 쓸 수 없게 된 ‘國文’을 대신하여 우리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애국적 의도에서 만든 것이다. ‘한글’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영근의 ‘한글의 유래’(1994)에서 명료하게 밝혀졌다. 

 최남선(1946:179~180, 1973:87)에서는 朝鮮光文會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였으나, 1910년 주시경의 글에 나타나는 ‘한나라글’에서 ‘한글’의 유래가 비롯되고, 주시경의 손으로 쓴 각종 증서에 ‘한말’, ‘배달말글’, ‘한글’이 실용되고 있는 증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글’의 작명부는 주시경으로 봄이 옳다.(고영근1983a/1994:294)
 ‘한글’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13년 3월 23일에 창립한 조선언문회 창립총회 기록에 나타난다. 창립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의 ‘四二四六年 三月二十三日(日曜) 下午一時 ··· 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에서 ‘한글’이 처음 등장한다.1) 따라서 한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는 1913년 3월 23일이 된다(고영근 1983a/1994:293).2)

 그후 ‘한글’이라는 명칭은 「아이들보이」(1913.9)의 ‘한글풀이’란에 처음 실용화되었고,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을 바꾸어 ‘한글배곧’이라 부른 데서도 쓰였다. 여기서 나온 중등과 제4회 수업증서, 고등과 제3회 수업증서, 우등증(1915.3) 등에 ‘한글배곧’이 나타난다.

 주시경의 후학에 의해 ‘한글’이 처음 쓰인 기록은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의 머리말에 ‘한글모임자 한샘’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영의 「한글적새」와 「한글모 죽보기」의 두 원고는 1916~1919년에 엮어진 것인데 여기에서 ‘한글’이 쓰인 것으로 보아, 주시경의 제자들이 이 말의 보급에 앞장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영근 1984a/1994:295) 3)

 '한글’이 종래 천대하는 언문의 이름을 갈음하는 새 이름으로 널리 쓰인 것은 1926년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한 이후의 일이다. 1927년에 ‘한글’이 창간되어 이 이름이 일반인의 의식에 오르게 되고 이 해의 기념일부터는 ‘한글날’로 고쳐 일컫게 되어, 한글의 운동이 자꾸 성대하여짐에 따라, 한글이란 이름도 더욱 널리 퍼지고 깊이 뿌리를 박아 일반 사회가 즐겨 쓰게 되었다. (최현배 1976:52~53).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글에 대한 명칭어는 시대별로 용어 사용에 일정한 특징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창제 시기: ‘훈민정음’, ‘정음’, ‘언문’이 공존한 시기. 이때의 ‘언문’은 비하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② 16세기~ 19세기 말 : ‘언문’이 주류이고 ‘언자’(諺字)도 부분적으로 쓰였다. 후자는 ‘글자’라는 뜻이 강하여 전자보다 더 좁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③ 19세기 말~ 20세기 초 : 개화기 이후 민족의식이 본격적으로 발로되면서 ‘국문’이 등장하였다.
④ 20세기 초~ 현대 : 일제 치하에서 ‘국문’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게 됨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져 널리 쓰이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로 이어졌다.




1) 이 ‘한글모’는 ‘朝鮮言文會’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한글’은 ‘朝鮮言文’에 대응하고 ‘모’는 ‘會’를 뜻한다.
2)「한글모 죽보기」의 검토를 통해 ‘배달말글’의 최고(最古) 사용 연대(1911.9.3)도 문증(文證)되었다. ‘배달말글’이란 말은 광복 후 최현배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미 주시경에 의해 1911년에 사용된 것이다(고영근 1994).
3) 고영근(1983a/1994) “한글의 유래”,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고영근(1983b/1994), “개화기 국어연구단체와 국문보급활동”, 「통일시대의 어문 문제」, 도서출판 길벗.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BlogIcon 멋진백작 | 2009.02.17 23:58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잡지형 블로그인가요? ^^
좋은 한글회사 ^^ 오래된 고객이랍니다.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

한알에스에스(영문으로 쓰기가 거북한^^)에 등록하고 자주 들를 게요.
엮인글과 댓글 감사합니다. oTL
BlogIcon 온한글 | 2009.02.18 09:32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백작님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정보 많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자주 찾아와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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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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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 창제 반대의 이유

 세종 25년 1443년 12월 한글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기뻐서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은 실제로 거의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술원 부원장에 해당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선두로 그 학사 일당 7명이 한글 창제 후 두 달째인 세종 26년 1444년 2월 대왕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문을 직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장하기를, 만약 쉬운 한글이 시행되면 어려운 한문은 학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문 제 3항을 보면 ‘쉬운 한글만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하게 된다면 왜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구하겠나이까?’ 하는 반론이 그 핵심이었다.1)

 그들은 또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선진국 중국과 같은 수준인데, 그 학문을 버린다면 스스로 야만인이 돼 문명의 큰 누가 아니겠느냐?’며 반론을 펴기도 했다.2) 그렇다면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눈에 나라를 쇠망으로 이끌려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리학은 춘추시대의 학자 공자(孔子, 552~479 B.C.)의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을 말하는 것으로 유학 중에서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우리 조선시대로서는 이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추구했던 유일의 선진 학문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그 절대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한문을 어렵다고 익히지 않는다면 후진국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굳이 강행하는 한글 창제를 보고 당시 식자층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더욱이 당대의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는 최만리로서는 그 선봉에 있는 것이 충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그들을 썩은 선비라고 비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世宗과 같은 가장 偉大한 明君이 出現한 한편에는, 이 崔萬理 따위와 같은 固陋하고 腐敗한 低能兒도 出現되었던 것입니다. 『慕華丸』에 中毒된 『假明人』의 醜態요 發狂이라고 보아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마는, 歷史上에 永久히 씻어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지』3)를 끼치어놓게 됨은, 그를 爲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읍니다. 그러하나 그와 같은 病症은 이제도 오히려 遺傳됨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金允經, 「朝鮮文字와 文字史」,1938, 86면)

이는 事大慕華의 精神에 위반하여…頑强히 이를 반대한 몇몇 漢化主義에 中毒된 臣下들이 있었으니, 그는 곧 副提學 崔萬理를 先鋒으로 하여,…따위이었다. 世宗大王은 이 事理를 모르는 愚頑한 反對를 抑制하기 爲하여, 이 反對者들을 모두 義禁府에 내리사…. (최현배, 「한글의 바른 길」, 1937, 4면)


 반대로 어려운 한문을 배우지 않고도 선진 학문의 추구가 쉬운 한글만으로 족하다고 했다면, 아첨을 일삼는 썩은 문신이었을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 선진 외국들의 언어를 어려워도 기피하지 않고 반드시 힘써 배워야 하는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2. 한글의 위상에 대한 오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대왕은 이 반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던가?
 첫째, 세종은 본인 역시 같은 지식층으로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과 같은 생각에 대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한글 창제에 대한 오해를 염려하고 처음부터 비밀리에 사업을 결행하였을 것이다.

 세종의 의식이 얼마나 사대숭한(事大崇漢)으로 무장되어 있었는지는 당시 기록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다. ‘사대는 당연히 정성으로 하라’(세종 8년) ‘유교 경서를 연구하라’(세종 15년) ‘모든 학문의 길은 경학이 근본’(세종 18년) ‘양국의 동맹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는 것이므로 정답게 지극히 하라’(세종 13년) 등을 명했던 것이다.4)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당시 식자층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 항(崔恒, 1409~1474)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세종 16년 1434년에 그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자, 세종이 첫째로 발탁해 집현전 부수찬(副修撰)과 궁중의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으로 등용하고, 임금 가까이서 한글 창제를 담당케 했다.5)신숙주의 「保閒齋集」任元濬序에도 ‘世宗創製諺文, 開局禁中, 親揀名儒.’라 하고 그 사실을 천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야담으로 미화된 점인데, 약 2백 년이나 흐른 뒤인 1621년 「어우야담」중 ‘황룡 현몽과 세종 16년 알성장원’이라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1434년 세종대왕이 인재를 뽑기 위해 알성시를 공포한 뒤 시험 전날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낮잠 중에 과장인 성균관 대성전 서편 잣나무에 큰 황룡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놀라 내관을 보내 보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항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응시자는 이 장원백(壯元栢)에서 낮잠 자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柳夢寅, 「於于野談」권 2)

 유몽인(1559~1623)에 의하여 서술된 이 설화에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의 뜻을 받들어 한글 창제를 주관하고 완성한다는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한글 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태허정(太虛亭) 최항의 세종 16년 알성급제를 이렇게 설화화한 것은 그만큼 성스러운 대역사를 완수해야 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둘째, 한글 창제는 한문을 대신할 국자(國字)의 창제가 아니라, 표기수단이 없는 하류 서민층에게 쉬운 문자를 새로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의 글자는 상류층의 한문, 중류층의 이두문에 이어 하류층을 위한 한글이 추가된 3중 체계로 변화되었다. 10년에 걸친 대역사를 세종 25년 1443년 12월에 완성하면서, 세종은 「訓民正音例義」어제(御題) 서언에서 우민 즉 무식한 서민층에게 쉽게 익혀 일상생활의 기록을 위한 문자로 편하게 사용하라고 공표했다. 이는 애초부터 지식층의 반발을 전제하고 한글의 사용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한 것이었다.6)

 그런데 이렇게 미리 그 대상을 밝혔음에도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일파가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그들을 불러 한두 가지 질문을 하고 이튿날 석방했다.7)

 필경 세종은 저들의 문물 후진화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간취하고 벌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은 이후 재발하지 않았다. 당시 청백리로 알려져 있던 최만리를 필두로 한 그들의 반대는 충심에서 비롯된 염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군신이 같은 지식인으로서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세종의 신문자 행용 정책은 강행되었고, 한자음 표준화를 위한 문서 번역과 신문자 보급을 위한 해설서 편찬, 서민들에게도 읽히기 위한 악장(樂章) 「용비어천가」창작 등으로 급물살을 탔다.

