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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에 해당되는 글 36건
2009. 3. 9. 09:28

한글날(10.09)은 아는데...
세종날은 모르고, 5월 15일하면 스승의 날만 생각나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세종날
은 세종대왕 탄신일인데요,
양력 5월 15일 (음력 4월 10일)을 '세종날'로 정하고
1977년부터는 ‘세종대왕 유적관리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정부(문화공보부, 현재는 문화재청)가 주최하여 영릉
참배식 대신에 ‘세종대왕 탄신 숭모제전’을 거행하고 있어요

더 재미있는건 스승의 날은 세종날의 뜻을 이어받아 만든거라는 사실, 알고 계세요?
처음 스승의 날은 5월 26일이였으나,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상 최대의 위인이며 최고의 은인이기에 임금이 나신
날을 스승의 날로 하자는 의견에 따라 1964년 후부터는 5월 15일로 지정되었답니다.

이번에 다가오는 612돌 세종날을 기리어, 세종대왕의 슬기와 뜻을 받들고자
전국 국어학 학술 대회가 마련됩니다.

10월에 여는 '한글날 기념 전국 국어학 학술대회'와 더불어, 한글학회에서
해마다 두 차례 마련하는 전국 규모의 국어학 학술대회인데요.

학술 회에 참가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먼저 신청을 해주셔야 되요.
발표신청서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아래 참고하셔서 많이 많이 참여해주세요   

*여는 때 : 2009년 5월 16일(토) 10 :00 ~ 18 :00

*여는 곳 : 한글 학회 얼말글교육관

*참가 자격 : 제한없음

*발표 주제 : [지정주제] 북한의 언어 연구
                   [자유쥬제] 국어학, 일반 언어학, 자료 발굴 및 소개 등

*신청 방법 : 덧붙인 발표 신청서를 작성하시어, 누리 편지로 보내 주십시오.
                   발표 신청서에는 A4 용지 한 쪽 분량의 연구 요지를 첨부
                  (보내실 곳 : urihim@paran.com)

*신청 마감 : 2009년 3월 10일(화)

*발표자 선정 : 발표를 신청하신 분 가운데 학회의 심의를 거쳐
                       2009년 3월 16일 개별적으로 공지

*발표문 제출 : 발표자로 선정되신 분은 30분 분량의 발표문 (A4, 10쪽 안팎)을
 
                     4월 15일까지 보내 주셔야 합니다.

*실무 담당자 : 성기지(02-738-2237, urihim@paran.com)

신청하신 후 실무 담당자에게 접수가 잘 되었는지 꼭 확인하시는 센스 아시죠??
상당수가 세종날을 모르는 만큼, 이번 기회로 세종날을 알려보자구요
아자아자 화이팅!!!!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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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6. 13:2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날 어떤 언어생활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글이 없었을 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문자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고유문자가 없는 언어들이 어떤 문자를 채택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순수하게 한문을 사용했거나 한문에 한자로 토를 달았거나 향가에서 보는 것처럼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었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역시 조상들의 방법으로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문자가 없는 다른 언어의 경우처럼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등은 자신들의 언어를 적을 때에 로마자를 쓴다. 베트남어의 경우는 성조가 복잡하여 로마자에다 점과 기호 등을 부가해서 표기하는데, 로마자를 쓴다는 점에서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등과 다를 바 없다.

 그밖에 터키어, 스와힐리어, 소말리아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로마자를 문자로 사용한다. 우리도 이들처럼 문자 생활을 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어요’라고 적는 대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을 것이다.


 naneun jigeum pyeonjireul sseugo isseoyo.

 중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문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저명한 문인인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면서 한자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한자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대신 간화자로 크게 바뀌었으며 한어병음이라 하여 로마자가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편리한 언어생활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편리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문화적 자부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문자 일반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는 여러 문자가 있지만 언어의 수만큼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살아 있는 언어는 5천 내지 6천 개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들 중에는 문자가 없는 언어도 꽤 있으며 문자가 있는 언어들 중에도 실제 사용되는 문자는 백 개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의 공용어로 쓰이는 언어를 적는 문자는 30개 정도에 불과하다. 언어에도 사멸한 것이 있듯이 문자도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문자들 가운데 특정 시기에 특정인이 ‘만든’ 문자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들은 대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 차츰 진화해 왔거나, 다른 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창제’라는 말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다른 문자들 중에도 일부 만든 이가 뚜렷이 기록되고 인정된 경우가 있기는 하다. 410년에 아르메니아어 문자를 만든 아르메니아의 메스로브(Mesrob), 1283년에 태국문자를 만든 태국의 람캄행 대왕 등이 그들이다(타이문자는 캄보디아문자를 변형시켜 만들었다).

 이런 극히 일부의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자는 어떤 특정 시기에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서서히 조금씩 변형되며 형성되었다. 그래서 창제자를 말할 수 없다. 한글은 이에 반해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의 하나인 세종실록은 한글이 1443년에 만들어졌고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친히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지은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부터 왕자와 공주를 시켜 만들었다는 주장, 혹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을 리가 없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시켜서 만들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한글을 누가 만들었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은 세종실록 권102 세종 25년 계해 12월조 말미의 다음 구절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기록이 이러함에도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종대왕이 직접 단독으로 한글을 만들지 않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을 거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사에 바쁜 임금이 홀로 새로운 문자 체계를 고안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추정은 어디까지 추정일 뿐 기록상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상의 근거를 놓고 보면 실록에 ‘친제(親制)’가 명기되어 있는 만큼 직접 창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친제했다고 보더라도 이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몇 년만에 완성된 것인지,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 누구와 상의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된 지 3년만인 1446년에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간행되었다. 훈민정음해례는 새 문자에 대한 이론적 해설서이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문자 창제와 동시에 그 문자에 대해 해설한 책이 쓰인 경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집현전 학사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서 저술한 것이다(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고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배제했다가 해설서의 집필만 맡겼으리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기보다는 집현전의 학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부려서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 홀로 한글을 만들었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든 세종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새로운 문자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지만, 세종은 최만리를 크게 꾸짖으면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최만리는 세종 26년인 1444년 2월 상소문을 올려 새 문자를 만드는 데 반대했다.).

 그럼, 세종대왕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을까? 이는 ‘훈민정음해례’의 어제서문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서 어리석은 백성들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 생각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든다고 했다.

 과연 한문으로 우리말을 적기란 대단히 불편해서 양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이 문자생활을 하지 못하는 문맹상태인 것을 안타깝게 여겨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애민정신은 이미 ‘삼강행실도’를 만든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함으로써 풍속을 교화하려 한 것이다. 세종 13년인 1431년 한문본으로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후일 성종 12년인 1481년에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훈민정음해례’가 간행되고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이 바로 간행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석보상절>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돌아가신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님의 일대기를 서술한 것이다.

또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필요성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국 한자음을 통일할 필요성과 아울러 우리 한자음의 통일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데 한자음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소리글자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리글자로써 한자 하나하나에 대한 발음 표시를 해 두어야만 한자음이 통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 <동국정운>을 저술케 했고 중국 한자음의 통일을 위해서는 <홍무정운역훈>을 저술케 했다.

 세종대왕은 당시 언어생활에 필수불가결했던 한자의 발음 통일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한자음은 매우 안정된 상태로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아무튼 세종대왕은 언어의 통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어떻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그가 기대하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에서는 편지를 한글로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고 16세기 이르러서는 한글소설이 저술되고 유통, 보급되기 시작했다. 관공서의 공식문서는 여전히 한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편지나 소설류 등에서 한글이 사용됨으로써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문학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해류가 만들어져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 내용을 접해보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15세기에 한글로써 간행된 문헌만 해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두시언해’ ‘악학궤범’과 같은 시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원각경언해>와 같은 불교 관련 문헌, <내훈>, <삼강행실도> 은 교화 용 문헌, <구급방언해>와 같은 의약 관련 문헌, <금양잡록> 등의 농사 관련 문헌,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어학 관련 문헌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글의 창제에 대한 이설에 대해 살펴보자. 한글이 고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가림토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하는 <한단고기(또는 환단고기)>의 기술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한단고기> 자체가 매우 의구스러운 문헌인데다 정말 고조선시대에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면 왜 그 이후에 사용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에서 쓰였던 ‘신대문자’를 본떠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신대문자’가 한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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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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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란?
한글날은 세종대왕께서 우리 글자인 한글(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한 날을 일제시대인 1926년에
기념일로 정해 기리다가 지난해부터 국경일로 정해 경축하는 날이다.




