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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와 마케팅

편집디자인으로 살펴보는 한글 꼴의 흐름



글꼴 생산방식에 의한 변화
 
 편집디자인에 사용되는 글꼴의 선호도와 사용빈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글꼴의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이너의 작업 변화를 고려해야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글꼴의 생산방식은 우선적으로 '사진식자기에 의한 시기' '컴퓨터에 의한 시기' 크게 대별할 수 있다. 이 두 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문가에 의한 생산이냐 일반인에 의한 생산이냐 하는 것이다. 전자는 전문가의 안목과 추천에 의해서 글꼴이 골라졌지만 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글꼴이 골라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차이점이 글꼴의 선호도 또는 사용빈도가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식자에 의해서 글꼴이 생산되던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사실상 명조, 고딕 외에는 유행하는 서체라는 것이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광고를 중심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헤드라인체(영문글
Helvetica Black에 대응해 만들어진 고딕계열의 획이 굵은 한글 글꼴) 정도가 아닐까?
 글꼴 개발 자체가 아주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는 작업이었기에 더욱 새로운 글꼴의 출현이 미미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진식자 시기는 사실상 디자이너들이 직관적으로 글꼴을 선택하고 생산하기가 쉽지 않았다. 글꼴을 생산하는 사진식자기가 워낙 고가인데다가 사용방법도 많은 숙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기에 전문 오퍼레이터가 필요했다.
 즉, 오퍼레이터를 통해 글꼴을 생산하는 과정 때문에 많은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작업이 선호되었던 탓에 새로운 폰트에 대한 요구 또한 크지 않았던 것이다.


컴퓨터에 의한 글꼴 생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폰트라는 개념의 글꼴 개발이 매킨토시를 비롯한 퍼스널 컴퓨터에 의해 용이해지게 되면서 명조, 고딕을 중심으로 과거 사진식자에서 사용되었던 글꼴들이 우선적으로 폰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제작된 폰트들은 한글 폰트 제작의 초기인 탓에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탄생하게 되었다. 기존의 사진식자의 글꼴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문가에 의해 제작된 원도를 가지고 제작되었다. 하지만 폰트제작은 이런 사진식자에서 생산된 글꼴을 스캔해서 폰트제작 프로그램에서 형태를 입력해서 만들어야 했다.
 이런 폰트제작 과정에서 서체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오퍼레이터들이 대거 투입되어 기계적으로 제작한 탓에 초기 한글 폰트는 획의 세부 형태라든지 획의 공간배분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다. 그래서 예민한 편집 디자이너들은 컴퓨터가 대두된 초기에도 계속해서 사진식자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 인력을 갖춘 폰트전문회사에 의한 안정된 폰트의 개발과 오퍼레이터를 거치지 않고 디자이너가 직접 글꼴을 생산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이 모니터 상에서 직관적으로 글꼴을 고르고 생산하며 레이아웃을 하게 되면서 많은 실험이 시도되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글꼴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시작했다.





폰트의 양적 팽창과 경향

 
 이러한 욕구를 반영하듯 90년대 중반 이후 폰트는 본문용에서 벗어나 제목용이라 일컬어지는 폰트들의 개발을 통해 엄청난 양적팽창을 보여주었다.
 이런 양적 팽창은 마치 양날의 검처럼 편집디자인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일정 수준이하의 글꼴이 생산되기도 했고, 미숙한 디자이너에 의한 절제되지 않은 폰트 남용으로 출판물이 마치 폰트 견본집처럼 보일 정도가 된 것이다. 90년대 말까지 광고와 출판물에서 다종다양하게 제목용 서체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서 주목을 받던 서체는 윤체, 소망체, 회상체 등을 들 수 있다.