 이렇게 해서 인공문자 한글의 창제가 거둔 성공은 세종 27년 1445년 「용비어천가」 가사 번역, 1447년 「석보상절」서술과 「월인천강지곡」창작 등으로 확인된다. 그 성공의 비결은 표기할 대상어에 대한 정확한 음운 분석, 음운 식별이 완전히 가능한 자소(字素)의 완비였다. 이 성공은 당시 언어학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명시해주는 실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오늘날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해 국자 창제와 한글 전용 혹은 민족자주정신과 한자 폐지 등으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그렇게 위조하지 않고도 그의 독창적인 창조성과 진취성에 대해서만 천명해도 충분할 터인데, 오늘날의 시류에 맞추어 과하게 해석하는 것은 자칫 교훈은커녕 반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3.우리말의 역사상 한글이 갖는 한계

 역사상 문자로서는 당초에 한자만 쓰였다. 당시 한자는 우리말에 적용한 차자표기의 개발로 한문 원래의 한자와 이두, 향찰 등의 차용 한자로 용법상 양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2중체계는 15세기에 이르러 한글이 추가됨으로써 3중체계로 복잡해져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다가 다시 2중체계로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면서 한글이 비로소 격상되지만, 그것은 순국문에 한문 번역,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병기하는 것이었지 독립적인 순국문은 아니었다.8)

 순국문이 아닐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해독상의 의미 불명, 오독 때문이었다. 기록을 보면 한글 전용을 선도했던 주시경(1876~1914)조차 ‘한문 아는 사람도 한글로만 쓴 글은 10중 7~8은 모르니, 차라리 한자로나 쓰면 한문 아는 사람이나 시원히 뜻을 알 것이라’고 동음어 문제를 지탄한 바 있다.9)

  1945년 광복 후 팽배해온 ‘한글전용주의’에 대한 반론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7할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들을 순한글로 표기는 할 수 있어도 동음이의어가 많은 까닭에 그 내용의 판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력상의 어려움 때문에라도 오늘날 많은 한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한글전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世宗實錄」권 103, 20 뒤)
2) 文物禮樂, 比擬中華, 分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之香, 而取螳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世宗實錄」권 103, 20 전)
3)『페지』는 영어 ‘page’를 당대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중 도서명이 아님에도 『』표기로 처리한 것들은 원저의 표기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4)上曰, 惡是何言也. 事大當以誠, 皇帝已知産於吾國, 不可誣也. (「世宗實錄」권 33, 19 후)
必欲精熟貫穿 , 莫如專經之學. (「世宗實錄」권 59, 13 후)
上, 命集賢殿副校理李季旬. 金汶等曰, 凡學之道, 經學爲本. 固所當先. 然只治經學. 所不通乎史 則其學未博. 欲治史學. (「世宗實錄」권 74, 10전)
中國與本朝, 合爲一家, 情親至矣. (「世宗實錄」권 53, 4 후)
5) 宣德甲寅, 英陵臨策士, 擢公第一, 授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 合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 「訓民正音」, 「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正. 雖規模措置皆稟睿旨, 而公之協亦多. (崔 恒, 「太虛亭文集」권1), (徐居正, 崔文靖公碑銘 幷序 1~2장)
6)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 ( 「世宗實錄」권 102, 42전)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絡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 憫然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世宗實錄」권 103, 36 후)
7) 上覽疏, 謂萬里等曰, …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題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世宗實錄」권 103, 21 후)
8) 勅令 第一,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 自本日止. … 公文式第十四條 法律 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高宗實錄」권 32, 64 전~65 전) 一般解釋上에 疑誤할 慮가 有할뿐더러 規式에 違反되겠삽기 左開條件을 設定 施行할 事로 閣議에 決定하야 內閣總理大臣이 各部에 照會를 發홈. 一, 各官廳의 公文書類난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하고, 純國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함을 不得홈. 一, 外國官廳으로 接受한 公文에 하야만 原本으로 正式處辨을 經하되, 譯本을 添附하야 케 홈. (「官報」3990호, 1908년 2월 6일, 官廳事項)
9) 山 산이라 하던지 江 강이라 할 것 같하면 이런 말들은 다 한문 글자의 음이나 또한 조선 말이니 이런 말들은 다 쓰난 것이 무방할뿐더러 맛당하려니와 만일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이 한문의 음으로 써서 노은 글자의 뜻을 몰을 것 갓하면 단지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만 아지 못할뿐이 아니라(미완, 쥬상호씨, 국문론, 「독립신문」2권 114호, 1897년 9월 25일) 한문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문의 음만 취하야 써서 노은 고로 흔히 열 자면은 일곱이나 여덟은 몰으나니 차라리 한문 글자로나 쓸 것 갓하면 한문을 아난 사람들이나 시원이 뜻을 알것이라 그러나 한문을 몰으난 사람에게는 엇지하리요 이런즉 불가불 한문 글자의 음이 조선말이 되지 안한 것은 쓰지 말아야 올을 것이요…(쥬상호 씨, 국문론, 전호 연속, 115호, 1897년 9월 28일)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방문객 | 2009.06.21 22: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도움 많이 됬습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09.06.22 09: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방문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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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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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의 제자 원리

 「훈민정음」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해설을 한 부분은 첫머리의 제자해 (制字解)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글 자형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언어학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깊이 있게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적인 측면의 해설만을 토대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글 자모 28자는 각각 뿔뿔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자를 먼저 만든 다음 나머지는 이것들에서 파생시켜 나가는 식의 이원적인 체계로 만들어졌다. 자음(당시 용어로서는 초성)글자 17자는 먼저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제자해에서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래쪽 세 글자에 대한 내용이 쉬우므로 그 쪽부터 보기로 한다. 순음 ㅁ자는 ㅁ음, 즉 〔m〕음을 소리 낼 때 쓰이는 발음기관인 입술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치음 ㅅ자는 같은 원리로 그 소리, 즉 〔s〕음을 소리낼 때 조음점(調音點) 구실을 하는 이의 모양을, 후음 ㅇ자는 역시 같은 원리로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글자 ㄱ과 ㄴ도 그 소리를 낼 때 관여하는 발음기관의 모양인 혀를 본떠서 만든 점에서는 나머지 세 글자에서와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발음기관 자체의 모양, 즉 가만히 있을 때의 혀 모양이 아니고 바로 그 소리를 낼 때의 혀 모양을 본떴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아음(牙音, 즉 연구개음) ㄱ자는 그 소리 〔k〕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설근(舌根)이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으며, 설음(舌音) ㄴ자는 그 소리 〔n〕음을 낼 때의 상태를 본뜬 것으로 혀가 윗 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는 것이다.

 설근이 목구멍을 막는다고 한 것은 혀 뒤 쪽이 연구개에 닿아 숨의 통로를 막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고, 혀가 윗 잇몸에 닿는다고 한 것은 혀끝이 윗 잇몸에 닿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겠다. 이때 ㄱ을 소리 낼 때는 혀 뒤쪽이 입천장까지 올라가므로 혀 앞쪽은 자연히 내려오는데 ㄱ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며, ㄴ을 소리낼 때는 반대로 혀 앞쪽이 윗잇몸에 가 붙으려니까 혀 뒤쪽이 처지게 되는데 ㄴ자는 바로 그러한 혀 모양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 1과 그림 2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 그림은 〔ŋ〕과 〔n〕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각각 ㄱ과 ㄴ의 모습과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ŋ〕보다 〔k〕를 발음할 때의 것이 더 좋겠으나 해당 그림이 없어 대체한 것이다. 혀 모양에서는 똑같으므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것이나 좋을 것이다.)
  

   

 

  자음 17자 중 나머지 글자는 이 기본자에다 획을 하나씩 더해서 만들었다. 그 과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⑶은「훈민정음」의 해당 부분 원문이다.



 여기에서 획을 더해 만든 글자들은 그 화살표 앞쪽의 기본자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자음들이다. 즉, ㅋ은 ㄱ과 마찬가지로 아음(牙音)이며, ㅂ과 ㅍ은 ㅁ과 마찬가지로 순음(脣音)이다.

 같은 종류의 자음이되 획이 하나 씩 덧붙으면 소리가 한 단계씩 더 거센() 소리가 되는데 가획은 바로 그것을 표시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다만 괄호 안에 있는 글자들은 화살표 왼쪽의 기본자들로부터 가획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 경우에는 소리가 더 거세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뜻은 없다고 하였다.
 괄호 속의 글자 중 자는 그 중에서도 예외적인 글자에 속한다. 은 아음(연구개음)인데 그것을 아음의 기본자인 ㄱ에서 파생시킨 것이 아니라 후음 ㅇ에다 획을 덧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 ㅇ이 워낙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두 자는 오래되지 않아 자형에서 구분이 없어져 초성 자리에 쓰일 때는 아무 소리가 없는, 다만 빈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만 하게 되었고 종성 자리에서는 애초 자가 대표하던 〔ŋ〕으로 발음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음성적으로 거리가 먼 둘이 한 자형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모음(당시의 용어로는 중성) 글자 11자는 먼저 기본자 세 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이것들을 조합하여 만드는 방식을 취하였다. 기본자는ㆍ, ㅡ, l 인데 이들의 제자 원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음의 기본자 3자는 각각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음의 기본자들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글자들은 이들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과도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을 발음할 때는 각각 혀를 오그리고 펴고 세우게 되는데 ㆍ, ㅡ, ㅣ는 각각 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음자의 나머지 여덟 글자는 ㆍ 를 ㅡ와 ㅣ에 결합시켜 만들었다.