 한글날의 시작은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6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480돌인 날에 조선어연구회와 신민회의 공동주최로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 400여 명이 모여 ‘ 가갸날 ’ 을 선포하고 처음 기념식을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두 해 뒤인 1928년에 기념일 이름을 ‘ 한글날 ’ 로 바꾸기로 한다.  날짜도 훈민정음 반포일이 조선왕조실록에 음력 9월로 기록되어 있다 하여 음력 9월 마지막 날인 29일로 옮겼다가 1934부터는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날인 양력 10월 28일로 바꾸어 1937년까지 기념식을 착실하게 시행했다.

 그런데 일제가 일본말만 쓰라며 우리말은 못쓰게 탄압해 한글날 기념식을 못하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날짜를 10월 9일로 바꾸어 다시 시행한다.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반포일이 음력 9월 상한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인 10월 9일로 바꾼 것이다. 다음 해인 1946년 미군정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마침 한글 반포 500주년이 되던 해여서 덕수궁에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제대로 세워진 후에도 한글날은 계속 공휴일로 이어졌으며 한글학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한글 단체들이 주관하는 한글날 행사가 매년 있어왔다.


왜 한글날을 만들었나?

 1446년 세종대왕이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그 뒤 500여 년 동안은 널리 쓰이지 못한다. 한문에 길든 학자와 관리들이 큰 나라인 중국 눈치를 보면서 우리 글자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부터 한글을 많이 쓰게 되는데, 대한제국 때 고종이 공문서에도 국문을 쓴다는 칙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나라 글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 주시경과 여러 선각자가 한글을 살려 써서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0년에 일제 식민지시대를 맞게 된다.

 식민지 시대에도 한글이 훌륭하고 중요함을 깨달은 주시경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를 세워 겨레말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던 중 1926년에 이르러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들이 '겨레의 보물인 한글을 갈고 닦아 우리말을 살리고 겨레의 얼을 지키는 일을 더욱 잘 하자'는 취지로 훈민정음 반포일을 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한글날 그 다짐과 정신을 되새겨 오다가 1933년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그 때문에 1942에는 한글학자와 민족지도자들이 함흥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한글날은 이렇게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겨레가 사라질 위기에 있을 때 세계 으뜸가는 글자인 우리 한글로 우리말을 지키고 빛내어 겨레를 지키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으로 만든 날이다.   


한글날이 겨레와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

 어두웠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글은 우리 겨레의 희망이었고 한글날은 독립을 준비하는 기념일이었다. 한글날이 있었기에 한글이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겨레의 말과 얼을 지키며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선각자들이 한글날을 만들고 목숨까지 바치며 한글을 지켜 나갔기에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 말글로 된 교과서도 만들고 공문서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한글날은 나라를 잃은 시기엔 독립을 다짐하고 준비하게 한 '건국 공로일'이며, 광복 후엔 국민을 자주민주시민으로 키워내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는 데 이바지 한 민족 최대의 기념일이다. 대한민국 시대의 한글날은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을 생각하고 그 바탕에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 날이다.
 한글이 우리나라를 문맹 없는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면 한글날은 한글을 지킬 뿐만 아니라 빛내 주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지게 된 이야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글날은 광복 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어 매년 한글 단체들이 공식적으로 행사를 주관해 왔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엔 서울시가, 그 다음 해엔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관광부)가 주관하기 시작하면서 마지못해 하는 행사처럼 치러진다. 그리고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가 마침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리면서 3등 기념일로 전락하게 된다.

 경제단체들이 연합해 ‘공휴일이 많아서 나라 경제가 어렵다’며 투덜대자 정부가 이를 위해 세운 대책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글 사랑 정신이 식고 겨레의 말과 얼이 흔들리니 나라까지 흔들리고 기울게 되어 국제 투기 자본의 먹이가 되는 경제 식민지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과 노동자의 저항을 줄이고 환심을 사려고 공휴일을 많이 늘렸었다는 사실이다.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만 쉬던 것을 음력 설까지 쉬게 하더니 이를 3일로 늘리고, 한가위도 이틀만 쉬던 것을 3일로 늘려 놓았다. 게다가 성탄절만 쉰다고 불교인들이 불만을 표하니 석가탄신일도 공휴일로 지정한다. 그러니 전경련, 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로서는 휴일이 너무 많아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불만스러워할만도 했을 것이지만, 그 폐해를 완화시키기 위해 한글날을 희생시킨 것은 한글단체와 민족지도자들을 봉기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로부터 한글단체는 15년에 걸쳐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게 되었고 2005년 마침내 국회에서 국경일 지정 법안이 통과되어 국경일이라는 위치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는 그릇이다. 말이 흔들리고 지저분해지면 그 나라까지 흔들리고 지저분해진다. 한글날을 짓밟으니 우리 말글살이가 혼란스럽게 되고 민족자주정신이 흔들리면서 국운도 시들었던 것이다. 한글단체들의 ‘한글날 국경일 승격 운동’은 이러한 전제와 대의에서 시작되었다.

 정부가 끝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키자 1991년 2월 전국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라고 외치며 서울 명동까지 거리행진을 한다. 그리고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1991년 10월 1일에 국회의장에게 ‘한글날 국경일 제정 청원서’를 내는 것을 필두로 한글단체들은 정부와 국회에 건의와 청원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애타는 호소도 못 들은 듯 오히려 한글날 기념식도 무성의하게 해치우곤 한다. 또한 김대중 정부에 와서는 그때까지 기본적으로 한글 전용 정책이던 것을 일본처럼 한자를 혼용하는 정책으로 바꾸려 하더니 결국 한자 병용 정책을 강행한다. 이에 한글단체가 분노해 거세게 반대 시위를 하고 나오니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겠노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한글 단체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를 여는 등(1999년 7월 9일) 대정부 촉구를 보다 본격적으로 하니, 마침내 신기남 의원 외 34명이 ‘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법률안 ’ 을 입법안으로 발의한다 (2000년 10월 2일). 그리고 그 해 11월 15일자로 여야 의원들이 ‘한글날 국경일 추진을 위한 의원모임’을 발족하고 30일에 국회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공청회’를 연다.

    그러나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게 한 경제단체가 또 반대하니 행정자치
   부가 그들 편을 들어 법안을 제대로 심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에 한글
   단체와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전택부)를 만들어 국회와 정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촉구 결의
   대회나 1인 시위를 하는 등 더욱 활발한 운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2005년 12월 5일 국경일 지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
   하게 된 것이다.
 







국경일 제정의 의의

   한글학회와 외솔회,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등 한글단체뿐 아니라
  전교조, 국어교사모임, 참교육학부모회 등의 교육단체와 국회의원,
  시민단체까지 힘을 모아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난
  15년에 걸친 세월 동안 이 많은 단체들이 하나가 되어 한글날을 국경
  일로 만들고자 했었던 참뜻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정부와 정치인, 경제단체와 일부 학자들까지 한글과 한글날을
  우습게 여기는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한글날을 온 국민과 함께 뜻깊게 보내는 데 앞장서야 할 지배층들이
  한글날을 3등 기념일로 내리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는 얼빠진 정신과 풍조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둘째, 우리 한글 문화, 자주 문화를 꽃피우자는 것이었다.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가 인정하는 세계 으뜸 글자다. 그럼에도 헌신짝 보듯 해온
  역사를 반성하고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사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는 하나 내놓을만한 우리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문으로 씌여졌던 고전들은 중국 문학과 문화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고, 일제시대 때 길든 일본식 한자 혼용이 우리 말글살이인 줄 알고 한글을 살려 쓰는 것을 가로막는 한국인도 많았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말과 우리 글자인 한글로서 우리 문화를 부흥시키는 계기를 삼고자 했다.