 이 후 2000년에 들어서면서 디지털의 차가움과 건조함에 온기를 불어 넣고자하는 시도들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획을 가지고 있는 비상, 갈대, 소설가, 쿨재즈 등의 손글씨 느낌의 글꼴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손글씨에 대한 관심은 만화가, 서예가, 판화가, 캘리그래피스트 등의 서체를 폰트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광수, 이철수 목판체, 효봉, 유려, 봄날 등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광수체로 대변되는 만화적 손글씨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이후 광수의 변형 글꼴이 계속 개발되고 있고 비슷한 류의 장식체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웹폰트인 대중스타들의 손글씨 폰트와 각종 장식 과잉의 글꼴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일반 대중들의 글꼴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들 폰트는 인쇄매체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지만 주요 소비층인 10~20대의 글꼴에 대한 미감과 선호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책이라는 상품은 결국 주 소비층의 선호도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독자가 선호하는 글꼴이 상품판매에 당연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서체의 미적 수준의 함량미달은 논외가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책의 생산주체의 변화와 글꼴
 
 과거에 책을 만든다는 것은 실상 ‘타이포그래피와 편집디자인'이라는 전문적인 기술과 문선, 조판, 인쇄, 제본’이라는 엄청난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했었다. 이러한 시기에 주로 사용된 글꼴의 경향은 오히려 일목요연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전문가들의 작업,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비전문가인 일개 개인이 결코 쉽게 넘볼 수 없었던 영역이었기에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일정 수준 이상의 글꼴이 선택되고 쓸모에 맞게 부려졌던 것이다. 독자는 전문가가 일방적으로 고르고 꾸려놓은 글꼴을 그저 수동적으로 소비하기만 했던 것이다. 물론 그만큼 전문가들끼리의 금칙과 제약이 많았고 발전과 변화가 더디었던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잡지와 단행본의 본문에 명조체(지금은‘바탕체’라 불리는) 이외의 글꼴이 적용된 예를 찾기란 굉장히 어렵다.
 고딕체는 ‘돋움체’, 즉 제목이나 발문의 역할이지 본문으로는 절대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당시 팽배했던 인식이었다. 일부 전문 디자이너들의 고딕체 본문 사용의 시도는 ‘너무 실험적이고 가독성이 떨어진다’라는 평가와 함께 저지당하곤 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변화는 미뤄지고 있었다. 어쩌면 알파벳조차도 대문자로 시작된 지 2천년 이상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독성 있는 소문자가 개발되었고, 또 산세리프체가 본문으로 사용된 것도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닌 것을 볼 때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디자인적 인식의 성숙에 의해서라기보다 컴퓨터라는 글꼴과 책을 생산하는 도구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밀어 닥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종이로 작성된 문서만큼이나 잦은 빈도로 모니터 상에서 문서를 접하게 된 상황변화가 글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모니터가 아닌 종이로 문서를 접하던 시절, 일본의 ‘나루체’를 원형으로 만들어진 ‘굴림체’는 공간배분에 있어서 밀도가 떨어져 엉성해 보인다는 평을 듣고 사용빈도가 굉장히 낮은 글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도우 오에스에 기본 글꼴로 제공되면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공간배분의 밀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오히려 의도하지 않게 모니터상의 가독성에서 기존의 인쇄용 전문서체에 비해 장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모니터 상에서 굴림체에 익숙해진 사용자들은 종이에 인쇄된 굴림체에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스타폰트, 장식 글씨 등 가독성과 관계없이 장식적이고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선택된 폰트들에 의해 가속화 되고 있다.


글꼴에 대한 선입관과 새로운 글꼴
 
 이런 세태의 변화는 과거 ‘본문에 고딕은 너무 실험적’이라고 치부했던 완고한 편집자들의 입에서 굴림체로 책을 디자인 해달라는 소리가 나오게끔 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런 상황이 한글 폰트의 미래에 대한 단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글을 쓰는 중간에 잠시 멈추고 다시 한 번, 반성의 눈으로 아무리 살펴보아도 굴림체는 디자인적 미감이 너무도 떨어져서 내게는 기피 글꼴이다. 하지만 굴림체가 모니터 상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이유만큼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존에 전문가들에 의해 가독성 위주로 판단되고 제작되었던 폰트들, 특히 본문 폰트에 대한 기준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더 이상의 선입관은 필요 없다. 아주 새로운 개념의 본문 폰트가 개발되어져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폰트를 제작하는 전문가보다도 소비자가 훨씬 수용가능 폭이 커져있다.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태인 것이다.

 물론 소비자의 가벼운 취향에 영합하는 글꼴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글꼴은 상품이기도 하지만 문화다. 인류의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 지적 생산물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 만큼 기능적 효율성과 심미적 형식, 그리고 독자와의 교감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요건들이야말로 세월과 유행을 뛰어넘는 내구성을 가진 불후의 명작, 글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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