 이들 모음자 중 ⑸는 ㆍ를 하나씩 결합하여 만들고 ⑹은 두 개씩 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⑸ 가 단모음임을, ⑹ 이 이중모음임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것은 초출(初出)과 재출(再出)이라는 용어로 구별했는데 ㅛ, ㅑ 등은 ㅣ+ㅗ, ㅣ+ㅏ로 구성되어 있어 ㅣ에서 일어나는 소리이므로 재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ㆍ가 ㅡ의 위쪽과 아래쪽, ㅣ의 왼쪽과 오른쪽 어디에 배치되었느냐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여기에도 어떤 뜻을 담고 있다. ㆍ가 왼쪽과 오른쪽에 찍힌 것은 그 모음이 양모음 (陽母音) 임을 나타내주고, 아래쪽과 왼쪽에 찍힌 것은 음모음 (陰母音) 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엄격한 모음조화 규칙이 있었으며, 더욱이 훈민정음 제작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 (性理學)에서 음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으므로 양모음, 음모음의 구분이 이처럼 제자의 원리에까지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음자의 ㆍ는 「훈민정음」 및 「동국정운」(1447)에서는 제 모습을 지키지만 이들 이외의 문헌에서는 ㆍ가 아직 완전히 동그라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문헌에서나 동그라미 모양이 흐트러진 문헌에서나 다같이 ㅗ, ㅏ, ㅛ, ㅠ 등의 ㆍ는 이미 그것이 기원적으로 ㆍ자였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실용적으로 이들 모음을 「훈민정음」에서와 같은 형체로 쓰기 불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글자에서 ㆍ가 제 음가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ㅗ는 자형상으로는 ㅡ와 ㆍ의 결합으로 만들었으나 ㅗ가 음성적으로 ㅡ음과 ㆍ음의 복합이라는 뜻을 담았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ㅗ, ㅏ 등에서 ㆍ의 모습을 살려 둘, 그 글자의 제자 과정을 굳이 살려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이상 28자 이외의 자모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도 해설을 하고 있다. ‘세종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자모를 만들었던 것이다. 먼저 순경음(脣輕音)이라 불린 ㅸ가 있었다. 이는 ㅂ 밑에 후음 ㅇ을 연서(連書)하여 만든 것인데 순경음이 ㅂ에 비해 입술을 거벼이 다무는 소리임을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 ㅂ 〔p〕음이 폐쇄음임에 비해 ㅸ〔ß〕음이 마찰음임에서 생기는 차이, 즉 숨의 차단의 정도가 다름을 나타냈던 것으로 해석된다. ㅸ 이외에도 ㅱ, ㆄ를 비롯하여 등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한자음의 표기에만 쓰였을 뿐 한국어의 표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28자 이외의 자모로 ㄲ, ㄸ, ㅃ, ㅆ, ㅉ, ㆅ처럼 같은 글자를 두 개씩 겹쳐 만든, 이른바 각자병서(各字竝書)가 있었다. 이렇게 두 글자를 겹쳐 만든 것은 이 소리들이 엉기는 소리임을 표시해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엉긴다(凝)’는 표현은 된소리에 대한 인상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모음자에도 11자 이외에 많은 자모를 만들어 썼다. 이들은 그 발음에 따라 11자 중의 2자 내지 3자를 복합하여 만든 것으로서 ⑺에서와 같이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여기서는 ㆍ의 형체를 살리지 않고 현재의 글자체로 예시하겠다. 그리고 당시에도 한국어 표기에는 쓰이지 않던 6개의 자모가 더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빼기로 한다.)



  
 이상에서 보면 한글의 제자 원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글자의 모양을 발음기관에서 따왔든 천(天), 지(地), 인(人) 삼재에서 따왔든 그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 하나와, 낱자 28자가 제각기 다른 연원을 가지고 관련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기본 글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만듦으로써 글자의 조직성을 높였다는 것 하나다.
 이 중 발음기관에서 글자의 모양을 본뜨겠다는 착상은 매우 기발하며, 자모들을 이원적으로 만들겠다고 한 착상도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다. 한글을 흔히 과학적인 문자, 독창적인 문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특히 ㄱ과 ㄴ을 발음할 때의 혀의 모양에 대한 기술(記述)의 과학성은 각별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글 창제 때 중국 한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이나 그 이전 「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12월 조의 기록에 다같이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한글의 자형이 고전을 닮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표현이 너무 소략하여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글은 모양이 전반적으로 네모지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다고 해도 실제 자형은 여러 가지로 달리 디자인될 수 있을 터인데 입술의 모양이든 혀의 모양이든 ㅁ, ㄱ, ㄴ처럼 네모꼴로 만든 것은 한자의 영향일 수 있을 것이다. 기본 글자를 만들고 거기에 가획을 하거나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도 한자의 육서(六書)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한자뿐 만 아니라 당시 주변 국가의 문자들을 여러모로 참조하고 그것들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영향이든 한글의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발명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앞 시대까지의 축적된 지혜에서 한걸음 발전한 산물인 것이다.

 
2. 한글의 특징

 앞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살펴보면서 한글이 문자적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고, 다른 자리에서도 한글의 독특한 특징을 여러 가지 보아 왔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좀더 부연해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먼저 한글 자모의 복합성에 대해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이원적인 구성방식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자모의 한 부분이 어떤 음성정보를 대표하는 구실을 한다.
 가령 ㅋ은 한 자모지만 가운데 획이 분리되어 나올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유기성(〔+aspiratel〕)이라는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요소다. 이것은 ㅌ의 가운데 획도 마찬가지다. ㅛ,ㅑ등도 한 자모들인데 그 중의 한 획이 반모음 j 를 대표하고 있다. 한 자모가 한 음소보다 작은 자질들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 다른 문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 특징을 Chao(1968)는 다음과 같이 꽤 유머러스하게 지적한 바 있다.

 ⑴  한국 문자(‘한글’ 또는 ‘언문’ 이라 불린다)의 체계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있다. 첫째, 그것은 일본 문자인 ‘가나’보다는 알파벳에 가깝다. 둘째, 문자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단위 기호의 부분들이 음성의 분석적 자질을 대표하는 문자체계이다. 중국 문자에서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어떤 다른 문자체계에도 그러한 것이 없다. 예컨대, 영어의 자음 b는 기둥이 위로 되어 있어서 유성음이고 p는 기둥이 아래로 되어 있어서 무성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성 치음인 d는 기둥을 아래로 하면 q가 되는데, 만약 이와 같은 분석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무성 치음 〔t〕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문자에서는, 자모의 일부분조차도 때로는 음성학적으로 연관성이 있다. 예컨대, 경음의 글자는 평음기호를 겹쳐서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면, ㅅ은 평음 s이고, ㅆ은 경음 s(흔히 로마자로 ‘ss'로 표기한다)를 나타내며, ㄱ은 k를 ㄲ은 경음 k('kk')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모음자의 어떤 변형은 선행하는 반모음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ㅏ는 a, ㅑ는 ya, ㅓ는 를, ㅕ는 y를, ㅗ는 o를, ㅛ는 yo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이 특징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Sampson(1985)이다. Sampson은 순전히 한글만을 위해 지금까지 문자의 분류에 등장한 일이 없는 자질문자(featural writing) 란 종류를 하나 따로 설정하였다.
 
 <그림3> 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한 자모가 음소보다 작은 음성자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독립된 문자의 종류로 분류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글을 자질문자라는 별개의 종류로 분리해 내야 하느냐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문자의 분류는 각 자모가 한 덩어리로서 언어의 어떤 단위를 대표하느냐에 따라 음절문자, 음소문자로 나누는 만큼 한글은 그 점에서 역시 음소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이한 문자의 종류로 등록될 만큼 한 자모의 일부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한글은 글자들 사이에 유연성이 높다.
 우리는 ㄱ과 ㅋ이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요, ㄴ, ㄷ, ㅌ이 다른 한 계열의 소리를 대표하는 글자라는 것을 글자형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또, ㅏ, ㅓ, ㅗ, ㅜ에 비해 ㅑ, ㅕ, ㅛ, ㅠ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글자들이며 그러한 공통점을 제외하면 ㅏ와 ㅑ, ㅗ와 ㅛ가 하나로 묶이는 글자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한 자모 안의 획이 무의미한 단순한 획이 아니고 어떤 음성자질을 대표하는 획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은 한글의 다른 특징으로 ‘모아쓰기’에 대해서 다시 보기로 하자. 한글은 음절 단위로 묶어 다시 한 자로 만들어 쓰는 특이한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세종실록」권 102의 기록에 나와 있다. 새 문자에 대해 거의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 그 짤막한 기록에서 이 모아쓰기에 대한 규정을 넣고 있는 것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이 규정은 「훈민정음」의 예의(例義)와 합자해(合字解)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모아쓰기에 대해서 이처럼 계속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방식이 워낙 특이 하여 올바로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음자와 모음자를 분리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다시 음절 단위로 묶어 운영하려고 하니 자연히 어려움도 따르고 세심하고 상세한 규정도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자, 즉 모음자를 초성자, 자음자와 완전히 다른 꼴로 만든 것이 무엇보다 그러하지만 글자 모양의 디자인에서부터 모아쓰기를 전제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한글을 이처럼 모아쓰기로 운영하려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당시 문헌은 으레 한자와 한글이 섞여 쓰였고 또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다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때 한자 하나에 한글도 한 글자의 꼴로 나타내는 것이 한글을 풀어 썼을 때 보다 어울렸을 것이다. 또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도 ‘訓民’을 ‘ㅎㅜㄴㅁㅣㄴ’ 으로 표기하는 것보다 ‘훈민’ 으로 표기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그 동기가 어떻든 모아쓰기는 한글로 하여금 매우 특이한 문자가 되게 하였다. 활자를 만들 때 한글은 ‘한’을 하나 ‘글’을 하나 독립된 활자로 만든다. 이때 ‘한’이란 묶음을 부를 언어학 용어는 무엇인가? ‘letter’ 도 아니요 ‘alphabet’ 도 아니요‘syllabary’ 도, ‘character’도 아니다. ‘alphabetic syllabary’ (Taylor1980) 라고나 할까?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그만큼 특이한 증거다.
 컴퓨터의 한글코드를 만들 때도 조합형으로 하느냐 완성형으로 하느냐가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완성형이란 처음부터 ‘ 한, 값 ’ 처럼 음절단위로 묶인 글자모양을 입력하는 방식인데, 이러한 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이 한국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역시 특이한 모아쓰기 방식이 빚어내는 사건들이다. 이 외에 더 근원적인 문제로 사전의 자모 배열 순서며 받침의 문제들이 있음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다. 한 마디로 모아쓰기는 한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한글의 운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일 것이다.

 * 이 글은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인 이익섭 교수의 저서 중 「한국의 언어」중에서 저자의 재가를 얻어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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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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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의 창제와 반포
 
 한글의 반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한글의 창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한글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에 반포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443년 창제와 1446년 반포라는 설은 <세종실록>의 다음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世宗實錄> 25년(1443) 12월조 끝부분
(2)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
    <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 끝부분


 20세기 초의 학자들은 이 두 기록을 놓고서 고민에 빠졌다. 1443년 12월에 언문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1446년 9월에 다시 훈민정음(=언문=한글)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한글이 완성된 시기가 둘 중 어느 것인지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완성되기는 했으나, 이것을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어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1446년 9월에 최종완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추측을 보태어, 1443년 12월에는 한글이라는 문자를 정식으로 온 나라에 공표한 것은 아니나, 1446년 9월에는 한글을 온 나라에 반포(頒布)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오게 되었다.