 셋째, 과학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한글을 더욱 갈고 닦아서 과학 강국, 철학 강국이 되자는 것이었다. 정보통신 학자들이 ‘세종대왕은 셈틀(컴퓨터)을 이용한 정보통신시대를 내다보고 600년 전에 한글을 만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한글과 셈틀은 찰떡궁합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글은 우리 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되는 데 크게 이바지해왔다. 그 공을 살려 문화 경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은 국경일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한글날을 마음껏 즐기고 기리자

 우리에겐 삼일절, 개천절, 제헌절, 광복절 등의 4개 국경일이 있지만, 지금까지 중앙 정부 차원에서 매년 기념식이나 치르는 것 외에 국경일의 참뜻을 살리는 국민 참여행사를 마련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보니 국경일이란 그저 등산이나 가고 집에서 노는 날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 같다. 국경일은 경사스러웠던 날을 온 국민이 함께 기념하며 경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글날이 정부와 국민이 모두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국경일이 되고 세계인이 주목하는 문화의 잔칫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스스로 500여 년동안 천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한글이 제 빛을 발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를 바란다.

 한글 창제 정신과 만든 원리는 민주정치와 과학시대에 딱 어울린다. 한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보물이고 긍지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잘 계승하고 그 글자를 가진 겨레라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학문, 예술, 정치, 문화의 선진국을 만들자.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먼저 마음껏 자랑하고 즐겁게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한주헌 | 2010.09.30 22:1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그런데 본문 처음부분에 조선어 학회라고 쓰셨는데요. 제가 알기론 조선어 학회는 1932년도에 창립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1926년도에는 조선어 연구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드네요. 사실확인 부탁드립니다.
BlogIcon 온한글 | 2010.10.05 09:11 신고 | PERMALINK | EDIT/DEL
한주헌님 안녕하세요.
지적 감사합니다. 님이 말씀하신 대로,
1926년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맞네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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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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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글 창제 반대의 이유

 세종 25년 1443년 12월 한글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기뻐서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은 실제로 거의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술원 부원장에 해당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선두로 그 학사 일당 7명이 한글 창제 후 두 달째인 세종 26년 1444년 2월 대왕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문을 직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장하기를, 만약 쉬운 한글이 시행되면 어려운 한문은 학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문 제 3항을 보면 ‘쉬운 한글만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하게 된다면 왜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구하겠나이까?’ 하는 반론이 그 핵심이었다.1)

 그들은 또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선진국 중국과 같은 수준인데, 그 학문을 버린다면 스스로 야만인이 돼 문명의 큰 누가 아니겠느냐?’며 반론을 펴기도 했다.2) 그렇다면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눈에 나라를 쇠망으로 이끌려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리학은 춘추시대의 학자 공자(孔子, 552~479 B.C.)의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을 말하는 것으로 유학 중에서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우리 조선시대로서는 이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추구했던 유일의 선진 학문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그 절대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한문을 어렵다고 익히지 않는다면 후진국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굳이 강행하는 한글 창제를 보고 당시 식자층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더욱이 당대의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는 최만리로서는 그 선봉에 있는 것이 충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그들을 썩은 선비라고 비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世宗과 같은 가장 偉大한 明君이 出現한 한편에는, 이 崔萬理 따위와 같은 固陋하고 腐敗한 低能兒도 出現되었던 것입니다. 『慕華丸』에 中毒된 『假明人』의 醜態요 發狂이라고 보아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마는, 歷史上에 永久히 씻어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지』3)를 끼치어놓게 됨은, 그를 爲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읍니다. 그러하나 그와 같은 病症은 이제도 오히려 遺傳됨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金允經, 「朝鮮文字와 文字史」,1938, 86면)

이는 事大慕華의 精神에 위반하여…頑强히 이를 반대한 몇몇 漢化主義에 中毒된 臣下들이 있었으니, 그는 곧 副提學 崔萬理를 先鋒으로 하여,…따위이었다. 世宗大王은 이 事理를 모르는 愚頑한 反對를 抑制하기 爲하여, 이 反對者들을 모두 義禁府에 내리사…. (최현배, 「한글의 바른 길」, 1937, 4면)


 반대로 어려운 한문을 배우지 않고도 선진 학문의 추구가 쉬운 한글만으로 족하다고 했다면, 아첨을 일삼는 썩은 문신이었을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 선진 외국들의 언어를 어려워도 기피하지 않고 반드시 힘써 배워야 하는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2. 한글의 위상에 대한 오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대왕은 이 반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던가?
 첫째, 세종은 본인 역시 같은 지식층으로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과 같은 생각에 대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한글 창제에 대한 오해를 염려하고 처음부터 비밀리에 사업을 결행하였을 것이다.

 세종의 의식이 얼마나 사대숭한(事大崇漢)으로 무장되어 있었는지는 당시 기록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다. ‘사대는 당연히 정성으로 하라’(세종 8년) ‘유교 경서를 연구하라’(세종 15년) ‘모든 학문의 길은 경학이 근본’(세종 18년) ‘양국의 동맹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는 것이므로 정답게 지극히 하라’(세종 13년) 등을 명했던 것이다.4)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당시 식자층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 항(崔恒, 1409~1474)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세종 16년 1434년에 그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자, 세종이 첫째로 발탁해 집현전 부수찬(副修撰)과 궁중의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으로 등용하고, 임금 가까이서 한글 창제를 담당케 했다.5)신숙주의 「保閒齋集」任元濬序에도 ‘世宗創製諺文, 開局禁中, 親揀名儒.’라 하고 그 사실을 천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야담으로 미화된 점인데, 약 2백 년이나 흐른 뒤인 1621년 「어우야담」중 ‘황룡 현몽과 세종 16년 알성장원’이라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1434년 세종대왕이 인재를 뽑기 위해 알성시를 공포한 뒤 시험 전날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낮잠 중에 과장인 성균관 대성전 서편 잣나무에 큰 황룡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놀라 내관을 보내 보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항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응시자는 이 장원백(壯元栢)에서 낮잠 자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柳夢寅, 「於于野談」권 2)

 유몽인(1559~1623)에 의하여 서술된 이 설화에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의 뜻을 받들어 한글 창제를 주관하고 완성한다는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한글 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태허정(太虛亭) 최항의 세종 16년 알성급제를 이렇게 설화화한 것은 그만큼 성스러운 대역사를 완수해야 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둘째, 한글 창제는 한문을 대신할 국자(國字)의 창제가 아니라, 표기수단이 없는 하류 서민층에게 쉬운 문자를 새로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의 글자는 상류층의 한문, 중류층의 이두문에 이어 하류층을 위한 한글이 추가된 3중 체계로 변화되었다. 10년에 걸친 대역사를 세종 25년 1443년 12월에 완성하면서, 세종은 「訓民正音例義」어제(御題) 서언에서 우민 즉 무식한 서민층에게 쉽게 익혀 일상생활의 기록을 위한 문자로 편하게 사용하라고 공표했다. 이는 애초부터 지식층의 반발을 전제하고 한글의 사용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한 것이었다.6)

 그런데 이렇게 미리 그 대상을 밝혔음에도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일파가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그들을 불러 한두 가지 질문을 하고 이튿날 석방했다.7)

 필경 세종은 저들의 문물 후진화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간취하고 벌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은 이후 재발하지 않았다. 당시 청백리로 알려져 있던 최만리를 필두로 한 그들의 반대는 충심에서 비롯된 염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군신이 같은 지식인으로서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세종의 신문자 행용 정책은 강행되었고, 한자음 표준화를 위한 문서 번역과 신문자 보급을 위한 해설서 편찬, 서민들에게도 읽히기 위한 악장(樂章) 「용비어천가」창작 등으로 급물살을 탔다.

