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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래피와 손글씨

유비쿼터스 시대 감성소구로서 캘리그래피



컴퓨터의 등장은 ‘또 다른 문맹인’을 만들어내면서 인류 최초로 ‘부모를 가르치는 세대’가 등장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이전 세대들이 책이나 각종 매체를 통해 학습하고 사고능력 이나 행동방식 등에 있어 부모의 선행(先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반면, 디지털 세대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배우고 익히며 스스로 판단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이들은 쉽게 받아 들이기도 하지만 ‘삭제’ 기능에 익숙해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버리기도 하는 자기편의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있는 디지털은 사회 문화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어 기존의 가치관을빠르게 붕괴시키고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무장한 신인류를 탄생시켰다.또한 모든 것을 규격화, 숫자화, 논리화, 이성화함으로써 인간의 감성적 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개인주의의 팽배 현상을야기해 사회 각계에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디자인과 감성공학

 기술이 진보하면서 차가운 이성이 지배적이던 디자인 분야에서도 감성공학과 연계된 제품들이 줄지어 탄생했다. TV에 와인의 이미지를 부여한 삼성 LCD TV 보르노, 스피커에 도자기를 응용한 삼성 DVD, 초콜릿 이미지의 핸드폰인 초콜릿폰, 에어컨에 인테리어 및 강화유리의 기능을 접목시킨 LG에어컨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또한 자기도 모르게 만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오감광고가 등장하기도 했다.
 가령, 고쿠센 Tank의 감온(感溫) 광고(냉장고에서 약 10°C까지 차갑게 하면 캔 표면에 파란 기린 문양이 나타남)와 산토리 천연수의 감온(感溫) 광고(검은색 눈 모양의결정에 손을 올려 따뜻하게 하면 천연수 페트병 형태의 결정으로 바뀜) 등을 말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도 3D 애니메이션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이미지를 없애고자, 예전의 향수가 묻어나는 2D 애니메이션에 3D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2.5D 애니메이션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시도들은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도 볼 수 있는데, 타이포그래피는 인쇄매체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특히 규격화된 활자의 특성이 디지털의 개념과 맞아떨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서체가 발달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가 정보전달을 위한 가독성의 문제를해결해주고 대량생산 복제의 효율성을 해결해 활자의 혁명을 이뤄낸 것은 사실이지만 기계적인 차가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반면, 디지털의 조작으로 규격화된 작업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쓴 캘리그래피는 감수성을 지닌 가장 아날로그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는 ‘쓰는 예술(Written as an Art)’이라고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는데, ‘좋은(Good)’ 또는 ‘아름다운(Beautiful)’이라는 의미를 지닌 ‘칼리그라피아(Kalligraphia)’에서 유래된 말로, 아름다운 글씨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좁은 의미로는 손으로 쓴 글씨 혹은 손 멋 글씨로 동양의 서예(書藝)를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인간의 의지로 이뤄낸 정형화되지 않은 모든 형태의 그래픽 작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캘리그래피는 동,서양 모두 인쇄문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행해졌기 때문에 그 역사가 3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동서양 문화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르게 발전해 왔을 뿐이다. 서양의 캘리그래피가 장식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동양의 것은 정신세계를 표출하고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측면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 광고, 포스터, 로고 등에서 쓰이는 캘리그래피는 단순한 시각적 쾌락에만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작업한 사람의 손끝으로 전해지는 깊은 감성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감성을 이식하는 캘리그래피

 글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그 글자가 쓰이는 상황에 꼭 맞는 글꼴을 찾아 내는 게 캘리그래피의 핵심이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씀으로써, 규격화된 활자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한 기호(Sign)와 상징성(Symbolization), 그리고 강한 호소력과 아름다움, 역동적인 운동감,신비감 등을 표출할 수 있다. 이러한 캘리그래피의 활용은 크게 디지털 기술이 활용되는 on-line 분야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off-line 분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on-line에서의 활용은 웹사이트의 초기화면, 온라인 게임,배너광고 등 여러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는 디지털 멀티미디어의 차가운 속성에 감성을 이식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기업의 이미지나 해당 컨텐츠에
대해 인간적인 친근감과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전해주기 위한 것이다.배너광고의 경우, 캘리그래피의 표현적
가치는 다소 떨어지지만 방문자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한 요소로 쓰인다.
 또한 싸이월드가 손으로 쓴 글씨를 매뉴얼화한 폰트를 제공하는 것도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디지털 메커니즘에 적용한 것으로, 이 또한 상당 부분 캘리그래피 트렌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 상에서의 또 다른 삶의 공간 ‘세컨드라이프’에서 제공하는 가상공간 남산타워에서는 작은 한글로 한국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이 때 쓰이는 캘리그래피 역시 차가운 컴퓨터 공간에 따뜻한 감정을 불어넣도록 해준다



 이와 같이 디지털 글씨에 캘리그래피의 느낌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서체회사들의 움직임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필묵’과 ‘윤디자인 연구소’에서 시작된 캘리그래피 서체의 상품화는 일반 폰트보다 까다로운 개발과정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손글씨 서체가 주는 감성적 코드와 주목성을 디지털 폰트로 되살려내고 있다. 기왕의 ‘폰트’는 결코 줄 수 없었던 인간적인 느낌과 개성을 글꼴에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행위의 흔적 담긴 '원본'으로서의 존재감

 활자 혁명을 일으킨 구텐베르크 이후 규격화되고 기계적인 활자가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손글씨는 구시대적이고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되어 더욱 설자리를 잃어갔다. 특히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져 디지털의 뒤안길로 서서히 잊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시대, 디지털 패러다임이 장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디지털 노마드,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신인류가 과거로 거슬러 한동안 진부한 것으로 취급되던 손멋글씨인 캘리그래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빅뱅의 시기에 일어난 캘리그래피의 부활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 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지 아날로그적 추억의 산물이나 극단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고집하는 반 디지털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한 ‘아날로그로의 회상적 차원’이 아닌 ‘디지털의 대안적 차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와는 다른 기능적 목적을 띄고 있는 것이다. 즉, 아날로그 시대의 캘리그래피가 전통적·고전적 역할로서의 기능이 강했던 반면, 디지털 시대의 캘리그래피는 테크놀로지에 새롭게 접목되면서 주목성·차별성을 기본으로 친근성과 고급성을 위해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문자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건조한 기계적 폰트의 홍수에 휩쓸려 마침내 디지털에 인간이 종속되는 듯한 관계가 형성되는 시점에서, 육체적인 노동의 결과로 이루 어진 캘리그래피는 사라져가는 인간의 감성을 응축적으로 표현하고, 한글의 아름다움과 손글씨의 인간미, ‘원본’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진 서체의 ‘아우라’를 다시금 찾게 해주는 것이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아름다움’이라는 시각적 즐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위의 흔적을 통해 인간의 감성에 강하게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해결하지 못했던 ‘인간의 감성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디자인계 전반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이것이 캘리그래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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