 한글날을 정함에 있어서도, 위의 두 기록 중 후자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1443년 12월의 언문제작은 말하자면 일종의 베타버전인 셈이고, 1446년 9월에 정식으로 출시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두 기록 모두 정확한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냥 ‘이 달에(是月)’라고 하여서, 한글날을 정확히 며칠로 해야 할 지 난감하였다. 그래서 그냥 9월 그믐날인 9월 30일로 가정하고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2)의 기록은 훈민정음(=언문=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도 함)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세종은 1443년 12월 한글을 완성한 뒤, 신숙주, 성삼문 등의 신하들로 하여금 한글과 관련된 연구 및 여러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게 하였는데, <훈민정음>은 그러한 책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한글의 제자원리 및 사용방법을 해설한 책인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숙주 등의 신하들이 이 책의 원고를 작성하여 1446년 9월에 완성한 것이다.
 실록에서 예컨대 ‘東國正韻成’이라고 하면 <동국정운>이라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며, 이와 비슷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2)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의 완성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의 책의 완성을 말하는 기록인 것이다.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정식으로 출간된 시기는 아니다. 위의 (2)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원고, 즉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이것을 책으로 간행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주자소나 교서관 같은 출판 관련 기관에 원고를 보내면 거기서 이 원고로 활판을 짜거나 목판에 글자를 새겨야 하고 이것을 먹으로 찍어내고 제본하는 등등의 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책이 완성된다.
 완성된 책을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이 이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이것을 보통 반사 (頒賜)라고 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신하들에게 반사(=반포)한 것은 1446년 9월보다 최소한 몇 달 뒤의 일일 것이다. 원고가 완성되고 신하들에게 반사되기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일도 종종 있다. 요컨대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 반사 내지 반포된 시기도 아닌 것이다.

 위의 내용은 일찍이 1930년대에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김민수(金敏洙) 선생 같은 분은 위의 (2) 대신 (1)이 한글의 완성시기임이 분명하므로 한글날도 이에 따라 양력 1월(음력 12월 그믐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선생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잘못된 주장도 대중들에게 계속 유포되었다. 한글이 1443년 12월에 완성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텐데, <세종실록>을 비롯한 사료에서 한글 반포에 관한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중대한 일이, 그것도 공식적인 일이 사료에 누락되었을 리는 없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상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는 아래에서 논하겠다.

 오랫동안 실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이 194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그 책의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문의 날짜가 1446년 9월 상순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원고가 완성된 시기를 좀 더 좁혀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본래 (2)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글날을 음력 9월 그믐날로 잡았었는데, 이것을 20일 정도 앞으로 당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한글날을 10월 29일에서 10월 9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이 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된 날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의 원고가 완성된 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 한글 창제의 주체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세종이 임금으로서 여러 政務에 바빴을텐데 혼자서 한글 창제 업무를 담당했겠느냐? 집현전에 훌륭한 신하들이 많이 있었으니,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 한글 창제 업무는 집현전의 신하들이 하지 않았겠느냐’고 다시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즉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親制說보다는, 세종이 신하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協贊說 내지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로는 신하들이 만들었다는 命制說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글을 세종이 親制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1)이 그러하고,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의 정인지의 서문도 그러하다.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히 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려 주신 聖人으로서 제도와 施政 업적이 百王을 초월하시며, 정음을 만드신 것도 옛것을 본뜨지 않고 자연에서 이룬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인위적인 사사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다. (癸亥冬 我殿下 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 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訓民正音> 鄭麟趾 序 (1446년 9월 상순)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런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한글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작업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위의 (1), (2)의 실록 기사에서 ‘이 달에’라고만 하고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지 않은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실록에서 이렇게
날짜를 명기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세종이 어전에서 공개적으로 신하들에게 한글 관련 사업을 하도록 명을 내렸다면, 史官이 이것을 史草에 기록했을 것이고, 이것은 실록 편찬시에 사초의 정확한 날짜와 함께 수록되었을 것이다.

 위의 (1), (2) 기사에 날짜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그 사건이 공개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세종이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했던 것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이 완성된 이상 언제까지나 비밀로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자는 널리 사용하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세종 26) 2월 16일이다. 
 
(4)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과 진양대군 王柔, 안평대군 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을 임금께 여쭈어 결정하였다. (이 일에 대한) 상과 보상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命集賢殿校理崔恒 副校理朴彭年 副修撰申叔舟 李善老 李塏 敦寧府注簿姜希顔 等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東宮與晉陽大君王柔安平大君瑢 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 <世宗實錄> 26년(1444) 甲子 2월 16일 丙申條

 나중의 결과야 어찌 되었든, 위 (4)의 기사는 세종이 한글을 가지고서 공개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운회>(<古今韻會擧要>로 추정됨)라는 중국의 韻書(한자들을 발음별로 분류한 책)에 한글로 음을 표시하여 달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일에 집현전의 비교적 하급관리에 속하는 신하들을 동원한 것이 주목된다. 집현전의 관리들을 동원하고 싶으면,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집현전의 책임자와 상의하여 人選을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일을 급속하게 추진한 듯하다. 당시 집현전의 사실상의 책임자는 副提學인  崔萬理였다, 

 최만리로서는 자기를 제쳐놓고 새파랗게 젊은 직원들을 차출해 간 세종의 처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한글이란 걸 만들어서 뭔가 일을 추진하려 하는 세종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최만리의 등을 떠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 20일 그 유명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한글 창제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는데, 그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하여 일찍부터 드러내 놓고 한글 창제 사업을 진행했다면, 최만리 등이 이제 와서 반대하기 시작했을 리 없다. 세종이 혼자서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몰랐을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 아닌 까닭에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는 것은 이 때(1444년 2월)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대 상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 본 세종은 크게 진노하여서, 상소에 참여한 최만리 등 7명의 집현전 관리들을 불러다 호통을 친 뒤 의금부에 가두도록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석방했다). 세종이 상소에 참여한 관리들을 불러다 놓고 한 말을 보면 세종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세종의 반응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또 이두를 만든 본 뜻이 곧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便民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언문도 또한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薛聰은 옳게 여기면서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② 또 그대들이 韻書를 아느냐? 四聲과 七音을 알며 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③ 상소문에 말하기를 “하나의 새롭고 신기한 재주”라고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소일거리가 없어서 책을 벗삼고 있는 것이지,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④ 또 내가 늙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세자가 도맡아서 하고 있고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참여해서 결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언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위의 ②는 세종이 음운학에 대해 지닌 학문적 자부심을 잘 드러내 준다.
한글은 당시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음운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학자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할 만한 당시의 음운학자를 꼽자면 세종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세종은 그러한 언어학적 식견을 가지고서 한글을 만들었으며, 기득권에 젖어 있던 儒臣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올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글 창제 사업을 신하들 몰래 은밀히 추진하였다. 한글을 다 만들고 나서, 한글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집현전의 신숙주, 성삼문 등을 비롯한 젊은 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儒臣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세종은 강한 의지로 이것을 돌파한 것이다.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위의 내용은 사실 이기문(李基文) 선생이 오래 전에 소상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일반 대중과 학자들의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글의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친제설에 반하는 증거로 들곤 한다.

(5) 世宗께서 諺文廳을 설치하여 申叔舟, 成三問 등에게 命하여 諺文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字體는 梵字를 본받아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語音 가운데 文字(漢字)로 적을 수 없는 것도 모두 통하여 막힘이 없다. <洪武正韻>의 글자들 또한 모두 諺文으로 쓰고 드디어 五音을 나누어 분별하니, 이를 牙音, 舌音, 脣音, 齒音, 喉音이라 하는데, 순음에는 輕重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正反의 구별이 있고, 글자에 또한 全淸, 次淸, 全濁, 不淸不濁의 차이가 있다. 비록 무지한 아낙네라도 똑똑히 깨닫지 못함이 없을 정도이니, 聖人께서 物을 창조하시는 지혜는 凡人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世宗設諺文廳 命申高靈成三問等 製諺文 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二字 其字依梵字之 本國及諸國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 洪武正韻諸字 亦皆以諺文書之 遂分五音而別之 曰牙舌脣齒喉 脣音有輕重之殊 舌音有正反之別 字亦有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之差 雖無知婦人 無不瞭然曉之 聖人創物之智 有非凡力之所及也) 성현 <용재총화> 권7

 세종이 언문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을 시켜서 한글을 만들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다음의 기사들과 함께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①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친히 이름난 선비 8명을 뽑아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을 짓는 것을 맡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親簡名儒八員 掌製訓民正音東國正韻等書) 姜希孟
    「太虛亭墓誌文」
  ②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을 특별히 뽑아 해례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깨치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極簡一時名儒 著爲解例 使人易曉) 任元濬
    「保閑齋集序」
  ③ 임금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上以本國音韻 與華語
      雖殊 其牙 舌脣齒喉 淸濁 高下 未嘗不與中國同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母二十
      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姜希孟「文忠公行狀」
  ④ 세종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
      本國音韻 與華語雖殊 其五音淸濁高下 未嘗不與中國同 而列國皆有國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 
      母二十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李坡의 「申叔舟墓誌」
  ⑤ 세종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열어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諸國各製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字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擇文臣撰定) 李承召 「申叔舟碑銘」
  ⑥ 本朝 세종 28년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다. 임금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문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의
      방언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드디어 자모 28자를 만들어 언문이라 이름하였다.
      궐내에 局을 열어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이를 찬정하게 하였다. 대체로 古篆을
      본떴으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었고 글자가 비록 간이하나 전환이 무궁하여 여러 언어의 소리 중에서
      문자(漢字)로 능히 적을 수 없는 것까지 다 통하여 막힘이 없다. (本朝世宗二十八年 御製訓民正音 上以爲
      諸國各製文字 以記其國之方言 獨我國無之 遂製子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命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 撰定之 盖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字雖簡易 轉換無窮 諸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通無) <增補文獻備
      考> 권108 「樂考」訓民正音條