 이렇게 해서 인공문자 한글의 창제가 거둔 성공은 세종 27년 1445년 「용비어천가」 가사 번역, 1447년 「석보상절」서술과 「월인천강지곡」창작 등으로 확인된다. 그 성공의 비결은 표기할 대상어에 대한 정확한 음운 분석, 음운 식별이 완전히 가능한 자소(字素)의 완비였다. 이 성공은 당시 언어학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명시해주는 실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오늘날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해 국자 창제와 한글 전용 혹은 민족자주정신과 한자 폐지 등으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그렇게 위조하지 않고도 그의 독창적인 창조성과 진취성에 대해서만 천명해도 충분할 터인데, 오늘날의 시류에 맞추어 과하게 해석하는 것은 자칫 교훈은커녕 반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3.우리말의 역사상 한글이 갖는 한계

 역사상 문자로서는 당초에 한자만 쓰였다. 당시 한자는 우리말에 적용한 차자표기의 개발로 한문 원래의 한자와 이두, 향찰 등의 차용 한자로 용법상 양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2중체계는 15세기에 이르러 한글이 추가됨으로써 3중체계로 복잡해져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다가 다시 2중체계로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면서 한글이 비로소 격상되지만, 그것은 순국문에 한문 번역,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병기하는 것이었지 독립적인 순국문은 아니었다.8)

 순국문이 아닐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해독상의 의미 불명, 오독 때문이었다. 기록을 보면 한글 전용을 선도했던 주시경(1876~1914)조차 ‘한문 아는 사람도 한글로만 쓴 글은 10중 7~8은 모르니, 차라리 한자로나 쓰면 한문 아는 사람이나 시원히 뜻을 알 것이라’고 동음어 문제를 지탄한 바 있다.9)

  1945년 광복 후 팽배해온 ‘한글전용주의’에 대한 반론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7할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들을 순한글로 표기는 할 수 있어도 동음이의어가 많은 까닭에 그 내용의 판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력상의 어려움 때문에라도 오늘날 많은 한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한글전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世宗實錄」권 103, 20 뒤)
2) 文物禮樂, 比擬中華, 分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之香, 而取螳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世宗實錄」권 103, 20 전)
3)『페지』는 영어 ‘page’를 당대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중 도서명이 아님에도 『』표기로 처리한 것들은 원저의 표기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4)上曰, 惡是何言也. 事大當以誠, 皇帝已知産於吾國, 不可誣也. (「世宗實錄」권 33, 19 후)
必欲精熟貫穿 , 莫如專經之學. (「世宗實錄」권 59, 13 후)
上, 命集賢殿副校理李季旬. 金汶等曰, 凡學之道, 經學爲本. 固所當先. 然只治經學. 所不通乎史 則其學未博. 欲治史學. (「世宗實錄」권 74, 10전)
中國與本朝, 合爲一家, 情親至矣. (「世宗實錄」권 53, 4 후)
5) 宣德甲寅, 英陵臨策士, 擢公第一, 授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 合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 「訓民正音」, 「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正. 雖規模措置皆稟睿旨, 而公之協亦多. (崔 恒, 「太虛亭文集」권1), (徐居正, 崔文靖公碑銘 幷序 1~2장)
6)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 ( 「世宗實錄」권 102, 42전)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絡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 憫然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世宗實錄」권 103, 36 후)
7) 上覽疏, 謂萬里等曰, …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題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世宗實錄」권 103, 21 후)
8) 勅令 第一,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 自本日止. … 公文式第十四條 法律 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高宗實錄」권 32, 64 전~65 전) 一般解釋上에 疑誤할 慮가 有할뿐더러 規式에 違反되겠삽기 左開條件을 設定 施行할 事로 閣議에 決定하야 內閣總理大臣이 各部에 照會를 發홈. 一, 各官廳의 公文書類난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하고, 純國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함을 不得홈. 一, 外國官廳으로 接受한 公文에 하야만 原本으로 正式處辨을 經하되, 譯本을 添附하야 케 홈. (「官報」3990호, 1908년 2월 6일, 官廳事項)
9) 山 산이라 하던지 江 강이라 할 것 같하면 이런 말들은 다 한문 글자의 음이나 또한 조선 말이니 이런 말들은 다 쓰난 것이 무방할뿐더러 맛당하려니와 만일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이 한문의 음으로 써서 노은 글자의 뜻을 몰을 것 갓하면 단지 한문을 몰으난 사람들만 아지 못할뿐이 아니라(미완, 쥬상호씨, 국문론, 「독립신문」2권 114호, 1897년 9월 25일) 한문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문의 음만 취하야 써서 노은 고로 흔히 열 자면은 일곱이나 여덟은 몰으나니 차라리 한문 글자로나 쓸 것 갓하면 한문을 아난 사람들이나 시원이 뜻을 알것이라 그러나 한문을 몰으난 사람에게는 엇지하리요 이런즉 불가불 한문 글자의 음이 조선말이 되지 안한 것은 쓰지 말아야 올을 것이요…(쥬상호 씨, 국문론, 전호 연속, 115호, 1897년 9월 28일)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방문객 | 2009.06.21 22: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도움 많이 됬습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온한글 | 2009.06.22 09: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방문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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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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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의 창제와 반포
 
 한글의 반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한글의 창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한글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에 반포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443년 창제와 1446년 반포라는 설은 <세종실록>의 다음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世宗實錄> 25년(1443) 12월조 끝부분
(2)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
    <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 끝부분


 20세기 초의 학자들은 이 두 기록을 놓고서 고민에 빠졌다. 1443년 12월에 언문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1446년 9월에 다시 훈민정음(=언문=한글)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한글이 완성된 시기가 둘 중 어느 것인지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완성되기는 했으나, 이것을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어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1446년 9월에 최종완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추측을 보태어, 1443년 12월에는 한글이라는 문자를 정식으로 온 나라에 공표한 것은 아니나, 1446년 9월에는 한글을 온 나라에 반포(頒布)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오게 되었다.

 한글날을 정함에 있어서도, 위의 두 기록 중 후자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1443년 12월의 언문제작은 말하자면 일종의 베타버전인 셈이고, 1446년 9월에 정식으로 출시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두 기록 모두 정확한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냥 ‘이 달에(是月)’라고 하여서, 한글날을 정확히 며칠로 해야 할 지 난감하였다. 그래서 그냥 9월 그믐날인 9월 30일로 가정하고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2)의 기록은 훈민정음(=언문=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도 함)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세종은 1443년 12월 한글을 완성한 뒤, 신숙주, 성삼문 등의 신하들로 하여금 한글과 관련된 연구 및 여러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게 하였는데, <훈민정음>은 그러한 책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한글의 제자원리 및 사용방법을 해설한 책인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숙주 등의 신하들이 이 책의 원고를 작성하여 1446년 9월에 완성한 것이다.
 실록에서 예컨대 ‘東國正韻成’이라고 하면 <동국정운>이라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며, 이와 비슷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2)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의 완성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의 책의 완성을 말하는 기록인 것이다.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정식으로 출간된 시기는 아니다. 위의 (2)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원고, 즉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이것을 책으로 간행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주자소나 교서관 같은 출판 관련 기관에 원고를 보내면 거기서 이 원고로 활판을 짜거나 목판에 글자를 새겨야 하고 이것을 먹으로 찍어내고 제본하는 등등의 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책이 완성된다.
 완성된 책을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이 이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이것을 보통 반사 (頒賜)라고 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신하들에게 반사(=반포)한 것은 1446년 9월보다 최소한 몇 달 뒤의 일일 것이다. 원고가 완성되고 신하들에게 반사되기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일도 종종 있다. 요컨대 1446년 9월은 <훈민정음>이 반사 내지 반포된 시기도 아닌 것이다.

 위의 내용은 일찍이 1930년대에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김민수(金敏洙) 선생 같은 분은 위의 (2) 대신 (1)이 한글의 완성시기임이 분명하므로 한글날도 이에 따라 양력 1월(음력 12월 그믐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선생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잘못된 주장도 대중들에게 계속 유포되었다. 한글이 1443년 12월에 완성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텐데, <세종실록>을 비롯한 사료에서 한글 반포에 관한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중대한 일이, 그것도 공식적인 일이 사료에 누락되었을 리는 없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한다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상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는 아래에서 논하겠다.

