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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새로운 시선

'하리꼬미'는 뭐꼬?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곳은 음악 전문지를 만드는 출판사였습니다. 전공인 컴퓨터 공학과는 전혀 딴판인,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지라 정말 모르는 것, 궁금한 것 투성이었는데요, 가장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입사후 첫번째 책 필름 교정을 위해 출력소를 방문하던 날, 이런저런 이유로 제가 한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하게 됐습니다. 멍하니 커피 한 잔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 저에게 출력 기사님은 필름 한뭉치를 던져놓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표지 필름이랑 본문 하리꼬미 판 있습니다. 표지 세네카 두께좀 잘 확인해 주세요”

디자이너에게 온 문자는 저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기다리시는 동안 도비라 교정지 잘 나왔나 얼추 확인좀 바래요”

출력소 자체도 어색했는데, 정체불명의 용어들을 들은 저는 적지않게 당황했습니다. 하리꼬미? 세네카? 도비라?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지난번 말씀드렸던 정체불명의 일본어가 난무하는 건 당구장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인쇄 산업 자체가 일제시대부터 출발해서 그런지 인쇄/출력 산업 용어에는 일본어가 변형된 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 1993년, 문화체육부 주체로 인쇄 출판 용어의 한글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변형 일본어는 계속 쓰이고 있는 실정이에요. 일단 젊은이들이 이를 고쳐보려 해도, 워낙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들 덕분에 이를 바꾸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일단, 이 글에 나온 용어라도 하나씩 알아봅시다. 

kerryvaughan @ www.flickr.com


먼저, 하리꼬미(はり-こみ)라는 말에 대해 알아봅시다. 책을 인쇄할 때는 책 페이지당 한 장씩 필름을 제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종이 낭비는 물론 필름 제작 비용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자르지 않은 종이의 폭에 맞춰 최대한 여러 페이지를 한 개의 필름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만든 판으로 인쇄 작업을 하게 되면 종이와 필름 모두 절약함은 물론 인쇄 시간도 단축할 수 있게 되죠. 이 작업은 ‘터잡기’라는 우리 말로 쓰도록 권장하고 있답니다. 

세네카라는 말은 책의 등 부분을 뜻하는 “背中(せなか)”의 잘못된 표현으로, ‘세나카’라고 해야 그나마 맞는 표현입니다. ‘책 등’이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일본어를... 그것도 잘못된 표현의 일본어를 쓸 이유는 없겠죠?

silas216 @ www.flickr.com


도비라(とびら)는 책 구성중 1장, 2장 하는 ‘장’ 사이에 들어가는 소표지를 말합니다. 주로 글이 많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표제지는 그림, 타이포그래피 등 디자인적 요소가 많이 들어갈 수 있으므로 디자이너들이 많이 신경쓰는 부분이기도 하죠. ‘표제지’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면 될 듯 합니다. 

이밖에도 ‘하시라(はしら)’는 쪽머리글, ‘하기리(は-ぎり)’는 절단기로 바꿔쓰면 될거에요. 이 글에 담지도 못할 만큼 많은 말이 출판/인쇄 업계에서 사용되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좀 불편하시더라도 이런 용어를 한글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용어, 솔직히 좀 얄궂지 않으신가요? ;-)


온한글 블로그 기자단 2기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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