 ①은 崔恒의 文集인 <太虛亭集>에 수록되어 있고 ②~⑤는 申叔舟의 文集인 <保閒齋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6개의 글이 모두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世宗이 諺文 자모 28자를 창제한 후 禁中에 局을 설치하여 名儒(또는 文臣) 몇 명을 뽑아서 訓民正音 解例 등의 책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③~⑥에서는 ‘撰定’이라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인 책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撰定’이란 말이 책이나 詩文을 짓는다는 뜻이므로 <訓民正音>(해례본)과 같은 책을 만들게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지 訓民正音이란 문자를 만들게 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6)의 기록들에서 局을 설치했다고만 하고 구체적으로 局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이 局을 <齋叢話> 권7에서 언급한 諺文廳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문청은 世宗이 언문 자모들을 다 만든 뒤에야 설치되었으며, 그 주임무는 이 문자에 대한 해설서인 <訓民正音>(해례본) 등의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6)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해서 (5)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서로 모순 없이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5)에서 ‘製諺文’이라고 한 것을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만들게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5)에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빠졌지만 그 뒤의 내용은 (6)의 기사들과 일치하게 된다. ‘諺文’이라는 말이 문자로서의 한글이 아니라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의미하는 예는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7) (세종이) 만년에는 조정의 업무에 싫증이 나서 朝會에 나오지 않았으나 학문적인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극진히 생각하여 유신들에게 명하여 局을 나누어 여러 책을 차례로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언문>, <운서>, <국조오례의>, <사서오경음해>등이 동시에 찬수되었고 다 임금의 재가를 거쳐 책이 완성되었다. (晩年倦勤 不視朝 然於文學之事 尤所軫慮 命儒臣分局 撰次諸書 曰高麗史 曰治平要覽 曰兵要 曰諺文 曰韻書 曰五禮儀 曰四書五經音解 同時撰修 皆經睿裁成書) 徐居正 <筆苑雜記> 권1


3. 한글의 보급 과정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백성들이 국가에 문서를 제출할 때에도 한자를 이용하여 이두문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한글로 작성한 문서는 국가에서 문서로서의 효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강압에 못 이겨 왜국에 투항한 백성들에게 선조임금은 왜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것을 호소하는 교서를 한글로 써서 내렸다. 이것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계층이었을텐데, 아마도 자기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의 확대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며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을 찍어내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소설을 탐닉하는 이들이 많았다. 순정(純正)한 고문(古文)이 아니라 백화적(白話的)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소설, 통속소설들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정조임금에게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소설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으로의 가치가 있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간행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많은 방각본 한글소설들은, 당시에 소설이 널리 읽혔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도 크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많았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자생활사적 의의도 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의 문자 해득률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 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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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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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 한빛나리(한글학회 연구원)

**이 글은 한글 관련 단체의 역사 1에 이은 두번째 연재입니다.


4. 한글전용 촉구, 한자혼용 . 한자교육의 반대

 

아래는 한글전용을 촉구하거나 한자혼용과 초등학교 또는 어린 자녀에게 한자교육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명서 또는 건의서를 모은 것이다. 아쉽게도 그 내용을 모두 실을 수 는 없지만 주장의 제목, 더러는 내용의 일부만을 소개하며, 아래 목록에 없는 성명 또는 건의가 더 많이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4.1. 한글전용과 국어정화 운동의 발자취


우리 말글을 지키고 바로쓰기 위한 한글단체들의 노력은 역대 정부와 정부산하 단체, 사회단체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지만, 그 힘은 오늘날까지 우리말글이 겨레의 자존심으로 우뚝 서서 한류 바람을 타고 세계로 뻗어가는 숭고한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1953. 5. 24. ‘한글간소화안’(국무총리훈령 제8호 4/27)에 대한 반대 성명.

(9. 19. 대통령이 ‘한글간소화안’을 철회. 이른바 한글파동이 끝남.)

1956. 10. 28. 한글전용 촉진 성명서(한글학회).

1957. 12. 21. 문교부의 한자 약자 제정 계획 깨뜨림.

1962. 1. 14. 문교부에 한글전용에 대한 건의서 제출.

1962. 4. 1. 정부 보조로 ‘한글전용 특별심의회’구성.

1962. 7. 23. 《한글전용 특별심의회의 회보》 제1집 펴냄(2,761말).

1963. 4. 3. 문교부의 말본교과서에 대한 결정으로 이른바 ‘말본파동’이 일어남.

1964. 11. 15. 한글전용에 관한 주장을 ‘문화선언’으로 발표(한글학회).

1. 한국의 나라글자는 한글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는 한글만 쓰기로 해야 한다.

2. 문화의 촉진은 글자생활의 기계화에 있으며, 글자생활의 기계화는 한글만을 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3.‘한글전용’은 한자어를 배척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4. 모든 학교 과목에 쓰이는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알기 쉬운 우리말로 해야 한다.

5. 한문의 전문적 학습은 지금보다 더 철저히 해야 한다.

6. 한자로 적힌 우리의 고전은 빨리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

7. 우리나라의 신문 잡지는 다 한글만 쓰기로 하여야 한다.

1965. 1. 21. 문교부의 학교 말본 용어의 그릇됨을 시정함.

1965. 3. 31. 민족 문화 선언. 민족 문화 선언인 대표(강신명 외 108인)

1. 민족정기로써 우리 얼을 살리자, 이것이 우리 문화의 생명이다.

2. 국어정화로써 우리말을 깨끗이 하자. 이것이 우리 문화의 핏줄이다.

3. 한글전용으로써 우리글을 기르자. 이것이 우리 문화의 뼈와 살이다.

1967. 1. 30. 한글전용을 위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67. 5. 5.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 결성.

1968. 12. 21. 한글전용 국민실천회를 세움.

1971. 11. 1. 《한글전용으로의 길》 펴냄.

1972. 2. 초등학교․․ 중학교 한문학습 반대 성명서 제출(한글학회 등 39개 문화단체 연맹).

1974. 7. 11. 국어교육에 대한 성명서.

1974. 7. 22. 학회 병설 한글문화협회를 결성. 이어 대전, 인천, 부산, 전북, 울산, 진주
                등에 지부 결성.

1974. 8. 5. "언어 정책을 담당하는 관계 당국,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라는
                호소문 발표.

1974. 10. 8. 한글문화협회 주최 한글날 기념 "한글문화 대강연회"를 엶.

1975. 2. 22. 한글문화협회 아래에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를 둠.

1975. 5. 30. 한글문화협회 주최 한글문화 대강연회(부산).

1975. 7. 1 글자정책에 대한 성명서 제출.

1975. 7. 1~30. 글자정책에 대한 여론조사 실시.

1975. 10. 8. 529돌 한글날 기념 한글문화 대강연회.

1976. 2. 24. 한글문화 대강연회(인천).

1976. 5. 3~4. 국어순화 대강연회. 뒤이어 전국 순회
                  (부산, 대구, 전주, 청주, 광주, 대전,춘천, 수원).

1976. 6. 30. 국어순화 추진회(←세종회) 창립 참여.

1980. 1. 28. 제5차 헌법개정에 즈음하여 "개정헌법 조문의 표기 및 표현에 대한
                 건의서"를 냄.

1981. 1. 24. <쉬운말 사전》을 증보하기 위한 ‘말 다듬기’ 첫 모임.

1981. 12. 16. ‘우리말과 글을 키우신 스승들(18위)을 위한 합동추모제전’.

1982. 8. 11. ‘일본의 역사교육 거짓꾸미기에 대한 성명서’및 성토대회.

1982. 12. 3. ‘한글 풀어쓰기 연구 모임’발족.

1982. 12. 22. '로마자 표기법은 현행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옳다'는 건의서 정부 제출.

1984. 6. 26. 서울시의 ‘서울 거리 이름 개정안’에 대한 의견서 제출.

1984. 7. 6. ‘고등학교 문법 교과서에 대한 종합 의견서’발표 및 건의서 문교부 제출.

1984. 9. 10.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86. 봄. 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연합모임(=한말글) 다시 조직.

1986. 9. 5. 국어연구소의 '한글 맞춤법 개정안' 설문에 대한 성명서 제출.

1986. 11. 15. ‘국어교육과 한자’문제에 대한 건의서 제출(29개 단체 공동-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노산문학회, 대한어머니회, 대한음 성학회, 모국어교육학회, 민족학회, 배달말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애산학회, 외솔회, 제물포수필문학회, 한국가톨릭문화선 양회, 한국겨레문화연구원,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교회사연구회, 한국독서능률개발연구회, 한국땅이름학회, 한국민속학연구소,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아동문학가협회, 한국아동문학연구소, 한국어문교육학회, 한국언어병리학회, 한국응용언어학회, 한글기 계화추진회, 한글문학회, 한글이름펴기모임, 한글학회, 해동철학회).

1986. 11. 29. ‘국어교육과 한자’ 문제에 대한 건의서 제출(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연구회, 대구 아동문학회, 대구 외솔회, 마산 외솔 회, 부산 외솔회, 부산 한문교육연구회, 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어연구회, 한국국어교육학회 부산지회, 한국어문교육학회, 한글만 쓰기모임, 한글학회 경북‧대구지회, 한글학회 마산지회, 한글학회 부산지회).

1987. 3. 29. '한글전용과 기계화' 주제 강연회.

1987. 3. 20. ‘한글전용의 교육상 이익’에 대한 건의서 제출(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7. 4. 7. ‘한자문화권에서 한글문화권으로’(한국땅이름학회).

1987. 4. 16.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창립.

1987. 4. 21. 한글전용에 관한 건의서, 한글전용추진회.

1987. 4. 25. ‘한자섞어쓰기와 국민학교 한자교육’에 대한 의견서(국어순화추진회).

1987. 5. 5. 한글전용을 특집으로 《한글 새소식》 제177호 펴냄.

1987. 5. 21. 1,036명이 서명한 ‘국민학교 한자교육에 대한 건의서’정부 제출.

1988. 6. 1. 한글로만 가로짜기 신문에 관한 건의서(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1988. 6. 5. “국민학교에서의 한자교육 부활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성명서 제출
                (한글학회).

1988. 7. 7. ‘한글만 쓰기와 국민학교 국어교육’에 대한 특별 연구발표회.

1990. 4. 25. “한글날을 법정공휴일에서 빼려는 정부의 움직임이 부당하다”는 내용의
                  건의서 대통령에게 제출.

1990. 10. 9. 《우리말살이의 바른 길》《겨레의 글자살이는 한글만으로!》
                《반문화적 반민족적 처사를 걷어치우라》등 계몽책자를 펴냄.

1992. 2. 1. 국민학교 한자교육 반대 건의서를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등 관계기관에 냄.

1992. 3. 21. 한자 섞어 쓰기 주장에 대한 비판대회.

1993. 1. 29. 말글정책에 관한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제출.

1993. 3. 29. 새 대통령 및 새 정부와 국회의원들에게 한글전용에 관한 청원서 제출.

1993. 4. 23. ‘새 나라 건설을 위한 말글정책 강연회’를 엶.

1993. 5. 12.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쓰일 한자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밝힌 성명서
                 국립교육평가원에 제출.

1993. 12. 23. '21세기 위원회'의 <국제화 전략 보고서> 가운데, 말글교육 정책 관련
                   내용에 대해 반박성명서 제출.