 오랫동안 실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이 194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그 책의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문의 날짜가 1446년 9월 상순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원고가 완성된 시기를 좀 더 좁혀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본래 (2)의 기사를 바탕으로 한글날을 음력 9월 그믐날로 잡았었는데, 이것을 20일 정도 앞으로 당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한글날을 10월 29일에서 10월 9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이 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된 날이 아니라 그 문자를 해설한 책의 원고가 완성된 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 한글 창제의 주체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세종이 임금으로서 여러 政務에 바빴을텐데 혼자서 한글 창제 업무를 담당했겠느냐? 집현전에 훌륭한 신하들이 많이 있었으니,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 한글 창제 업무는 집현전의 신하들이 하지 않았겠느냐’고 다시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즉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親制說보다는, 세종이 신하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協贊說 내지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로는 신하들이 만들었다는 命制說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글을 세종이 親制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1)이 그러하고, <훈민정음>(속칭 해례본)의 정인지의 서문도 그러하다.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히 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려 주신 聖人으로서 제도와 施政 업적이 百王을 초월하시며, 정음을 만드신 것도 옛것을 본뜨지 않고 자연에서 이룬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인위적인 사사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다. (癸亥冬 我殿下 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 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訓民正音> 鄭麟趾 序 (1446년 9월 상순)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런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한글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작업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위의 (1), (2)의 실록 기사에서 ‘이 달에’라고만 하고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지 않은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실록에서 이렇게
날짜를 명기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세종이 어전에서 공개적으로 신하들에게 한글 관련 사업을 하도록 명을 내렸다면, 史官이 이것을 史草에 기록했을 것이고, 이것은 실록 편찬시에 사초의 정확한 날짜와 함께 수록되었을 것이다.

 위의 (1), (2) 기사에 날짜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그 사건이 공개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세종이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했던 것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이 완성된 이상 언제까지나 비밀로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자는 널리 사용하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세종 26) 2월 16일이다. 
 
(4)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과 진양대군 王柔, 안평대군 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을 임금께 여쭈어 결정하였다. (이 일에 대한) 상과 보상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命集賢殿校理崔恒 副校理朴彭年 副修撰申叔舟 李善老 李塏 敦寧府注簿姜希顔 等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東宮與晉陽大君王柔安平大君瑢 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 <世宗實錄> 26년(1444) 甲子 2월 16일 丙申條

 나중의 결과야 어찌 되었든, 위 (4)의 기사는 세종이 한글을 가지고서 공개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운회>(<古今韻會擧要>로 추정됨)라는 중국의 韻書(한자들을 발음별로 분류한 책)에 한글로 음을 표시하여 달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일에 집현전의 비교적 하급관리에 속하는 신하들을 동원한 것이 주목된다. 집현전의 관리들을 동원하고 싶으면,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집현전의 책임자와 상의하여 人選을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일을 급속하게 추진한 듯하다. 당시 집현전의 사실상의 책임자는 副提學인  崔萬理였다, 

 최만리로서는 자기를 제쳐놓고 새파랗게 젊은 직원들을 차출해 간 세종의 처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한글이란 걸 만들어서 뭔가 일을 추진하려 하는 세종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최만리의 등을 떠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 20일 그 유명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한글 창제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는데, 그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하여 일찍부터 드러내 놓고 한글 창제 사업을 진행했다면, 최만리 등이 이제 와서 반대하기 시작했을 리 없다. 세종이 혼자서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몰랐을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 아닌 까닭에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는 것은 이 때(1444년 2월)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대 상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 본 세종은 크게 진노하여서, 상소에 참여한 최만리 등 7명의 집현전 관리들을 불러다 호통을 친 뒤 의금부에 가두도록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석방했다). 세종이 상소에 참여한 관리들을 불러다 놓고 한 말을 보면 세종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세종의 반응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또 이두를 만든 본 뜻이 곧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便民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언문도 또한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薛聰은 옳게 여기면서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② 또 그대들이 韻書를 아느냐? 四聲과 七音을 알며 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③ 상소문에 말하기를 “하나의 새롭고 신기한 재주”라고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소일거리가 없어서 책을 벗삼고 있는 것이지,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④ 또 내가 늙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세자가 도맡아서 하고 있고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참여해서 결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언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위의 ②는 세종이 음운학에 대해 지닌 학문적 자부심을 잘 드러내 준다.
한글은 당시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음운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학자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할 만한 당시의 음운학자를 꼽자면 세종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세종은 그러한 언어학적 식견을 가지고서 한글을 만들었으며, 기득권에 젖어 있던 儒臣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올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글 창제 사업을 신하들 몰래 은밀히 추진하였다. 한글을 다 만들고 나서, 한글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집현전의 신숙주, 성삼문 등을 비롯한 젊은 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儒臣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세종은 강한 의지로 이것을 돌파한 것이다.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위의 내용은 사실 이기문(李基文) 선생이 오래 전에 소상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일반 대중과 학자들의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글의 協贊說이나 命制說을 옹호하는 이들은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친제설에 반하는 증거로 들곤 한다.

(5) 世宗께서 諺文廳을 설치하여 申叔舟, 成三問 등에게 命하여 諺文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字體는 梵字를 본받아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語音 가운데 文字(漢字)로 적을 수 없는 것도 모두 통하여 막힘이 없다. <洪武正韻>의 글자들 또한 모두 諺文으로 쓰고 드디어 五音을 나누어 분별하니, 이를 牙音, 舌音, 脣音, 齒音, 喉音이라 하는데, 순음에는 輕重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正反의 구별이 있고, 글자에 또한 全淸, 次淸, 全濁, 不淸不濁의 차이가 있다. 비록 무지한 아낙네라도 똑똑히 깨닫지 못함이 없을 정도이니, 聖人께서 物을 창조하시는 지혜는 凡人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世宗設諺文廳 命申高靈成三問等 製諺文 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二字 其字依梵字之 本國及諸國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 洪武正韻諸字 亦皆以諺文書之 遂分五音而別之 曰牙舌脣齒喉 脣音有輕重之殊 舌音有正反之別 字亦有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之差 雖無知婦人 無不瞭然曉之 聖人創物之智 有非凡力之所及也) 성현 <용재총화> 권7

 세종이 언문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을 시켜서 한글을 만들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다음의 기사들과 함께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①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친히 이름난 선비 8명을 뽑아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을 짓는 것을 맡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親簡名儒八員 掌製訓民正音東國正韻等書) 姜希孟
    「太虛亭墓誌文」
  ②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 궐내에 局을 열어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을 특별히 뽑아 해례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깨치게 하였다.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極簡一時名儒 著爲解例 使人易曉) 任元濬
    「保閑齋集序」
  ③ 임금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上以本國音韻 與華語
      雖殊 其牙 舌脣齒喉 淸濁 高下 未嘗不與中國同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母二十
      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姜希孟「文忠公行狀」
  ④ 세종께서 “우리 나라의 음운이 중국말과 비록 다르나 그 五音(牙舌脣齒喉), 淸濁, 高下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여러 나라가 다 자기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
      本國音韻 與華語雖殊 其五音淸濁高下 未嘗不與中國同 而列國皆有國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 
      母二十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李坡의 「申叔舟墓誌」
  ⑤ 세종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 말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局을 열어 문신들을 뽑아 찬정하게 하였다. (世宗以諸國各製字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字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擇文臣撰定) 李承召 「申叔舟碑銘」
  ⑥ 本朝 세종 28년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다. 임금께서 “모든 나라가 각각 문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의
      방언을 적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없다”고 하여 드디어 자모 28자를 만들어 언문이라 이름하였다.
      궐내에 局을 열어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이를 찬정하게 하였다. 대체로 古篆을
      본떴으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었고 글자가 비록 간이하나 전환이 무궁하여 여러 언어의 소리 중에서
      문자(漢字)로 능히 적을 수 없는 것까지 다 통하여 막힘이 없다. (本朝世宗二十八年 御製訓民正音 上以爲
      諸國各製文字 以記其國之方言 獨我國無之 遂製子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命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 撰定之 盖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字雖簡易 轉換無窮 諸語音 文字所不能記者 悉通無) <增補文獻備
      考> 권108 「樂考」訓民正音條