1994. 2. 26. "지금이 어느 땐데 한자타령이냐!"라는 주제로 21세기 말글정책 강연회/.

1994. 3. 8. '국제화'라는 미명 아래 한글 전용의 금자탑을 무너뜨리는 정책을
                세우려는 민주자유당에 성명서를 냄.

1994. 5. 25. ‘서울시청 현판에 대한 건의서’서울시장에게 제출.

1994. 5. 27. 국민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을 반대하는 건의서 교육부장관에게 제출.

1996. 1. 1. 국어와 사회과 교과서에서 괄호 안에 한자를 넣기로 한 교육개혁방안에
               대하여 반대하는 성명서.

1996. 6. 10. 광복회와 함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이전·복원하려는 일부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경고하는 성명서.

1996. 12. 10. 국어교육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 각 부처와 국회, 언론사 등에 냄.

1998. 1. 22.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한자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글전용에 관한 성명서.

1998. 2. 9. 계몽책자 《초등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은 절대 안 된다!》를 펴냄.

1998. 10. 27. 한글학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들이 모여
                 '전국 한글전용 실천 추진회'를 결성함.

1999. 2. 10.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 정책 발표에 따른 '전국 한자병용 반대투쟁
                전국 비상대책 위원회' 결성 및 시위.

1999. 2. 13. 전국 한자병용 반대투쟁 전국 비상대책위원회 주관 반대 시위.

1999. 2. 19. 한자병용 반대에 대한 삭발시위(문화관광부 정문 앞, 비대위 원광호
               위원장).

1999. 3. 1.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마산 등 전국에서
              '우리말글문화 독립선언선포식'을 가짐.

1999. 7. 9.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 개최(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

2000. 5. 15. '우리말글의 주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의 영어공용화 반대성명서 제출.

2000. 5. 25. '한글날 국경일 제정' 청원서 정부와 국회에 제출.

2000. 8. 1. 한글전용 법률의 기본원칙을 지킬 것에 대한 질의서 제출.

2000. 11. 30. 국회도서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공청회' 개최.

2001. 2. 5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발족에 참여.

2001. 3. 12. "EBS는 교육방송이 아니라 영어방송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서 제출.

2001. 5. 29. "제주도를 넘겨주려는 망동을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 제출.

2002. 4. 4. <한국일보> <소년한국일보>사와 "한글을 세계로!" 운동
                공동주최 협약 맺음.

2002. 4. 10. 초등학교 한자교육 실시 반대건의서. 한글학회 누리집에 대화방 설치.

2002. 4. 13. 한글학회 누리집에 '영어공용화 문제', '초등학교 한자교육 문제'
                 관련 토론마당 및 투표함 설치.

2002. 4. 19. 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 대책위원회를 발족(위원장-원광호).

2002. 5. 10. 세종대왕 탄생 605돌 기념 강연회(주제-"초등학교 한자교육이 웬 말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우리말글 지킴이 선정.

2003. 3. 20. 정부 추진‘외국인 투자환경 개선 종합대책(안)’에 따른 ‘방송광고심의에 관한 규정 개정안(방송광고규제 최소 화)’에 대한 반대성명서 냄.

2003. 4. 10. 문화관광부 개최 ‘국어 기본법’ 제정 위한 공청회 참여.

2003. 9. 20.‘한글날 국경일 추진 국민대회(위원장: 전택부)’참여 및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결의문’국회 전달.

2003. 9. 25.‘한자교육 진흥법’제정 반대 성명서
               (“우리말 발전 가로막는‘한자교육 진흥법’제정은 절대로 안 된다”) 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외솔회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진위원회, 한글문화연대,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세종대 왕기념사업회, 전국국어교사모임,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한국어정보학회 등).

2004. 1. 14. 경제 5 단체 한자시험 추진 반대성명서 냄.

2004. 4. 5. 서울시의 영어공용화 추진에 대한 반대성명서 냄.

2004. 5. 24. 서울시가 버스 모양새를 로마자로 꾸미는 데 대한 반대 성명서 냄.

2004. 6. 3. 국회의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꾸어 줄 것을 담은 건의서를
               경제정의실천연합(공동대표 김성훈)과 공동 제출.

2004. 7. 19. 한글날 국경일 제정 대책회의.

2004. 9. 22. 영어상용화 정책을 추진하는 서울시에 대하여 감사청구서 제출.

2005. 2. 21. 광화문 한글 현판 지키기 토론회’개최.

2005. 3. 2. 서울특별시 지하철공사 이름을 ‘서울메트로’(SM)로 바꾼다는 데에 대한 반대성명서 냄.

2005. 9. 1. 우리말글 관련 단체들과 함께 “세종대왕의 표준 영정을 바꾸고,
                새 만원권 지폐의 영정도 바꿔라!”는 성명서 냄.

2005. 10. 5. 한샘닷컴(대표: 서영진)과 함께 ‘한글무늬옷 입기 운동’펼침.

2006. 3. 8. 부설 한말글문화협회와 함께 행정자치부 ‘행정언어 운용실태 진단’
               용역사업 시작.

2006. 6. 2. 법제처‘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연구사업 시작. 한글날 국경일 잔치 범국민 조직위원회를 꾸리기 위한 제1차 준비 회의(국립국어원,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운동본부, 문화관광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 한글학회,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한글문화연대).

2006. 6. 16. 한샘닷컴과 함께 ‘한글무늬옷 입기 운동’으로 ‘제8회 한글무늬옷
                 디자인 공모전’ 시상식.

2006. 11. 8. 법제처 용역과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를 위한 법률개정안’
                 최종보고서 제출.

2007. 4. 30. 관련 단체들과 함께 노원구의 ‘영문자 간판 의무시행령’ 철회를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엶.


 

 

4.2. 학생 운동의 부활

1960년대 대학의 ‘국어운동 학생회’동아리들이 전국적인 연합체를 구성하여 기성세대의 한글전용 운동에 힘을 불어넣었고, 1970년대 초기에는 고등학생들도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 연합회를 조직해 기성세대 못지않은 활약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군부 정권에 의해 약해졌다가, 1980년대 중반 전국 18개 대학 동아리들이 힘을 모아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 연합모임을 만들어 다시 새로운 국어운동의 바탕을 만들고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86. 11. 14. 국민학교 한자교육 반대 건의서, 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모임 한말글(초기 회원- 건국대 국어학생회, 건국대(충주) 한글학 생회, 경기대 겨레말연구회, 경북대 한글한마음, 계명대 한글운동학생회, 고려대 우리말사랑모임, 공주사대 우리말사랑모임, 대구 교대 한말글, 부산대 나라말펴기모임, 부산수대 한글한마음, 부산외대 한얼연구회, 상명여대 우리말연구회, 서울대 국어운동학생 회, 연세 대 국어운동학생회, 영남대 한글운동학생회, 우리마당 국어운동연구회, 충남대 우리말메아리).

1987. 3. 10. ‘국민학교 한자교육에 대한 우리의 견해’(상명여자대학교 우리말 연구회).

1987. 3. 16. 성명서‘국민학교 한자교육 이렇게 생각한다’(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

1987. 3. 18. ‘국-한문혼용의 개편을 중단하라-국민학교 교과서 개편에 즈음한 우리의
                 주장’(우리마당 국어운동연구회).

1987. 4. 3. 성명서‘국민학교 한자 교육에 대한 우리의 주장’(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 모임)

1987. 4. 9. ‘우리는 국민학교부터의 한자조기교육을 적극 반대한다’
               (건국대학교 국어학생회 위원장 외 29명).

1987. 4. 15. ‘국민학교 한자 교육에 대한 건의서’(부산 한문교육연구회).

1987. 4. 27.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국민학교 한자 교육 반대한다’
                 (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모임 한말글).

1988. 6. 1. 청원서 ‘국회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모임 한말글)

1988. 6. 3. ‘국민학교 한자교육에 관한 우리의 견해’(부산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모임).

1988. 6. 3. 성명서 ‘국민학교 한자교육은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건국대 국어학생회).



 



5. 마무리

한글운동의 발자취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방대한 활동들을 짧은 시간에 개인의 힘만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게다. 그래서 한글전용 운동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역사적 사실들은 한글학회를 비롯한 몇몇 단체의 자료들을 바탕 삼았다. 이제 한글전용운동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글자살이의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다.

100년 역사를 우리말글과 함께 걸어온 한글학회를 비롯한 수많은 한글 관련 단체들과 국어학자, 한글 동지들의 겨레의식과 우리말글 사랑의 깊은 뜻이 한데 뭉쳐 일궈낸 값진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글 단체들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에도 줄곧 정부와 싸우고, 뜻이 다른 단체들과 싸우면서 우리말글을 지키고 갈닦고 빛내 왔다. 한글은 이제 세계 속에서 더 빛나는 문자로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는 한류바람도 한몫했고, 우리 정보통신(IT) 산업도 한몫한 것이니 이제는 한글을 빛내는 일에 한글 단체만 나서지는 않는 세상이 되었다.

반세기를 넘도록 한글 단체들은, 그 반대 단체들과 한글전용이냐, 한자혼용이냐를 놓고 한자와의 지루한 싸움을 해 왔다. 그러는 가운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어의 홍수도 막아 왔지만 이제 한자가 있던 자리에 영어가 버젓이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영어와의 싸움을 부추긴 것은 정부가 아닌가 싶다. 세계화를 명분삼아 영어 조기교육이니 영어마을이니 하면서 얼토 당토 않은 정책으로 이 나라를 영어 열풍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제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한글 단체들은 또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즈음에 한글 단체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며 그 발자취 속에서 영어와의 싸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것 자체를 반대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배움의 대상이 문제이고 그 사용영역이 문제인 것이다. 영어마을에 국고를 들이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된 한글마을을 조성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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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19. 12:00


 글/김 한빛나리(한글학회 연구원)


1.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한나라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과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켜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잘 닦아지나니라.

그 말과 그 글은 그 나라에 요긴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다스리지 아니하고 묵히면 덧거칠어지어 나라도 점점 내리어 가나니라.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니라. 또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 곧 그 사람들이 무리진 덩이가 천연으로 이 땅덩이 위에 홀로 서는 나라가 됨의 특별한 빛이라.

이 빛을 밝히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밝아지고 이 빛을 어둡게 하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어두워 가나니라.