 ①은 崔恒의 文集인 <太虛亭集>에 수록되어 있고 ②~⑤는 申叔舟의 文集인 <保閒齋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6개의 글이 모두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世宗이 諺文 자모 28자를 창제한 후 禁中에 局을 설치하여 名儒(또는 文臣) 몇 명을 뽑아서 訓民正音 解例 등의 책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③~⑥에서는 ‘撰定’이라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인 책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撰定’이란 말이 책이나 詩文을 짓는다는 뜻이므로 <訓民正音>(해례본)과 같은 책을 만들게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지 訓民正音이란 문자를 만들게 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6)의 기록들에서 局을 설치했다고만 하고 구체적으로 局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이 局을 <齋叢話> 권7에서 언급한 諺文廳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문청은 世宗이 언문 자모들을 다 만든 뒤에야 설치되었으며, 그 주임무는 이 문자에 대한 해설서인 <訓民正音>(해례본) 등의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6)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해서 (5)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서로 모순 없이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5)에서 ‘製諺文’이라고 한 것을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만들게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5)에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빠졌지만 그 뒤의 내용은 (6)의 기사들과 일치하게 된다. ‘諺文’이라는 말이 문자로서의 한글이 아니라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을 의미하는 예는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7) (세종이) 만년에는 조정의 업무에 싫증이 나서 朝會에 나오지 않았으나 학문적인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극진히 생각하여 유신들에게 명하여 局을 나누어 여러 책을 차례로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언문>, <운서>, <국조오례의>, <사서오경음해>등이 동시에 찬수되었고 다 임금의 재가를 거쳐 책이 완성되었다. (晩年倦勤 不視朝 然於文學之事 尤所軫慮 命儒臣分局 撰次諸書 曰高麗史 曰治平要覽 曰兵要 曰諺文 曰韻書 曰五禮儀 曰四書五經音解 同時撰修 皆經睿裁成書) 徐居正 <筆苑雜記> 권1


3. 한글의 보급 과정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백성들이 국가에 문서를 제출할 때에도 한자를 이용하여 이두문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한글로 작성한 문서는 국가에서 문서로서의 효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강압에 못 이겨 왜국에 투항한 백성들에게 선조임금은 왜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것을 호소하는 교서를 한글로 써서 내렸다. 이것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계층이었을텐데, 아마도 자기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의 확대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며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을 찍어내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소설을 탐닉하는 이들이 많았다. 순정(純正)한 고문(古文)이 아니라 백화적(白話的)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소설, 통속소설들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정조임금에게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소설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으로의 가치가 있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간행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많은 방각본 한글소설들은, 당시에 소설이 널리 읽혔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도 크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많았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자생활사적 의의도 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의 문자 해득률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 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 




 ⓒ 윤디자인연구소 온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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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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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과의 찰떡궁합, 훈민정음

 이제 한글(훈민정음)의 과학성은 세계의 전문가들이 두루 입증하는 세상이 되었다. 유엔의 유네스코에서 문맹 퇴치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 이름을 ‘세종대왕상(The King Sejong Prize)’라고 명명한 것은 아주 상징적인 예이다.
 ‘문맹률 0%’ 가까운 국민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한글의 과학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과학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과학의 꽃 컴퓨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자임을 입증하면 된다.

 컴퓨터 과학자인 변정용 교수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컴퓨터야말로 한글과 궁합이 매우 잘 맞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만능의 기계로 생각하는 컴퓨터는 단 두개의 숫자 ‘0’과 ‘1’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되풀이하는 것인데 이 세상을 순식간에 정보화시대로 만들지 않습니까? 서양음악의 경우도 ‘도레미파솔라시도’ 일곱 개의 음만을 가지고 모짜르트의 고전음악에서부터 우리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서태지의 랩음악까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 냅니다.
 한글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28글자의 유한수의 기호와 몇 가지의 규칙만으로 천지자연의 무한한 소리를 만들어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한글의 특성이지요. 그런 점에서 한글은 다른 어떤 글자보다 과학적이며 현대 첨단과학의 산물인 컴퓨터의 원리에 매우 잘 부합하는 문자입니다.
  한글이 로마자보다 컴퓨터에 더 적합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자판에 글자를 배열할 때 타자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사용하고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좀 더 자주 사용할 수 있게 배열해야 되는데, 로마자의 경우 소리마디의 구성에서 자음과 모음이 어울리는 규칙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배열이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현행 쿼티키보드에서 R, E, A, D를 칠 때 왼손만으로 쳐야 합니다. 그런데 한글은 한 소리마디 구성에서 자음-모음, 또는 자음-모음-자음의 두 가지로 일정합니다.”1)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한글이 핸드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자임을 입증하면 된다. 핸드폰이야말로 컴퓨터 원리의 최고 집적물이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과학의 꽃이라면 핸드폰은 컴퓨터의 꽃인 셈이다. 핸드폰의 자판은 컴퓨터의 자판보다 글자쇠가 더 적기 때문에 한글의 과학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현재 휴대전화 자판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표 1>에서 보듯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저마다 회사의 이익이 걸려 있어 표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가획과 배합의 한글의 과학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자음과 모음의 과학적 원리를 어느 쪽이 더 많이 반영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자음위주의 배치방식은 모음 최소 배치를 통해 모음자 만드는 원리를 최대한 반영하고, 모음위주의 배치방식은 자음 최소 배치를 통해 자음 만드는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영자 자판과 비교할 때 그 운용체계가 훨씬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널 사랑해’와 ‘I love you’만 비교해 봐도 금방 드러난다. 자모음의 자소 자체는 한글은 10자지만, 영어는 8자로 두 자가 적다. 그러나 실제 자판을 누르는 횟수는 한글은 18번, 영문은 커서를 옆으로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도 26번이다. 
 또한 한글은 굳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도 무슨 뜻인지 거의 알 수 있지만 영문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가령, ‘널사랑해’와 ‘ Iloveyou’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한글과 달리 영문은 대소문자가 나누어져 있어 메뉴버튼을 눌러서 대소문자를 변환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에 매번 메뉴버튼을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2. ‘과학 한글’의 실체 

 2-1. 문자 생성의 과학성 
 일반적으로 과학이라고 하면 자연과 대립적인 말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학을 기술이나 물질문명 차원에서 얘기할 땐 자연과 대립적인 개념이지만, 알고 보면 과학 그 자체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자연과학’이란 말이 있듯이 자연 속의 보편법칙을 찾아내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근대과학을 열고 완성한 갈릴레이나 뉴우튼 역시 자연 속의 보편법칙을 제대로 찾아내 설명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종은 인간의 소리에서 보편법칙을 제대로 찾아내 문자화시켰다. 이는 자음자와 모음자의 상형방식에서 드러난다.




 자음을 순우리말로 ‘닿소리’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음과는 달리 발음하는 과정이 특정 발음기관, 발음부위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에 모음은 순우리말로 ‘홀소리’라고 하는데 자음자와 달리 특정 발음기관과 관련이 없다.
 세종은 이런 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자음자의 원형문자 다섯 자를 발음기관과 발음작용을 상형해 만들었고, 모음자의 원형문자 세 자를 하늘과 땅과 사람의 추상적인 모습으로 상형했다. 그래서 한글은 창제과정이 분명한 가장 인공적인 문자이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문자가 되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문자를 만들고 보니 가장 과학적인 문자가 된 셈이었다.
 소리문자의 대표격인 서양의 알파벳이 소리의 자연 이치를 직접 반영하지 않은 데 반해 한글은 직접 반영한 소리문자인 셈이다. 나머지 문자도 이러한 원형문자에서 배합 확장해 나가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기본 문자 모두가 소리문자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체자라는 것은 가획의 원리를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계열의 문자들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른바 꼭지이응은 생긴 것은 목소리 글자들과 같은 계열이지만 소리로서는 기역과 같은 계열이다. 소리 성질에 따라 어금닛소리는 목소리에서 이어져 나는 곳이므로 목소리 동그라미에 꼭지를 가획하여 만들었다.
 소리 나는 과정을 반영하다 보니 박쥐(이것과 저것을 함께 포함하는)같은 기호가 되었다. 반설음과 반치음도 가획의 원리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가획의 의미가 없고 소리성질의특이성 때문에 특별한 명칭과 더불어 이체자라 한 것이다. 곧 다른 가획자는 획을 더함으로써 거센소리가 되고 원형문자와 논리적 관계에 놓이게 되지만 이들 반설음과 반치음은 그렇게 논리정연한 자리매김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운용(응용)문자는 <표 5>에서 보듯 합체방식에 의해 가로로 합체하는 병서와 세로로 합체하는 연서글자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각자병서의 ㅇㅇ,ㄴㄴ는 글자 설명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문헌에서 쓰인 글자이다.
 이 두 자를 빼면 자음자는 모두 37자, 두 자를 합치면 39자가 된다. 실제 우리말 표기에 쓰이지 않은 글자도 있지만 ‘원형문자’에서 ‘기본문자’로 ‘기본문자’에서 ‘응용문자’로 확대해가는 과정이 논리정연하다.



 모음자의 경우는 원형문자 세 자를 1차 배합하여 초출자 4자를, 2차 배합에서 4자를 만들어, 기본자 11자가 되었다. 초출자, 재출자에 쓰인 아래아(·)는 다른 글자(-, 1)와 대등하게 합쳐진 것이 아니라 글자 생성의 기준역할을 한 셈이다. 운용글자 18자에 쓰인 아래아(·)는 대등한 자격으로 합쳐진 글자이다.

 


 2-2. 문자 도형의 과학성
  
 한글의 두 번째 과학적인 특성은 도형의 과학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수학의 연산기호처럼 간단한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형의 기본이 점과 선과 원이라면, 한글은 이런 기본도형으로 이루어졌다. 직선과 사선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가로와 세로, 긴 선과 짧은 선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그야말로 도형문자, 그래픽 문자를 만들어냈다.
 특히 자음자와 모음자를 막론하고 도형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칭구조가 되었다. 기본 자모음자 28자 가운데, 대칭원리가 적용되지 않은 글자는 ‘ㅋ’자가 유일하다. 자음자를 대칭방식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ㄱ ㄴ’ 의 경우 두 글자 대각선 대칭이다. 모음의 경우는 글자 각각으로 보면 상하, 좌우 대칭이지만 기본 글자를 모두 모아 보면 사방 대칭이 된다. 모음자의 경우, 한 글자 내부 대칭은 물론 기본자 11자가 짜임새(시스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자음자와 모음자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다 보니 자음자 모음자도 합리적인 배치가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아래 그림처럼 21세기 첨단 입체수학인 위상학(topology)의 원리와도 같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문자결합을 이뤄낸다. 한 글자를 같은 자리에서 90도 단위로 회전시키면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음자와 모음자를 확연하게 다르게 도형화시킨 것도 과학적인 특성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훈민정음은 다른 문자와는 달리 자음과 모음의 균형대응이 된다. 영어는 26자 자모 중에 모음은 다섯 자(a, e, I, o, u) 뿐이면서 자음이 21자나 되지만, 훈민정음은 자음이 17자, 모음이 11자로 수적인 균형이 어느 정도 맞는다.



 실제 쓰임새에서 영어는 자음과 모음의 배열이 들쑥날쑥하다. ‘school'은 ‘자자자모모자’이고, ‘apple'은 ‘모자자자모’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매 음절마다 모음이 배치되어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한다. 이런 자음과 모음의 효율적인 대응성은 컴퓨터 자판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한글자판은 왼쪽은 자음, 오른쪽은 모음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어 배우기 쉽고 치기 쉽다. 이에 반해 영어는 모음의 글쇠 위치에 일정한 원칙이 없고 칠 때도 ‘read'의 경우와 같이 오로지 왼손으로만 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음운은 초성, 중성, 종성으로 삼분법으로 나누되 문자는 초성자와 종성자를 같이 쓰게 하는 이원화의 방법을 채택했는데, 오늘날 두벌식 표준화 자판이 가능한 것은 훈민정음의 이런 중층 (이분법과 삼분법)의 속성 때문이라 볼 수 있다.





 2-3. 소리성질의 과학성  
 흔히 한글을 자질 문자 또는 소리 바탕 문자라고 한다. 문자 자체가 소리의 성질을 과학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저명한 문자 학자 샘슨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뒤로 붙여진 이름으로 이제는 자연스러운 명칭이 되었다. 

 “과학적으로 볼 때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글은 일정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습니다. 로마자, 그리스 문자 등 세계의 모든 문자들은 오랜 옛날에 중동지방에서 생겨난 알파벳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글은 음성기관의 소리 나는 모습을 따라 체계적으로 창제된 과학적인 문자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문자 자체가 소리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의 T와 N이라는 글자는 소리를 갖고 있지만 그들과 음성기관의 모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글의 ㄴ은 혀가 잇몸에 닿는 모습을 본떠 만들었고 또 T에 해당하는 ㄷ은 ㄴ에 한 획을 더하여 같은 자리에서 소리 내는 것을 나타내고 글자는 이런 방식으로 발성기관의 모양을 따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계의 다른 어떤 문자에서도 그런 과학적 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한글은 500년 전에 그런 언어학적 원리에 따라 창조되어 실용화되었습니다. 서구의 많은 학자나 지식인들은 이 특이한 한글의 창조원리에 감탄해마지 않습니다.”2)

 자음의 경우 발음기관 위치에 따라 다섯 음으로 나눈 뒤 네 가지 소리성질을 반영해 분류했다. 원형문자 다섯 자 가운데 세 자가 가장 여린 소리인 울림소리에 해당된다. 문자 만드는 원리에 소리성질을 바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거센 소리는 가획자로 이루어져 있고, 된소리에 해당되는 전탁자는 전청글자를 거듭 써서 만들어 소리와 문자의 유기적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모음자도 아래아(·)가 위쪽과 오른쪽으로 향해 있으면 양성모음이요 아래쪽과 왼쪽으로 향해 있으면 음성모음이다. 모음조화의 성질을 문자 자체에 반영해 놓은 것이다. 자음의 경우 발음기관 위치에 따라 다섯 음으로 나눈 뒤 네 가지 소리성질을 반영해 분류했다. 원형문자 다섯 자 가운데 세 자가 가장 여린 소리인 울림소리에 해당된다. 문자 만드는 원리에 소리성질을 바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문자에 소리성질을 담다 보니 다른 문자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1자 1음주의’라는 과학성을 이뤄냈다. 음운과 문자가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최대한 이런 원칙에 근접시킴으로써 읽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특징이 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지는 영어의 불편함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영어는 한 소리가 여러 문자로 표기되거나 한 문자가 여러 소리를 낸다. 이를테면 a는 열 가지 정도의 발음으로, e, o는 열세 가지 정도, u는 아홉 가지 정도로 발음된다. 거꾸로 [o]라는 발음은 ‘all, caught, poll’ 등과 같이 다양한 문자로 표기된다. 그래서 발음기호가 필요한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 바 있다.
 
 “영어를 읽고 쓸 줄 아시오?”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의당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잡지를 어떻게 읽고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영어의 글말에 숨어있는 규칙(맞춤법)을 남에게 설명해 보려고 한 적이 있어요? 말하자면, ‘seed'란 낱말은 왜 ‘cede'나 ‘ceed', 또는 ‘sied'로 쓰지 않고 하필 그렇게 적으며, [sh] 소리는 왜 ‘ce'(ocean)나, ‘ti'(nation) 또는 ‘ss'(issue)같이 여러 가지로 적을 수도 있는 것인지 말이오.” 물론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모두 영어의 글말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드러내고 있는 악명 높은 보기들이다.
 요즘 내가 1학년에 다니는 우리 집 쌍둥이 아들들을 통해서 새로이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영어의 맞춤법은 너무나 일관성이 없어서 비록 맞춤법의 기본규칙(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을 익힌 어린이라고 해도, 아직도 읽지 못하는 낱말이 많을 뿐 아니라, 들은 말을 글로 적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3)
 
  이러한 영어 알파벳의 발음과 기호의 불일치는 숱하게 지적되어 온 것이며, 존 맨도 한글이 모든 알파벳의 꿈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장에서 반 이상을 영어 알파벳의 불편함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어 철자법 알아맞히는 학생들 대회가 매우 비중 있는 행사가 된 것이다.
 세계음성기호(IPA)는 그런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인데, 한글은 그 자체가 이런 음성기호 구실을 할 수 있는 바탕문자인 것이다. 한글은 몇 가지 예외는 있으나 한 음운이 한 문자로 표현되고(/a/-ㅏ), 거꾸로 한 문자는 한 음운(ㅏ-/a/)으로 나타난다.
 이 원리가 지켜진다면 배우기도 쉽고 표기법을 세우기도 쉽다. 또한 정보기기에서의 음성인식에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핸드폰에서 음성으로 이름과 번호를 검색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훈민정음은 소리의 이치를 따랐기에 음률의 이치까지 담을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를 보면 자음들이 어떻게 우리 국악의 오음에서 배치되는지를 분명히 밝혀 놓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를 오행에 따른 관습적 배치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한태동(2003)은 이를 현대음악으로 입증하였다.4)  이렇게 보면 자음에 아래와 같은 동양의 오행철학을 부여한 것은 자연의 소리성질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모음자의 경우 수리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숫자적 의미 부여를 통해서 자음자에 비해 유동적인 모음자의 체계를 좀 더 짜임새 있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해례에서의 설명을 숫자 차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위 설명을 입체그림으로 그려 보면 열 개의 모음이 그야말로 정형화된 기하구조로 배치됨을 알 수 있다. 이런 한글의 자질문자로의 위치를 일본의 저명한 훈민정음 연구학자인 우메다 히로유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이 세상의 글자는 크게 3가지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한자와 같은 뜻글자, 일본의 가나와 같은 음절문자 그리고 로마자나 한글과 같은 음소문자가 그것입니다. 이들 글자들은 만들어진 시대상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기능상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음소문자이면서도 로마자보다 한층 차원이 높은 자질문자입니다. 이것은 한글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특징입니다.”