 



 오늘날 우리가 숱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문화민족으로서 질 높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 중심에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의 억압 하에도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한글창제의 깊은 뜻을 가장 정확히 널리 펼친 분으로,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썼으며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분이었다.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우리말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으며, 한글의 맞춤법, 한자말이나 외래말을 우리의 쉬운 말로 다듬기 등 국어의 개화에 앞장섰던 선봉자였다.
 또한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선생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 세종의 정신을 전해줌으로써 우리 국어학이 보다 넓고 깊게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장본인이다.

 그 정신과 뿌리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정보통신(IT) 강국이 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한글을 지켜내고 갈고 닦는 데 헌신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정신이 탄생시켰던 최초의 한글단체 한글학회의 역사만 해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 우리말글과 함께 걸어온 100년, 한글학회

2.1. 우리말글 연구기관의 탄생

 한글을 다듬고 연구하는 기관이 생긴 것은 세종대왕이 대궐 안에 세운 정음청(언문청)이 처음일 것이다. 정음청은 한글(훈민정음)을 가꾸고 국민생활에 편리함을 주기 위한 여러 일들을 해왔으나, 시대를 거듭하면서 한글은 사용금지 혹은 폐지 등 오랫동안 핍박과 시련을 겪기도 한다.
 갑오경장 이후에야 다시 생기를 되찾아 과거시험을 한글로 치르거나, 공용문서나 각종 경전, 교과서에 한글이 쓰이고, 순한글 신문(독립신문)이 나오면서 우리말 연구와 활동이 조직화되어갔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뜻있는 학자들이 연구모임을 갖게 되고 그 체계를 잡아 한글학회가 태어났으니, 정음청이 국가기관이었다면 민간학술단체로서는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한글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태어난 한글학회는 우리말 연구와 한글운동뿐만 아니라, 나라가 일제의 창칼 아래 짓눌렸을 때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우리말글로 겨레얼을 되살리고자 하는 민족단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 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고,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창립정신은 100년을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다.

2.2. ‘한글날’ 제정

 한글학회는 우리 겨레의 세계적 자랑거리인 훈민정음 반포의 날을 기리기 위하여 왕조실록(113권) 세종 28년 병인 9월 조에 나타난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것을 근거로 ‘가갸날’을 정하고,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 곧 한글이 반포된 지 8회갑(480년)이 되는 날, ‘신민사(新民社)’와의 공동주최로 각계인사 400여 명을 식도원에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가갸날’로 선포하였다.

 그 뒤 날짜 환산방법에 따라 그 날짜가 여러 차례 바뀌다가 1928년에는 그 이름도 ‘한글날’로 바뀌게 되었다. 왕조실록 근거에 의해 9월의 끝날인 음력 29일로 정해졌던 것이 1932년에는 양력 10월 29일로 옮겨지고, 또 음력과 양력의 환산방법을 되짚어 10월 28일로 바뀌었다가, 1940년 7월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의거해 10월 9일로 다시 정해져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2.3. ‘한글 맞춤법’ 제정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기 위한 바탕은 ‘훈민정음’에 규정되어 있다. ‘합자해’에서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 ‘글자’를 이룬다는 원리와 그들의 위치, 차례 등을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글자는 음소글자이지만 그 실제의 쓰임에서는 음절단위 글자로 모아쓴다는 ‘형태주의 맞춤법’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1930년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의 제정을 결의하고 몇 년 동안의 작업 끝에 1933년 한글날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우리 어문규정의 틀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그 뒤 몇 번의 수정과 개정을 거친 뒤 정부가 한글학회의 한글 맞춤법의 틀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맞게 다시 고쳐 1988년 문교부 고시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년의 유예기간을 둔 뒤 198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다.
 



 1908. 8. 31. 국어 연구 학회 창립.

 1909. 11. 7~1910. 6. 30. 제1회 ‘강습소’(중등과) 설립, 운영(강사:주시경, 졸업생 20명).

 1913. 3. 23. ‘한글모’로 개칭(회장:주시경).

 1926. 11. 4(음력 9. 29).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돌)에 ‘가갸날’이라 이름하고 그
                첫 기념식.

 1927. 2. 8. 동인지 월간《한글》 창간호 펴냄(4× 6판, 세로짜기). 제2호부터는 4×6배판

 1931. 1. 10. 학회 이름 ‘조선어학회’로 개칭.

 1933. 10. 29(한글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책으로 펴냄.

 1936. 10. 28(한글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펴냄.

 1940. 6. 25.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

 1942. 10. 1. 이른바 ‘조선어학회 수난’이 일어남.

 1947. 10. 9. 《조선말 큰사전》 제1권 펴냄.

 1948. 9. 2.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의 강의 시작.

 1949. 3. 24. ‘재단법인 한글집’의 설립 허가.

 1949. 9. 25. 학회 이름 '한글학회'로 개칭.

 1957. 10. 9. 《큰사전》 제6권 펴냄. 이로써 큰사전 완성.

 1958. 6. 15. 《중사전》 펴냄.

 1960. 4. 30. 《소사전》 펴냄.

 1960. 5. 1. 《중사전》 수정작업 시작.

 1962. 11. 1.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

 1966. 2. 28. 《한국 지명 총람》 서울편 펴냄.

 1967. 1. 30. 한글 전용 위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72. 9. 5. 월간《한글 새소식》 창간호 펴냄.

 1974. 7. 22. 학회 병설로 한글문화협회 결성.

 1975. 2. 22. 한글문화협회 아래 전국 국어 운동 고등학생 연합회를 둠.

 1977. 10. 8. 한글회관 낙성식.

 1979. 9. 8. 한글 글자꼴 연구 모임 가짐.

 1982. 12. 3. ‘한글 풀어쓰기 연구 모임’발족.

 1984. 2. 21.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

 1984. 9. 10.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 펴냄.

 1985. 25~27. 제1회 우리말글 연수회.

 1986. 12~22. ‘한힌샘(주시경) 연구 모임’발족.

 1987. 12. 3. 《문학 한글》 창간호 펴냄.

 1987. 12. 22. 《주시경 선생에 대한 연구 논문 모음 1》 펴냄.

 1988. 5. 15. 《한힌샘 연구》 창간호 펴냄.

 1988. 12. 20. 《교육 한글》 창간호 펴냄.

 1991. 10. 9~15. 한글도안 상품 큰잔치.

 1991. 12. 3.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펴냄.

 1991. 12. 22. <우리말 큰사전》 펴냄.

 1993. 10. 9. 한힌샘 주시경 선생 흉상 세움.

 1994. 10. 9. '한글학회 한글정보'(컴퓨터 통신 서비스) 개설.

 1996. 2. 1. 전자국어사전 <한글 우리말 큰사전> CD-ROM 제작.

 1996. 10. 9. 한글학회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http://www.hangeul.or.kr)

 1996. 12. 16. '국어학 자료 은행' 완성(논문 20,375편).

 1997. 7. 7~19. 제1회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

 1998. 12. 30. 국가 지원(문화관광부) <한국 땅이름 전자사전>(CD-ROM) 제작.

 1999. 7. 9.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 개최(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

 1999. 12. 15. 《깁고 더한 쉬운말 사전》펴냄.

 2000. 5. 13. 첫 '우리말글 지킴이'(아나운서 황현정) 위촉 후 덕수궁에서 광화문까지
                  거리홍보.

 2001. 5. 26. 첫 ‘아름다운 우리말 상호’(섬마을밀밭집, 종로구) 선정, 그 보람
                 (상징현판)을 걸어 줌.

 2001. 6. 2. 제1회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주식회사 이슨과 공동주최.

 2001. 12. 15. <우리 토박이말 사전> 펴냄.

 2002. 2. 22~3. 5. 유럽 지역 한국어학교 순회강연회.

 2002. 4. 4. <한국일보> <소년한국일보>사와 함께 "한글을 세계로!" 운동 시작.

 2004. 6. 3. 국회의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꿀 것을 담은 건의서(“국회 보람(배지)을
한글로 바꾸어 주십시오!”)를 경제정의실천연합(공동대표 김성훈)과 공동으로 제출.

 2004. 9. 4. 온겨레 한말글 이름 큰잔치의 하나로 제1회 전국 한글 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 개최.

 2005. 4. 2. 학회 부설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위원회(KLPT)’,‘한국어 능력 시험’주관 
                기관으로 선정.

 2005. 6. 2. 국립국어원의 후원으로 “국어상담소 운영을 위한 공개 토론회”개최.

 2005. 12. 17. 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가 ‘한말글 문화협회 다시 일으키는 잔치’를 엶.

 2006. 8. 30. 얼말글 교육관 개관.

 2006. 10. 9. 국경일로의 승격 후 첫(560돌) 한글날 기념행사.

 2006. 11. 8. 법제처 용역과제인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를 위한 법률 개정안’ 수행,
                  최종 보고서 제출.

 2007. 4.30. 한글문화연대 비롯 관련 단체들과 ‘노원구의 영문자 간판 의무시행령’ 
                 철회 요청 기자회견.



 


 ‘한글 맞춤법’뿐 아니라 ‘표준말’을 사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 표기법’ 등 어문생활에 필요한 규범들도 한글학회가 정리하였다.

2.4. 조선어학회의 수난

 일제가 국학 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투옥한 사건으로,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과 한글을 통해 민족 얼을 드높이고자 했던 한글학회 회원들이 1929년에‘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만들어 <큰사전> 편찬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제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조작했던 사건이었다.
 1942년 8월 함흥 영생여고 학생을 붙잡아 취조하던 중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일을 맡고 있는 석인 정태진 선생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증인으로 내세워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검거,‘치안 유지법’이라는 내란죄로 기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끝내 함흥 형무소에 있었던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징역과 집행유예를 받은 이도 있었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모두 풀려났고 그 뒤 조직을 가다듬어 1949년에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가 꾸민 기소사유와 판결


본 건 조선어 학회는 대정(大正) 8년(1919년) 만세 소요 사건(萬歲騷擾事件)의 실례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 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 양상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꽃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에 그쳐서,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 6년(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 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 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 이념을 삼아 가지고, 겉으로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 배양 단체로서 본 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 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종 일관 진지하고 변하지 않은 그 활동은 조선 어문에 쏠리는 조선 인심의 기미(機微)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조선 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 관념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 향상, 민족 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伸張)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 한글 학회 50년사에서 따옴

 


2.5. 세계로, 미래로!