 2-4. 음절배합의 과학성 
 한글은 영어와는 달리 음절단위로 모아쓴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한글은 가로로 뿐 아니라 세로형으로도 글자를 배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아쓰기 음절글자의 장점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수많은 음절글자를 생성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과학적 원리의 실용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아래의 표에서 보여주는 현대 자모음들만 보더라도 현대어에서 생성될 수 있는 음절글자는 받침 없는 음절 399자(초성 19자 X 중성 21자), 받침 있는 음절 10,773자(399자 X 종성 27자) 등 무려 11,172자나 된다. 15세기의 자음자와 모음자는 현대말보다 훨씬 많으므로 생성 가능한 글자 수도 더욱 많았다.
 15세기 자음자의 <표 5>와 모음자의 <표 6>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받침 없는 음절은 986자(34자×29자), 받침 있는 음절은 33,524자(986자×34자)에 이른다. 이러한 놀라운 숫자는 한글의 과학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만큼 인간 소리에 대한 표기영역이 넓다는 반증인 것이다. 



 3. 마무리
 
 한글의 과학적 원리의 원천은 ‘훈민정음 해례본’ 중 제자해에서의 다음 설명이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 내용을 오늘에 되살려 해석하면 자연의 이치에 따라 만든 문자가 바로 한글이라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한글이 과학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는 오직 음양오행뿐이다. 곤괘와 복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멎고 한 뒤가 음양이 된다. 무릇 천지자연의 어떤 생물이든 음양을 버리고 어찌 살 수 있는가? 따라서 사람의 말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생각건대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뿐이다.
 이제 정음을 만든 것도 처음부터 지혜로써 경영하고 힘써 찾아 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소리에 따라서 그 음양의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닌 즉 어찌 천지의 신(귀신)과 더불어 그것을 부려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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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 2) 훈민정음 기록 영화 ‘세계로 한글로’(감독:이봉원, 시나리오 초안 구성:김슬옹, 제작:국어정보학회), 1996년 10월 9일 KBS 방송
3) Diamond, Jared, 1994,〈Writing Right〉, Discover, June/ 이현복 옮김,「한글 새소식」1994년 8월호.)
4) 훈민정음의 음률도(한태동 2003: 171)
 
구분 변상 변치
불탁(不濁) ㅁ ㅱ
전청(全淸) ㅂ ㅸ    
차청(次淸) ㅍ ㆄ    
전탁(全濁)   ㅆ ㅉ  
기준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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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kgy | 2009.03.28 06: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http://blog.naver.com/pikgy/130044930232
평가 좀 해주세요~!!
BlogIcon 온한글 | 2009.03.29 18:30 신고 | PERMALINK | EDIT/DEL
pikgy님 블로그에 가서
글 읽어보았습니다.
연구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이미지와 함께 한 설명까지,, 대단하시네요!!
한글을 풀어서 서체를 만든다는 건
참 좋은 생각인거 같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보기엔 다소 어려운 감이
있지 않을까 쉽네요.. 좀 더 쉽게 풀어주신다면
많은 분들이 공감하지 않을까요?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장단점을 정확히 짚어드리겠습니다. ㅋ | 2009.05.23 02:3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정보 수집력이 일단 상당하시내요. 이런 걸 쓰는 분들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정보를 수집하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서도 아무튼 참 대단하시단 말을 먼저 드리며 일단 이 글이 길면서도 크게 지치지 않고, 눈에도 즐거운 이유.

1.고지식적인 말이 없다
- 흔히 말하는 '있는 척'하기 위해 영어를 난무하거나 마치 자신이 신인냥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이건 글의 양식이 비교적 객관적인 글이죠(중간 주관적 요소들도 보이지만).
스크롤 압박(?)에 일부는 상당히 고지식적인 글임에도 쉽게 누구나 알 수 있는(세종 대왕의 의지를 이어받은...)어휘로 풀이해 주신 게 굉장히 마음에 들고요. 괜히 어려운 말 쓰고, 영어(여기는 한글을 이해시키는 글인데, 영어가 나왔다면 그건 가차없이 -겠죠?)도 없으며 부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

2.스크롤 압박의 글임에도 지치지 않는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게 정말 보기 쉽게 문단별로, 주제별로 나눠서 포스팅해 주셨는데 이건 +를 주고 싶내요. 그저 문단별로 나눈 것이 아닌 나름대로 글자도 적절히 조정해 가면서 굵기도 중요도에 따라 나눠주셨고, 이게 사실 굉장히 긴 글임에도 정말 재밌게 읽은 것 같습니다.

3.적절한 예시
-사실 글 좀 아는 사람들은 이 예시를 써야만 약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많이 알고 있을 텐데요. 일단 예시를 쓰면 상당히 신뢰도 가고, 설사 짧은 인용문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내용을 단방에 이해시킬 수가 있죠. 위에서 말한 뉴턴, 33,524자(986자×34자)..
무엇보다도 R.E.A.D같은 경우는 굉장히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가 있죠. 딴거 필요없고 편리하게 좌우 연타로 빠르게빠르게 입력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예시 하나하나가 정말 제대로 가져오면 효과가 굉장합니다. +점수 팍팍이죠.

4.이미지를 활용한 서술 방식
-정말 이 긴 글이 그저 한글로만 매꿨다면 눈이 아려왔을텐데, 이미지도 같이 첨부해주셨군요. 현재 엑박처리가 되어 무엇으로 되는지 이해는 안 갑니다만..굉장히 완벽을 추구하시는 것 같군요. 긴 글임에도 그다지 지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문단 나누기도 시원시원하게 나눠져 글이 빽빽히 들어선 모양새가 거의 나지 않는군요.그리고 글자도 막연히 한 색으로 하면 눈이 정말 피로한데 지금 글을 중앙에 두고, 좌우를 비어두게 함으로써 답답하다는 느낌도 배제되는군요.


아쉬운 점
1. 사실 글이 굉장히 길어, 많은 사람들이 읽어도 보기전에 그냥 X로 손이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한글이 굉장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만들어진 글이라 이렇게 담으려면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단점을 찾아내라면 어쩔 수 없는 허점이겠군요.
BlogIcon 온한글 | 2009.05.25 09: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적해주신대로,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이루어진 글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온한글도 재미있게 정보를 전달 해 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글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 ^
| 2011.12.26 17: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굉장히 자세하게 써주셔서 한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문맹률 통계치를 보니 우리 나라가 0% 문맹률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네요. 문맹률 통계치를 조사해 보니 우리나라 문맹률은 1%를 차지하고 있었고, 문맹률 세계 17위였습니다.

혹, 다른 의미에서 0%라고 작성하신 거라면 죄송하고, 다시 한 번 좋은 컨텐츠를 작성해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

지나가던 사람 | 2012.04.24 20: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우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가 학교에서 대회를 나가는데 주제가 한글이거든요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ㅇㅇ | 2012.05.21 17:46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학교 수행에 큰 도움이 됬어요ㅎㅎㅎ
근데 오타가ㅜㅜ
한글이 핸드폰 자판에 가장 잘 어울리는 ~ 문단의 6번째 줄
모두 가획과 배합의 < 가아니라
모두가 획과 배합의 아닌가요?
| 2012.10.15 23:10 | PERMALINK | EDIT/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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