 한글학회는 100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어문정책과 국어학 연구, 사전편찬, 도서출판, 교육, 계몽 등 다양한 한글운동을 해 왔다. 국제활동에도 눈을 돌려 1971년부터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세계 언어학자들과 함께 한국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꾀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한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2000년부터는 세계 한국말 인증시험 위원회를 만들어 외국에서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인증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국외에서도 우리말이 바르게 보급되고 한국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원들을 초청하여 한국어를 바르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연수도 진행, 지금까지 70여 나라 500여 명이 한글학회의 국외 한국어 교원 연수를 마친 바 있다. 이들 역시 한글학회의 든든한 가족으로서 한국어의 교육 및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3. 한글만 쓰기를 위한 움직임과 그 열매

 한자를 버리지 못한 만큼 사회 전반의 발전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글자살이는 한자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는 버렸어야 했지만 이 나라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과거에 얽매어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글만 쓰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자교육을 강화하려는 등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글의 창제는 비로소 우리말이 제 치수에 맞는 옷을 입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과학적인 음운조직을 가진 한글은 우리말에 잘 맞는 글자인 까닭에 배우기도 쉽고 우리 민중이 나라의 정책을 쉽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은 물론,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 주시경 선생 같은 분들이 한자의 사용이 우리 문화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일찍이 깨닫고 <독립신문>(1896) 창간을 한글전용으로 했던 것이 우리 국민에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고취시켰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독립도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부터 우리 신문이 모두 한글 전용으로 발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생명과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빨리 더 많은 발전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몇 십 년 동안을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가 못내 아쉽다. 다행히 지금은 신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출판물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전용으로 인쇄되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한자와의 싸움을 벌였는가? 아직도 그 잔뿌리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동안 한자혼용론자들의 주장에 맞서온 노력들을 살펴볼만하다.

3.1. 한글 전용 법률

 1948년에 최초로 공포된 대한민국헌법은 원래 한글로 적혔다고 한다. 이에 한글학회는 국회에 고마움의 뜻과 아울러 일반 공용문서를 한글로 쓰도록 하는 법률을 정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서와 한글전용 발표식을 한글날에 하도록 하는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내고 담화도 발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그 해 10월 1일 제78차 국회에서 한글전용법이 통과된 것이다.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



새 나라의 건설 대업이 바야흐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중대한 이 시기에 임하여, 우리의 할 일은 실로 백 가지나 천 가지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오, 또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곧 태산교악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자주 정신’을 앞세우고 나가는 일이다.

과거 약 천여 년 동안, 우리는 남의 문화의 종노릇을 하고, 남의 정신에 사로잡히어, 제 역사가 혁혁하건만 이를 덮어 두었고, 제 문화가 찬란하건만 이를 묻어 버렸었다. 이것이 인습이 되고 고질이 되어, 남의 버릇을 흉내 내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오히려 자랑으로 알게까지 됨에 이르러 버린다면, 실로
보람 있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만대의 자손에게 노예의 굴레를 전하여 주는
민족적 반역 대죄를 면할 길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과연 그렇게 마비되었을까? 아니다. 먼지에 쌓인 거울이오, 구름에 덮인 태양이다. 닦으면 반드시 밝아질 것이오, 구름을 헤치면 다시 명랑해질 것이다. 과연이다. 참으로 과연이다. 이번 국회에서 공포한 새 헌법의 원본을 한글로 기록한 것은 곧 우리 문화가 어엿함을 확인함이오, 우리 정신이 새로와짐을 증명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자주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한글헌법의 공포는 자주정신의 부흥을 뜻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문화와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과 공로는 오로지 이백의 국회의원의 민족적 자주정신에 말미암은 것이매,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다른 모든 국사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의정할 것을 믿고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광명한 앞날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며, 마음에 든든함을 가득히 느끼는 바이다.

앞으로, 일반 법문을 전부 한글로 제정하고, 모든 공용문서와 성명.지명도 단연 우리 글자로 사용하도록 시급히 법적으로 정할 것을 믿고 바라며, 특히 이 정신의 실현이 촉진, 완수되게 하기 위하여, 앞으로 문교행정을 담당할 부문에는 더욱 이 한글헌법 공포의 정신을 여실히 또 원만히 살리어 나가기에 확호한 신념과 역량이 구비한
인사가 전적으로 배치되어야 할 것을 또한 믿고 바란다.

이에, 우리 학회는 감히 과거 삼십 년 동안 오직 한 마음, 우리글과 우리말을 부둥켜안고 지키기에 온전히 바치어 온 붉은 피와 뜨거운 정성을 가지고, 이제 삼천만 형제자매로 더불어, 우리 민족 문화의 급속한 향상과 국가 만년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이 자주 정신의 실천궁행에 굳은 결의로써 일치 매진하도록 전력할 것을 선명하는 동시에, 또 감히 책임 당국에 대하여 이 거족적 행진 전도에 조금도 장애가 없도록,
길 인도를 잘 하여 주시기를 거듭 부탁하는 바이다.

1948년  7월  24일
조선어 학회



                      

 

 

3.2. 한글전용 촉진회 조직

 우리 겨레의 자주문화를 세워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글전용법이 1948년 10월 9일 한글날에 발표되었으나, 이의 실천을 위해 앞장서서 이끌어갈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9년 6월 12일에 ‘한글전용 촉진회’를 조직하였다.

 한글전용 촉진회는 본부를 한글학회 안에 두고, 각 도시에 지부를 두어, 한글만 쓰기의 실행을 대대적으로 철저히 촉진시켰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전주, 대구, 목포, 광주, 청주, 광주(경기), 김포,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국어교육 강습회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3.3. ‘한글전용 국민실천회’의 활동


 1968년 10월 2일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2개년으로 단축시키기고 이를 강력히 시행할 것을 선언(1968. 10. 7. 대통령)한 뒤 10월 25일에는 ‘한글전용 촉진 7개항’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문교부 안에 ‘한글전용 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의 한글전용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이 나오자, 한글 동지들은 국민들도 정부와 뜻을 같이하여 한글전용의 국민운동단체를 창립하기로 하고, 최현배 선생을 발기인으로 한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68년 12월 21일 한글 관련 26개 단체들도 발기단체로 참여함으로써 한글전용 촉진회까지 통합되고 지방에 지부까지 둔 전국규모의 범국민 운동단체로 태어나게 된다. 이 단체에서 하고자 했던 뜻과 활동이 오늘날 한글만 쓰기를 여는 중요한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글전용 국민실천회 3년의 활동 

1. 관공서 및 각 단체에서 직장 무료 강습 17회

2.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및 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입안 건의

3. 쓰기의 건의 35번

4. 바른 국어 생활과 바른 맞춤법 출장 무료 질의응답 157번

5. 편집 및 교정 무료 봉사 61건

6. 건설용어, 농업, 상업용어의 왜말 조사 6번

7. 간판 업소 심방 무료 지도 138번

8. 음식점 차림표 바로잡아주기 69번

9. 우리말로 이름 지어 주기(무료), 업소 15곳, 사람 153명

10. 라디오 교양방송 및 주선 35번

11. 잡지 투고 게재 교섭 247번

12. 국어 관계 편지로 궁금 풀이 93번

13. 대학 국어운동 학생회의 활동 지원

14. 쉬운 말과 바른 말 자료 채집 43,000 낱말

15. 각 부처에 한글전용을 위한 쉬운 말 용어 제정 촉구 6번

16. 한글 타자 전국 선수권 대회 개최 (1969. 10. 9.)

17. 정부와 정당에 한글전용 관계 자료조사 제공 8건

18. 공화당 국회의원 총회 강연회 및 그 밖의 계몽 강연회 21번

19. 한글명함 무료로 선사하기 13,600장(136명에 100장씩)

20. 한글문패 달아주기 63,375장

21. 한글전용 정책 자료조사 발간 (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1집 1,000부 관계기관에 무료 제공)

22. 쉬운 말 쓰기와 각 부처의 용어 제정물 등에서의 채집(‘국어국자 조사연구 총서 제2집’ 원고 자료 1,530여 건)

23. 각종 정기간행물에서 한글만 쓰기 관계자료 채집 카드 작성(2,000여 카드)

                     



 


 

한글 관련 단체의 역사 1 <끝>-2편 계속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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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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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고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에 편토록 하고자 할 따름인 것이다.




ㄱ는 어금닛소리니 ‘군(君)’자의 처음 나는 소리(‘군’자의 음을 발음할 때의 첫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
() ’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ㅋ는 어금닛소리니 ‘ 쾡(快)’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ㅇ는 어금닛소리니 ‘업(業)’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ㄷ는 혓소리니 ‘ (斗)’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 땀(覃)’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ㅌ는 혓소리니 ‘ ()’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ㄴ는 혓소리니 ‘ 낭(郎)’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ㅂ는 입술소리니 ‘ 볋()’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뽕(步)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ㅍ는 입술소리니 ‘ (漂)’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ㅁ는 입술소리니 ‘밍(彌)’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ㅈ는 잇소리니 ‘즉(卽)’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 (慈)’ 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ㅊ는 잇소리니 ‘침(侵)’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출처:newsis>

ㅅ는 잇소리니 ‘슗(戌)’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썅()’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는 목구멍소리니 ‘ ()’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ㅎ는 목구멍소리니 ‘헝(虛)’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으니 나란히 쓰면 ‘(洪)’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ㅇ는 목구멍소리니 ‘욕(欲)’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ㄹ는 반혓소리니 ‘령(閭)’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Δ는 반잇소리니 ‘ (穰)’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는 ‘ (呑)’자의 가운데 소리 (‘ ’자의 음을 발음할 때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ㅡ는 ‘ 즉(卽)’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ㅣ는 ‘ 침(侵)’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洪)’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땀(覃)’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군(君)’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업(業)’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욕(欲)’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양(穰)'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슗(戌)’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는 ‘ 볋()’자의 가운데 소리와 같다. 
종성 표기에는 다시 초성 글자를 쓰라. ㅇ을 입술소리 아래 이어 쓰면 입술 가벼운 소리가 된다.  

초성 글자를 아울러 쓰려면 나란히 써야 하니 종성도 같다.
는 첫소리 글자의 아래에 붙어 쓰고  는 첫소리 글자의 오른쪽에 붙여 쓰라.
무릇 글자란 반드시 아울러 써야만 하나의 소리(음절)를 이룬다(음절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 단위가 된다). (음절 단위로 표기된 글자의) 왼쪽에 한점을 더하면 거성이요, 점이 둘이면 상성이요, 없으면 평성이요, 입성은 점을 더하기는 같으나 촉급하다.

  


*** 이 글은 성균관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강신항 교수의 주요 저서인「훈민정음 연구」수정증보판에서 훈민정음 본문(예의편) 부분을 저자의 재가를 얻어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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